시사2015. 5. 7. 15:26

원문: Blame Abe’s bad history on diplomat George Kennan


[외교관 조지 케넌: 아베의 잘못된 역사인식의 원흉]

제임스 깁니 


[뉴욕] 일본 총리 아베 신조의 매파 정책, 역사수정주의, 그리고 국내외 언론을 조정하려는 시도는 일본 국내는 물론 이웃 국가들의 비판자들로부터 격렬한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그 분노의 일부는 미국의 슈퍼 외교관 조지 F. 케넌을 위해 남겨두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전후 미국 점령기 초기, 이상주의적인 뉴딜 개혁주의자들과 연합군 최고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 휘하의 우파 지사들이 어지럽게 뒤섞인 연합군 사령부는 일본의 경제와 사회를 자유화하려는 급진적인 시도를 했다. 그런 변화 중에는 전쟁범죄자 기소, 기업집단 해체, 토지개혁과 노동운동 양성도 있었다. 

주로 미국 변호사와 공무원들이 초안을 쓴 새로운 헌법은 시민권을 극적으로 확장시켰다. 그 결과 일본 여성들에게는 역사가 존 다우어가 “현대 헌법 중에 가장 강력한 평등권 조항”이라고 칭할만한 시민권이 주어졌다. (다우어의 퓰리처상 수상작 [패배를 껴안고]는 이 시기를 매우 훌륭하게 다루었다.) 또한 헌법 9조는 맥아더 특유의 호언장담대로 일본을 “태평양의 스위스”로 만들고자 하는 희망 아래 일본을 공식적인 평화주의 국가로 규정했다.

하지만 케넌은 맥아더의 개혁을 전략적 재난으로 향하는 길이라고 보았다. 그는 내전으로 갈라진 중국, 황폐해진 채 분열된 유럽, 냉전이 시동하는 시기에 일본이 “태평양 안보 시스템의 주춧돌”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1947~48년을 시작으로 케넌과 워싱턴에 있는 그의 우군들은 미국의 대일정책을 180도 바꿔놓았다. 전범 재판은 갑작스럽게 끝나버렸고, 공무원들은 파업할 권리를 잃었으며, 미국은 일본의 기업과 수출 산업체들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전쟁 전의 보수적인 정치가와 관료들이 복직되었을 뿐만 아니라 소위 “빨갱이 사냥”을 통해 2만명이 넘는 좌파 노조원들과 기타 노동자들이 해고당했다.

케넌의 “역코스”에 가장 큰 혜택을 입은 인물 중 하나는 아베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였다. 기시는 1941년 대미 선전포고문에 공동서명한 인물 중 하나였으며 군수성 차관으로써 수백, 수천명의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의 강제징용을 감독했다. 다우어는 기시를 “우수하면서 부도덕하다”고 평했고, 또 다른 미국 점령기 역사가인 마이클 샬러는 기시에게 “미국이 가장 총애하는 전범”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기시는 도쿄 스가모 교도소에서 A급 전쟁범죄 용의로 조사를 받으며 3년간 복역하다가 1948년에 다른 전범 용의자 18명과 함께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왔다.

1957년, 기시는 미국이 원조한 자금에 힘입어 총리가 되었다. 샬러에 의하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CIA가 기시와 당시 신생당이었던 자민당의 특정 당원들에게 비밀리에 선거 자금을 지원하도록 권한을 부여했다. 그 대가로 기시는 일본 국민들에게 호응이 좋지 않은 조항은 일부 폐기하면서 미국이 일본내 미군기지를 계속 주둔시킬 권한은 확보하게끔 미일안전보장조약의 개정을 유도했다. 동시에 기밀 협약으로 미국이 일본을 “경유해” 핵무기를 이동시킬 수 있는 권한을 확보했다. (이 조약에 항의한 안보투쟁이 결국 기시의 사임을 이끌었다.)

전후 미국의 가장 큰 전략적 성과가 나토와 최근에 기시의 손자 아베가 개정된 지침을 통해 더욱 강화된 미일 안보관계임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초래한 반대 측면에 대해서는 좀처럼 논해지지 않는다. (국가간 무역 긴장 상태를 대할 때 공리를 위해 경제보다 안보를 우선시하는 미국 노동자들과 정책 입안자들이 입는 피해는 물론이고) 미국은 케넌의 행동으로 인해 일본을 지금보다 훨씬 활기 있고 격동적인 사회로 만들 수 있었던 경제적, 정치적 개혁을 저해시키고 말았다.

만약 일본의 노조들이 번창할 기회가 있었다면 높은 임금을 지지하여 디플레이션 문제 타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수 있다. 미국 대일정책 역코스 시행을 위해 의도적으로 강력한 권력이 주어졌던 일본 관료체계는 일본 국민의 생활 전반에 대해 현재만큼 강력한 통제권을 가지지 못했을 수도 있다. 여성을 위한 동등기회 보호는 단순한 지면상의 활자를 넘어 실질적으로 기능하여, 아베가 요란하게 허풍 떠는 “우머노믹스” 추진을 할 필요조차 없앴을지도 모른다. 일반적인 일본인들은 미국적 기질에 대해 지금보다 더 호의적인 관점을 가졌을 수도 있다.

그리고 자민당은 아마도 이 정도로 장기집권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미국은 자민당을 지키기 위해 1990년대 중반까지 CIA의 자금 지원에 관한 문서의 기밀상태 해제를 거부했다. 국무부가 댄 이유는 “다수의 현직 자민당 지도자가 문제의 시기에서부터 활동했다”는 것이었다. 자민당을 지탱하던 견고한 경제적 이해관계는 현재 아베가 절실하다고 주장하는 구조적 개혁을 가로막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자민당, 특히 아베 정권에는 일본의 미래를 위해 역사를 새로 써야한다고 믿는 당원들이 여럿 존재한다는 점이다. 아베의 내각 관료 중 다수는 전몰자뿐만 아니라 전범마저도 기리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옹호하는 집단에 속해 있고, 또한 난징대학살과 일본군에 의해 매춘을 강제당한 여성들의 전시 기술을 부정하려는 일본회의라는 단체와 교류를 하고 있다. 그런 수정주의와 그것을 부정하지 않으려는 아베의 태도는 중국과 대한민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강화된 미일 군사 협동관계의 효과를 약화시킨다.

만약 국가적 동화보다 권력정치를 믿었던 현실주의자 케넌이 이 상태를 안다면 실망할 것이다. 케넌은 일본에서의 활동을 마샬 플랜과 함께 “정부 소속으로 행했던 가장 의미 있는 기여”라고 여겼다. 케넌의 “태평양 안보 시스템”이 더욱 가까워진 이 때, 아베의 역사적 망상이 그 비전의 가장 큰 장애물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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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바우치
영화2015. 5. 4. 14:02

원문: 왜 스타워즈 프리퀄 삼부작은 많이 미움 받는가?

스타워즈의 날을 기념해 번역해 봤습니다.

필자와 동의하는지 여부는 넘어가더라도, 적어도 왜 대다수의 오리지널 삼부작 팬들이 프리퀄에 격렬히 반응했는지 자비 없이 잘 정리가 되어있는 글이라서 꽤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왜 스타워즈 프리퀄 삼부작은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가?]


왜냐면 스타워즈 프리퀄 삼부작은 오리지널 삼부작만큼 좋은 영화들이 아니었고, 그에 비해 기대치는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또한 스타워즈 프리퀄은 그 자체만으로 매우 형편없는 영화들이기도 하다. 흔히들 프리퀄이 오리지널 삼부작을 망쳤다고 말하지만, 애초에 오리지널 삼부작이 마련해준 지지층이 없었더라면 프리퀄이 흥행조차 못했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는다. 만약 [보이지 않는 위험]이 최초의 스타워즈 영화였다면 스타워즈는 지금쯤 극소수의 팬들이나 기억하는 잊혀진 영화 시리즈가 되었을 것이다.

오리지널 삼부작의 장점 중 하나는 단순한 선악 대결구도다. 다스베이더와 황제는 사악했고, 루크와 그 일행은 악하지 않았으며, 나쁜 놈들은 착한 놈들을 없애려고 전쟁을 일으켰고, 결과는 좋은 영화들이었다. 

하지만 프리퀄은 무역분쟁에 대한 내용이었다. 무역분쟁에 관한 좋은 영화가 있다면 하나 대봐라. 인물들이 서성대며 대화하거나 상원회에서 투표하는 장면이 많았고 라이트세이버로 재밌는 일을 하는 장면은 적었다. 한마디로 지루한데다가 더 나쁜 점은 각본이 나쁜데 지루하다는 점이다. 이왕 무역분쟁에 관한 대화를 본다면 흥미로운 캐릭터들이 톡 쏘는 대사를 주고 받는 장면을 보고 싶다. 처참한 대사를 들으면서 “왜 저 사악한 자본자들은 아시아 억양으로 말하는 거지? 대체 왜 그렇게 설정한 거지?”같은 딴 생각이나 하고 싶지는 않다.

오리지널 삼부작은 영화사에 남을만한 악역을 낳았고 카리스마적인 영웅 캐릭터들과 대립시켰다. 2003년 미국 영화연구소는 역대 가장 위대한 영웅 캐릭터와 악역 캐릭터 순위를 매겼다. 다스베이더는 악역 3위에 올랐고, 한 솔로는 선역 14위, 오비완 케노비는 37위에 올랐다. (원작 삼부작에서 알렉 기네스가 연기한 버전의 오비완) 프리퀄 캐릭터는 당연히 한명도 없었다. 그나마 프리퀄에서 가장 흥미로운 악역이라고 칠 수 있는 다스마울의 출연분량은 15분 남짓이고, 유일하게 흥미로운 선역은 오비완이지만 그마저도 맥그레거가 알렉 기네스 흉내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오리지널 삼부작은 훌륭한 스토리 전개와 박진감 넘치는 결말을 주었다. [제다이의 귀환] 후반부에 주인공들은 적의 덫에 걸리고 만다. 한과 레이아는 엔도르에서 붙잡혔고, 함대는 데스스타에 의해 폭발당하기 직전이었으며, 루크는 다크사이드로 넘어갈지 고민하고 있었다. 주인공들은 지고 있었고, 쉽사리 타결책이 보이지 않았다.

세 번째 프리퀄의 결말에서는 네 명의 주역들 사이에 매우 길고 지리한 라이트세이버 결투가 있었다. (요다 VS 팰퍼틴, 오비완 VS 아나킨) 그리고 누가 살아남을지는 뻔했다. 긴장감도 박진감도 없고, 프리퀄이 다 끝났다는 안도감만이 있었다.

사실 어떤 추가적 짜증 요소가 없었더라면 끔찍하게 형편없는 대사와, 의미 없는 플롯과, 캐릭터성의 부재 정도는 잊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자자 빙크스는 모든 의미에서 큰 실수였다. 전혀 웃기지도 않았고, 거의 모든 장면에 삽입되는 바람에 더 큰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자자는 다른 인물들이 대화하는 장면 배경에서 덜렁댔고, 똥을 밟고, 방귀를 맞고, 한마디로 최저급의 싸구려 개그 캐릭터처럼 행동했다. 심지어 자자에겐 만회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아서, 끝까지 용기나 지혜를 드러내는 장면도 없이 그냥 영화 내내 망한 캐릭터였다. 원작 삼부작에는 순수한 개그캐릭터는 필요 없었다. 전개 과정에 직관적인 개그씬을 넣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자는 두 명의 엄청나게 짜증나는 아나킨들과 함께 프리퀄 삼부작 내내 짜증덩어리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증오를 일으키기엔 부족하다. 프리퀄은 지루하고 짜증나고 영혼이 없지만, 그런 영화는 수없이 많다. 프리퀄이 미움받아야 하는 이유는 원작 삼부작을 깎아내리기 때문이다. 프리퀄이 나오기 전까지 아나킨 스카이워커는 포스의 다크사이드로 끌려온 선량한 파일럿이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아나킨이 징징대고 짜증나는 아이였고 연기 못하는 낭만적인 바보에다가 하필이면 C3PO와 R2D2의 절친을 디자인한 놈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다스베이더는 속죄의 순간이 주어진 악인 중의 악인이 아니라 하늘을 향해 폭소가 터질만큼 끔찍한 “안돼애애애ㅐㅐㅐㅐ”라고 외친 가망 없는 루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프리퀄은 그냥 나쁜 영화들이다. 게다가 좋은 영화들을 악화시키기까지 했다. 그러니 당연히 미움받는 것이다.



Posted by 시바우치
게임2013. 12. 9. 11:03

몇 달 전부터 트위터에서 합작(주로 일러스트)이 자주 눈에 띄었습니다. 특정 테마를 가지고 여러 사람들의 작품을 한 온라인 공간에 모아 전시하는 식인데, 마침 요즘 진삼국무쌍7을 즐기던 차라 해외의 무쌍 관련 팬아트를 찾아보다가 국내 무쌍 팬아트 합작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간단히 말하자면 제가 무쌍 팬아트를 잔뜩 보고 싶었던 사심입니다^^;) 혹시나 사람이 안 모일까 해서 친분이 있는 지인들과 동생들도 끌어들였는데 다행히 협조적이라 처음에는 이 분들의 이름부터 올리고 모집을 시작했는데....

합작 모집 페이지: http://collabo12.tistory.com/1

물론 꽤 오랫동안 팬층을 보유한 무쌍시리즈라 어느 정도 인원수는 모일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순식간에 스무 작품이 넘고...당황해서 다른 합작들에서 이따금 보이듯이 감당할 수 있는 숫자로 제한할까도 했지만 30점이 너어간 시점에서 어차피 무쌍은 머릿수 게임인데 갈 때까지 가 보자는 오기가 들어서 기한까지 모집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모집기간 일주일 동안 모인 결과는 50명이 신청해서 71점. 이 중에서 최종적으로 모인 작품은 47명이 그린 64점의 엄청난 규모의 합작이 탄생했습니다. 원작의 명성(=머릿수...)에 지지 않는 대규모라고 할 수 있지요. 게다가 성의와 애정이 듬뿍 들어간 존잘 연성들로 가득 차서 작품 모집 기간 동안 저만 보기 아까워서, 빨리 공개하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릴 정도였습니다.


합작 공개 페이지 링크: http://collabo12.tistory.com/2


백문이 불여일견, 그 장관을 직접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멋진 기획이 가능했던 이유는 전적으로 참가해서 훌륭한 작품을 제공해주신 분들, SNS로 널리 확산해주신 분들 덕분입니다. 몇 번이고 감사의 말씀을 올려도 모자라지 않습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압도적인 양에 막바지에 힘이 딸려 동생 위부인의 도움을 받아서, 고마움을 표하고 싶습니다. 

사적인 야망 중 하나로는 이 합작이 국내외에 널리 확산되어 코에이가 다시 한글화에 대해서 숙고해줄 자극이 되었으면 합니다만...(ㅎㅎ) 그러지 않더라도 한국 게이머들도 이렇게 무쌍시리즈를 사랑한다는 점(그리고 이렇게나 존잘밭이라는 점!!)이 널리 알려졌으면 합니다.

여담이지만, 모집 도중에 왜 건담무쌍이나 원피스 해적무쌍 등은 포함하지 않았냐는 문의가 가끔 있어서 첨언하자면, <진 삼국무쌍 시리즈>, <전국무쌍 시리즈>, <트로이무쌍>, <무쌍오로치 시리즈>로 제한한 것은 코에이의 오리지널 무쌍 타이틀들이고 외부 작품과의 프랜차이즈는 혼동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피스나 건담 캐릭터라면 건담 합작이나 원피스 합작에서 따로 모집해도 충분하니까요^^


저는 주최, 편집 외에도 장비와 가라샤로 참가했습니다. 장비는 원래 그릴 생각이 없었는데 유비와 관우가 신청되어서 장비도 넣어줘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 가라샤는 원래 좋아하던 캐릭터였고, 성우 시카노 쥰씨가 올해 안타깝게 고인이 되신 사마의 성우 타키시타 츠요시씨의 부인 되시는 분이고 실제 무쌍오로치2에 두 캐릭터 사이의 특수대화도 있어서, 나름 추모의 의미를 담아 그려봤습니다. 




Posted by 시바우치
시사2013. 10. 18. 12:41

  

원문링크 

마운트스튜어트 엘핀스톤 그랜트 더프 경이 카를 마르크스와의 만남에 대해 영국 제 1 왕녀 빅토리아에게 올린 개인 편지

당시 영국 군주(빅토리아 여왕)의 장녀이자 프로이센 왕세자(독일제국 선포 이후 독일제국 황태자, 즉위 후 독일 황제 프레드릭 3세가 되는)의 아내인 빅토리아 아델라이드 메리 루이사는 영국 정치가 더프에게 마르크스에 대한 관심을 표했습니다. 가족들에게 "비키"라고 불리던 빅토리아 왕녀는 어릴 때부터 영특하고 지적이었으며 시집 간 독일에서 여자아이들을 위한 고등교육기관과 간호사 학교를 설립하고 예술과 교육을 후원하고, 자유주의적인 성향이 있어 아들 빌헬름 2세와 정치적으로 대립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빅토리아 왕녀는 당시 여론을 들끓게 했던 마르크스에도 흥미를 가졌던 듯 합니다. 

이에 따라 더프는 1879년 1월 31일 데본셔 클럽에서 마르크스와 만나 바로 다음날 왕녀에게 편지로 보고를 올렸습니다. 더프는 회고록에 수신자에 대한 내용은 전부 삭제한 이 편지의 일부를 삽입했습니다. (1873-1881년 일기의 기록들)

이 편지의 전문은 1949년 7월 15일자 타임즈지 문예부록에 A. 로스슈타인의 "카를 마르크스와의 만남"에서 처음 출판되었습니다. 

편지 전문:

1879년 2월 1일

마담,

제가 근래에 황태자비 전하를 뵐 영광을 누렸을 때 전하께서는 카를 마르크스에 대한 호기심을 비치시며 그를 아느냐고 여쭈셨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마르크스와 교제할 기회를 가지고자 하였으나, 그 기회는 어제 오찬 때에 그를 만나 세 시간을 함께 보내기 전까지는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마르크스는 단신에 다소 작은 몸집이고, 회색 머리카락과 턱수염이 아직 검은 콧수염과 기묘한 대조를 이루었으며, 얼굴은 둥근 편이고 이마는 잘 생겼습니다. 눈빛은 다소 엄혹하나 전체적인 인상은 호감이 가는 편으로, 경찰이 생각하는 것처럼 요람 속의 아기를 잡아먹을만한 신사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매우 박식한, 아니 조예가 깊은 인물로, 고대 슬라브어를 비롯한 변두리 학문을 향한 관심의 계기였던 비교문법에 더 흥미가 많았습니다. 화제는 기발한 방향으로 틀기도 하고 종종 드러나는 메마른 유머감각이 다채로움을 더했는데, 가령 헤제키엘의 비스마르크 공에 대한 책을 언급할 때에는 부슈 박사의 책과 비교하면 마치 구약성서인 것처럼 말할 때 그러하였습니다. [G. 헤제키엘의 1869년 저서 <Das Buch vom Grafen Bismarck>를 의미]

전체적으로 별다른 열정은 드러나지 않는, 매우 현실적이고 다소 냉소적이면서 흥미로운 내용이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마르크스가 과거나 현재에 관해서 말할 때에는 매우 정확한 고찰을 보이지만, 미래에 관해서는 막연하고 불충분한 내용을 말했습니다.

마르크스는, 타당한 근거를 이유로 러시아에서 멀지 않은 기간 내에 큰 붕괴가 일어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위에서부터의 개혁이 원인으로, 오래되고 부패한 체제가 견디지 못해 전체적으로 무너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체제를 대신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생각이 없었고, 단지 러시아는 오랫동안 유럽에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이라고만 했습니다.

다음에는 그 운동이 독일에도 퍼져 현 군사제도에 대한 반란의 형태로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하지만 어떻게 군대가 사령부에게 반란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자, 마르크스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현재 독일에서는 군대와 국가가 거의 일치한다는 것을 잊으셨군요. 당신이 알고 있는 그 사회주의자들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훈련된 병사입니다. 군대라고 했을 때 상비군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비군(Landwehr)도 고려해야 합니다. 상비군 내에도 많은 불만이 쌓여있고요. 가혹한 규율로 인한 자살율이 이렇게나 높았던 군대는 없었습니다. 자신을 쏘는 지점에서 상관을 쏘는 단계까지의 거리는 멀지 않으며, 한 번 그런 선례가 생기면 같은 일이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저는 물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유럽의 지도자들이 다 함께 군비감축에 협의하여 국민들의 부담을 크게 덜어준다면, 당신이 어느 날 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혁명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르크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 하지만 지도자들은 그렇게 못합니다. 온갖 두려움과 질투 때문에 불가능하지요. 인민의 부담은 점점 심해질 것이며, 과학의 발전이 전쟁기술을 촉진하고 발달시킴에 따라 매년 더 많은 이들이 전쟁이라는 값비싼 엔진에 동원될 것입니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악순환입니다." 저는 답변했습니다. "하지만 진정 막대하게 비참한 상황이 아닌 한 본격적인 민란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자 마르크스는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지난 5년 동안 독일이 얼마나 큰 위기를 겪고 있는지 전혀 모르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혁명이 일어나서 원하는대로 공화정 정부를 설립했다고 칩시다. 그래도 당신과 당신의 친구들이 말하는 특유의 사상이 실현되기에는 요원하지 않습니까?" 마르크스는 답했습니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모든 위대한 움직임은 느립니다. 영국의 1688년 혁명처럼 더 나은 시대를 위한 발판에 불과합니다. 먼 길의 중간단계일 뿐이죠."

이상의 내용으로 전하께 마르크스가 생각하는 유럽의 가까운 미래에 대해 알려드릴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지당히 위험한 광적인 군비지출 상황에 대한 부분을 제외하면, 마르크스의 생각은 위험이 되기에는 너무나 몽상적입니다.

그럼에도 만약 다음 10년 안에 유럽의 지도자들이 이 악순환을 해결해 문제의 혁명을 막지 못한다면, 저는 적어도 이 대륙의 인류의 미래에 대해서는 절망할 것입니다.

카를 마르크스는 대화 도중에 몇 번이고 황태자비 전하와 황태자 전하에 대해 경의와 예의를 갖추고 말했습니다. 특정 저명인사들에 대해 경의를 갖추지 않고 말할 때에도 날카롭고 톡 쏘는 비판은 풍부할지언정 마라(역주: 프랑스 혁명의 장-폴 마라) 식의 격하고 야만적인 느낌은 없었습니다.

인터네셔널 운동과 관련된 끔찍한 사건들에 관해서는 여느 점잖은 사람과 같은 견해를 보였습니다. 

또한 혁명과 연관된 망명자들이 어떤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지 시사해주는 일화도 언급했습니다. 그 몹쓸 노빌링(역주: 빌헬름 1세를 암살할 의도로 습격한 카를 노빌링)이 영국에 있었을 때 마르크스를 만나고자 했었다는 것입니다. 그에 대해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저를 만나러 왔다면 기꺼이 맞아주었을 겁니다. 노빌링은 드레스덴 통계국 직원이라는 명함을 내밀었을 것이고 제 관심분야도 통계니 매우 흥미로운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을 테지요. 만났더라면 참으로 즐거운 입장이었을텐데!"

마르크스에 대한 전체적인 인상을 말씀드리자면 비록 저와 견해는 정반대지만 전혀 불쾌감을 주지 않았으며, 다음에도 기꺼이 다시 만나고 싶은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상을 거꾸로 뒤집을 위인은 되지 못할 것입니다.


Posted by 시바우치
만화2013. 10. 13. 23:34


사실 수년 전부터 답답했는데 다시 탐라에 '할렘물'이 남발하기 시작해+마침 드물게 한가한 주말이라 그려봤습니다. 




Posted by 시바우치
만화2013. 10. 9. 20:36

요전에 DC코믹스 합작에 투고한 일러스트가 올라서 블로그에도 올려봅니다. 

<샌드맨> 시리즈의 꿈님과 죽음누님입니다. 

간만에 그릴려고 참고용으로 책 몇 권 꺼내 보다가 결국 전권 독파해버려서 시간이 걸린(...) 




Posted by 시바우치

지난 주말에 도쿄에서 스트레인저 무황인담 상영회가 있었습니다...안도 마사히로 감독님 초청한 토크도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회사일과 지난 달 교토 효도여행;으로 예산 문제도 있어서 아쉽게도 가지 못했지만, 상영회 가시는 모님께 말씀을 전해듣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그런데 그 모님이 일요일날 아직 귀향도 하시지 않으셨는데 급히 보여줄 게 있다며 메일을 보내주시더군요. 


열어봤더니....아아 이럴 수가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ㅜㅜㅜㅠㅠㅜㅜㅜㅜㅜㅜㅜㅜㅜ


제가 작년 상영회 때 드렸던 티셔츠.......입고 나오셨답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게다가 토크 시작부터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이전 상영회에서 한국인 분이 이런 티셔츠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모처럼의 기회니, 오늘은 이것을 입고 얘기하려고 합니다.

以前の上映会で、韓国の方がこんなTシャツを作ってくださいました。せっかくの機会ですので、今日はこれを着てお話ししたいと思います"



으아ㅏㅏㅏㅏㅏㅏ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제가 만든 굿즈를 입어주시다니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감격하셨다고, 그림도 센스 좋다고 절찬하셧다고....으아ㅏㅏ아아아아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아....원래는 이런 색상인데 셔츠 색이 이상하게 나와서 드릴 때 죄송했는데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좋게 좋게 봐주시다니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저야말로 감격했어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 자리에 있지 못했던 것이 아쉽지만.....그래도 이렇게 전해듣게 되어서 감독님께 고맙고 사진도 찍어주신 모님께도 고맙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너무 기쁩니다 엉엉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가 아니라 더 열심히 살고 열심히 덕질해야겠어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내년엔 꼭 갈께요 감독님!!! 앞으로도 좋은 작품 많이 내주세요!!!!


Posted by 시바우치
영화2013. 7. 23. 12:51

각지에서 수많은 상을 받고 평단의 극찬을 받은 <액트 오브 킬링>은 학살자가 학살을 재연하는 다큐멘터리의 감독 조슈아 오펜하이머 인터뷰를 번역해 보았습니다. 1965~1966년 인도네시아 학살의 가해자 중 한명인 안와르 콩고는 다큐멘터리 제작자 조슈아 오펜하이머의 요청에 따라 친지들을 모아 자신이 저지른 학살을 연극적으로 재연합니다. 학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곳에서 읽어볼 수 있습니다. 현재 부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2회 상영했고 마지막으로 7월 26일 상영한다고 합니다.



[번역] 조슈아 오펜하이머: “학살을 미화하는 이유는 거울 속의 자신을 마주보고 싶지 않기 때문”

원문 링크.


조슈아 오펜하이머: “학살을 미화하는 이유는 거울 속의 자신을 마주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슈아 오펜하이머는 1960년대 학살의 생존자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인도네시아로 향했다. 그런데 결국은 학살자들을 촬영하며 그들과 친해지기까지 했다. 그 결과물은 올해 최고의 영화로 각광받는 <액트 오브 킬링>이다.

안와르 콩고는 자신이 사람을 어떻게 죽였는지 보여준다. 다음에는 차차차 춤을 춘다. 처음에는 구타해서 죽였지만, 피가 너무 많이 나왔다고 한다. (“비린내가 말이 아니었죠.”) 그래서 친구에게 앉아보라고 하고, 전선 한쪽 끝을 기둥에 묶고, 반대편을 친구의 목에 감고 당기는 시늉을 한다. “이렇게 하는 거죠!”

안와르는 아직도 자신이 한 짓에 대한 악몽을 꾼다. 술, 마리화나, 엑스타시를 하며 잊으려고 한다. 그리고 춤을 추고 노래를 한다. 안와르의 친구는 미소 지으며 말한다. “참 유쾌한 분이에요.”

1965년 인도네시아 쿠데타로부터 1년 뒤, 백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공산주의자 (실제로는 군에게 적대적인 인물 전반 및 화교, 지식인, 노동조합원 등)”로써 살해당했다. 안와르는 개구리 부대라는 학살자 집단의 두목이었는데, 몸소 1000여명을 살해했다. 안와르는 그와 그의 친구들에게 과거의 범죄를 극적으로 각색할 무대를, 즉 학살의 주인공 역할을 자랑할 기회를 마련해준 다큐멘터리 <액트 오브 킬링>의 주인공이다.

감독 조슈아 오펜하이머는 10년 전에 생존자들을 인터뷰하며 이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존자 한 명의 권유로 카메라를 가해자들에게 돌리게 되자, 가해자들은 매우 적극적으로 자신들 입장에서 역사를 말하려는 것을 알았다. 학살자들은 수십년간 서로에게 반복해온 이야기, 즉 자신들이 지배계급이므로 그 행위는 영웅적이라는 버전의 이야기를 채용했다.

안와르같은 폭력배에게 있어서 오펜하이머는 “아름다운 가족영화”를 만들 기회를 제공한 셈이었다. 자신들이 사랑하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영감을 받은, 성공담을 기념하는 영화를 말이다.

“그들은 과거에 저지른 행위의 현실로부터 절박하게 도망치려고 합니다.” 현재 코펜하겐에 거주중인 38세의 하버드 졸업생 오펜하이머는 말한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거울 속의 살인자와 마주보고 싶지 않으니까 학살을 미화합니다. 피해자들이 반론하지 못하도록 계속 억압합니다. 그 정당화 - 기념행위 - 를 자세히 살펴보면, 정작 반성의 부재보다 살인자의 양심이 해체되는 순간을 보게 됩니다. ‘반성의 부재’로 보이는 증상은 역설적으로 그들의 인간성의 상징입니다.”

<액트 오브 킬링>은 오펜하이머의 영화인만큼 안와르의 영화이기도 하다. 그의 영화 취향은 서부극에서 갱스터 스릴러와 엘비스 프레슬리 뮤지컬에까지 이른다. 쿠데타 전의 사회주의 대통령 수카르노 연정 하에서 보이콧 당하던 미국적인 영화들이다. 재연된 학살극에는 끔찍하게 화려하고 기괴한 캠프함이 있다. 한 장면에서는 안와르의 피해자의 딸이 자기 아버지의 간을 안와르에게 강제로 먹인다. 안와르는 자기 자신을, 그의 절친한 친구 헤르만은 피해자의 딸을 연기한다. 헤르만은 통통한 아마추어 배우로, 빨간색과 금색의 반짝이 배꼽티, 짙은 아이라이너, 거대한 머리장식으로 치장했다. (오펜하이머에 의하면 “분장 아티스트 겸 의상 디자이너가 가수 디바인을 참 좋아해서”라고 한다) 헤르만은 키득거리고 비명을 지르며 안와르의 입에 고기를 밀어 넣는다. 오펜하이머는 곁에서 조용히 지켜보며 폭력배들이 필요한 것들을 전부 제공한다. 이 보기 거북한 재연극의 몽타쥬와 고백적이고 정치적인 폭로극은 다큐멘터리의 대부이자 본 작품의 총책임 프로듀서를 담당한 베르너 헤어조크와 에롤 모리스의 관심은 물론, 전세계 평론가들을 압도하며 사로잡았다. 

안와르가 과거의 악몽을 꾸듯이, 오펜하이머도 악몽을 꾸었다. (“온 가족이 모이는 자리가 점차 사랑하는 사람이 고문당하거나 살해당하는 장면으로 변해갔다.”) 오펜하이머는 너무나 오랜 시간을 안와르와 보낸 나머지 안와르의 세계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수 천명의 사람에게 끔찍한 짓을 저지른 괴물은 달달한 차를 내주고, 클리프 리처드 레코드를 틀고, 손주들에게 다친 동물을 보살피는 법을 가르치는 말쑥한 신사이기도 하다. 

이 불협화음은 영화는 불편하게 만든다. 관객으로 하여금 학살자를 이해하도록 몰아붙이기 때문이다.

오펜하이머는 말한다. “이런 일들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아내서 사전에 방지하려면, 어딘가에 괴물이 있으니 경계하고 그것을 가두거나 죽이거나 수용소에 넣으면 해결된다는 식의 판타지를 버려야 합니다.” 

“누군가를 악당이라고 부르면 나는 착한 사람이라고 위안하게 됩니다. 자신을 미화하는 거죠. 나는 이것을 ‘스타워즈 윤리관’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런 윤리관은 많은 이야기의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여전히 안와르와 연락을 한다. 두 사람은 한 달에 한번 정도 스카이프로 대화를 나눈다. 

오펜하이머는 말한다. “나는 안와르에게 마음을 씁니다. 우리의 관계를 우정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요. 나는 심판받지 않은 정권을 생존자들을 위해 폭로하려고 했습니다. 한편 안와르는 자신의 고통으로부터 도망치면서, 자기 트라우마를 보호할 영상적이고 정신적인 상처조직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나는 그를 좋아할 수는 없지만, 같은 인간을 향한 애정은 느낍니다.”


Posted by 시바우치
영화2013. 6. 28. 22:22

가장 최신 슈퍼맨 영화인 <맨 오브 스틸>은 흥행성적에도 불구하고 평은 적잖이 갈리는 영화입니다. 특히 해외사이트에는 기존 슈퍼맨 작품들의 팬들을 중심으로 영화 마지막의 어떤 문제적 진행에 대한 논란이 끊이질 않습니다. 이들이 어떤 지점에서 불편함을 느꼈는지, 슈퍼맨의 핵심적 가치는 무엇인지에 대해 정확히 짚어낸 코믹스 얼라이언스 기사가 있어서 번역해 보았습니다. 원문은 이곳입니다.


당연하지만 스포일러가 잔뜩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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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설] 선택과 <맨 오브 스틸>의 도덕적 세계관
앤드류 윌러


슈퍼맨은 다른 (슈퍼)히어로들과 다르다. 그는 최초의 슈퍼히어로 중 한 명이고, 장르 자체를 정의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중에서 최고이기도 하다. 여기서 "최고"라는 것은 도덕적 의미의 최고를 말한다. 현재 우리가 이해하는, 우리의 문화적 사전 안에 존재하는 죠 슈스터제리 시겔의 창작물은 영웅적 미덕의 이상을 상징한다. 하지만 그런 관점은 잭 스나이더의 신작 영화 <맨 오브 스틸> 이후 바뀔지도 모른다. 



이하 내용에는 <맨 오브 스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다.


마지막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슈퍼맨과 조드 장군의 마지막 대결은 상당한 논란을 야기했다. 조드가 무고한 사람을 죽이려고 하고, 자신을 막지 않으면 모두를 죽이겠다고 맹세하자 슈퍼맨은 조드의 최후통첩을 받아들여 그의 목을 꺾어버림으로써 싸움을 끝낸다.

어떤 사람들은 이 장면을 보며 "슈퍼맨에게 달리 방법이 있었겠나?"라고 물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은 그 밖의 대안을 내놓을 수도 있다. 유용한 대화는 아니다. 흔해빠진 "누가누가 이길까?"식 논쟁이니까. 답은 언제나 같다: 결과는 작가에 의해 정해지고, 이야기는 그 결과을 위해 바뀐다는 것이다. 슈퍼맨은 다른 선택이 없어서 조드를 죽인 것이 아니라, 스토리를 짜는 사람들이 그것을 바랬기 때문에 죽인 것이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2대 1로-*역주: 크리스토퍼 놀란은 처음에 슈퍼맨이 살인하는 것에 극렬 반대했는데, 스나이더와 고이어가 강력하게 추진했다는 내용.)

이 선택은 많은 것을 드러낸다. 즉, 감독 잭 스나이더와 각본가 데이빗 고이어는 슈퍼맨에게도 살생이 필요한 때가 있다고 설정하고 싶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이런 삭막한 메세지야말로 현대 픽션에서 가장 도덕적인 캐릭터 중 하나를 이용해 전달하기에 적합한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슈퍼맨은 살생할 수 있는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을 생각해볼 수는 있다. 실제로 전에도 있었던 전개니까. 하지만 내 생각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명 보존의 명제에 관해서는 슈퍼맨을 한 극단에 위치시킬 것 같다. 슈퍼맨이 한 생명을 위해 다른 생명을 끝내야 하는 순간은, 이야기 전체가 그 순간을 성립시키기 위해 비틀어져야 할 정도로 막대한 무게감을 지녀야 한다. 나는 고이어와 스나이더는 <맨 오브 스틸>에서 그 순간을 획득해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러분은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이것은 우려스러운 선택이다. 왜냐면 영화는 그 밖의 도덕적 메시지조차 전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진리나, 정의, 영웅적 행위, 희생, 희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희망이 언급되기는 한다. 슈퍼맨의 가슴의 글자가 "희망"을 뜻한다고 하지만, 나는 영화 어디에도 희망이라는 이상을 보여주는 장면을 전혀 떠올릴 수 없었다. 영화 마지막에 폐허 속에 서 있는 캐릭터들은 희망보다는 암담한 인내력을 보여주는 것 같다. 마지막 부분에 목에 망토를 두르고 바깥에서 노는 어린 클라크 켄트의 모습이 잠깐 비춰지긴 한다. 언뜻 희망적으로 보이는 장면이다. 하지만 그것은 모든 것이 망해버리기 전의 과거에 있던 일로, 희망은 나이브한 것임을 제시하기도 한다.

어린 클라크 켄트가 그 망토를 둘렀을 때 무슨 흉내를 내고 있었냐고 질문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놀이는 슈퍼히어로 흉내를 낼 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최초의 슈퍼히어로는 슈퍼맨이다. 그럼 어린 클라크는 아라곤 흉내를 내는 건가? 아니면 헤라클레스? 오페라의 유령? 아니면 이 세계에는 마블코믹스가 존재해서, 토르 놀이를 하는 건가?

이 질문을 제시한 이유는 말장난이 아니라, 저 장면이 영감을 주는 존재로써의 슈퍼맨에 대한 제작자들의 불완전한 이해력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이 슈퍼맨은 우리가 우러러볼 대상이 아니다. 내가 관람할 때 슈퍼맨이 조드를 죽이는 장면에서, 그곳에 있기에는 너무 어린 여자아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저 아저씨 눈 왜 안 움직여요? 왜 저 아저씨 안 움직여요?”

그것은 즉각적으로 불편한 고통의 순간이었다. 이 소녀는 망토를 걸치고 이 버전의 슈퍼맨 흉내를 내지는 않을 것이다. 나 역시 어떤 아이라도 이 슈퍼맨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스나이더와 고이어는 사람이 망토를 두르고 정원에서 뛰어다닐만한 영감을 어디서 받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 세계에서는 누군가 망토를 줬기 때문에 망토를 두를 뿐이다. 


이 영화 속의 슈퍼맨은 영웅이 아니라 골칫거리다. 이 영화는 슈퍼맨이 우리 별에 오지 않았더라면 모든 인물들의 처지가 더 나았을 것이고, 수 천명의 사람들이 죽지 않았을 내용이다. 이런 것을 희망의 메시지라고 보기는 어렵다. 만약 제작자들이 조드가 전부터 지구를 노리고 있었고, 죠-엘은 그것을 막으려고 아들을 보냈다는 내용으로 썼다면, 이야기의 중심에 절박함과 복수 대신 영웅적 행위가 존재했을 것이다. 슈퍼맨은 문제가 아닌 해법이 되었을 것이다.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들은 비슷하게 진행되지만, 모든 사건에 도덕적인 무게가 주어질 것이다. 그러나 제작자들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슈퍼맨의 도덕관을 지탱하는 큰 기둥 중 하나는 양아버지인 죠나단 켄트다. 이 영화는 죠나단에게서 그 역할을 제거해 버린다. 대부분의 버전에서 클라크 켄트는 정직하고 선한 양부모에게서 자신의 가치관을 배운다. 이 영화의 죠나단은 거짓말을 가르친다. 타인의 생명보다 자기보존을 우선하도록 가르친다. 여기에는 진리도 정의도 없다. 희생은 있지만, 전혀 영웅적이지 않다. 파 켄트(*역주: "파"는 사투리로 "아빠," 클라크가 죠나단을 부를 때의 호칭임)는 자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고집을 부리다 죽는다. 우리는 슈퍼맨의 전제가 그에 의존하기에 파 켄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안다. 파 켄트는 도덕적인 길잡이가 될 수도 있었지만, 제작자들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켄트 부부는 클라크에게 영웅이 되라고 하지 않았기에, 영웅 되기는 클라크의 가치가 되지 못한다. 그 가치는 유령판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페이퍼클립같은 친아버지에 의해 주입된다. 제작자들은 슈퍼맨의 도덕적 뿌리를 지구가 아닌 크립톤에 둠으로써, 슈퍼맨이 인류가 구원받을 가치가 있다고 믿는 근원적 이유를 앗아간다. 이런 오리진 스토리는 인류가 근본적으로는 선하다는 관념을 어디에서도 보여주지 않는다. 제작자들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럼에도 슈퍼맨의 내재적 도덕심을 보여줄 기회는 여러 개 있었다. 도중에 클라크는 바다에서 막 걸어 나와 옷을 찾아 입어야 할 상황에 처한다. 옷을 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었고, 나중에 돌려주겠다는 등의 약속이 적힌 쪽지를 두고 가져갔을 수도 있었다. 그런 장면은 클라크카 도덕적으로 올바른, 무리를 해서라도 바른 행동을 하려는 사람임을 보여줬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클라크는 몰래 옷을 훔쳐서 달아난다. 제작자들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제작자들은 클라크 켄트의 근본적 선량함을 묘사할 수 있는 모든 기회에서 다른 방향으로 갔다. 누가 자신에게 맥주를 끼얹자 음험하고 보복적으로 행동하게 만들었다. 걱정하는 교사의 손에 화상을 입히게 해서 심술궂고 해롭게 만들었다. 말다툼 중에 자신의 가족을 부정하게 만들었고, 한 키스씬에서는 자신의 인간성을 부정하게 했다. “첫키스 이후로는 내리막길이라고 하던데요.” “인간들 경우에나 그렇겠죠.” (물론 농담이긴 하지만, 그을린 폐허 구덩이 위에서 솔직히 남이나 다름없는 사람의 얼굴을 빨면서 하는 농담이라는 점은, 그가 우리 중 하나가 아니라는 개념에 무게를 더한다.)

이런 묘사들을 별로 중요하지 않는, 사소한 것으로 치부할 수는 있다. 하지만 반면 핵심적인 “미덕의 묘사” 부분은 어떤가? 위의 행동은 우리 모두가 저지르는 잘못이고, 누구에게나 처음이 있었다고 반론할 수는 있다. 물론 사실이다. 슈퍼맨은 픽션의 어떤 캐릭터만큼이나 투명한 미덕의 귀감이지만, 클라크에게는 실수와 단점이 어느 정도 허용된다. 특히 망토를 두르기 전에는.

하지만 도중에 우리는 그의 도덕적 가치가 무엇인지 봐야 한다. 우리는 클라크가 믿는 것, 선택하는 것을 드라마적인 묘사로 볼 수 있어야만 한다. 이 영화는 주어진 모든 기회에서 그런 묘사를 피한다. 클라크가 술집에서 싸움을 피하는 것도 폭력이나 보복행위를 피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튀는 것을 피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비를 건 상대의 사유물을 파괴함으로써 폭력과 보복을 달성한다.

이 슈퍼맨은 결코 도덕적이지 않다. 연민이나 양심도 보이지 않는다. 파괴행위가 인구 집중지역을 피해가도록 유도하지도 않으며 인류와 어떤 유대감을 맺지도 않는다. 구해줄 사람들을 찾아 세상을 여행하는 대신, 눈 앞에서 불 타 죽기 직전쯤 되야 사람을 구하는 내성적인 은둔자다. 그만큼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기대되는 수준에서, 문자 그대로 최소한만을 행한다. 그는 영웅이 될 수 없다. 또 다른 하늘 위의 아버지인, 영원히 캔사스와 오즈 사이 어딘가에서 날려다닐 죠나단 켄트가 가르쳐준 보신주의에 얽매여있기 때문이다. 


제작자들은 전체적으로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도덕적인 가치를 주입할 수 있었다. 클라크의 내성적인 면을 유지시키되 도시전설로써의 측면을 강조할 수도 있었다. 망토나 코스츔 없이, 세상을 떠돌며 놀라운 힘과 용기로 생명을 구하는 슈퍼맨으로써 말이다. 이것이 애초에 로이스 레인을 슈퍼맨에게 끌어들인 이유였다. 하지만 로이스의 조사에는 단지 두 가지의 영웅적 행동만이 참고자료였다. 그녀는 어떤 “슈퍼맨”에 대한 도시전설이 아니라, 빅풋을 따라 UFO로 들어가서 슈퍼맨에 대해 알게 된다. 


만약 클라크가 아버지의 조언을 무시하고 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켜왔다면, 같은 진행이라도 다른 도덕적 중심을 지닌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조드가 지구 사람들에게 “슈퍼맨을 내놔라.”고 했을 때 사람들은 “그럴 수 없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왜냐면 세상에는 그런 “슈퍼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희망과 영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작자들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영화의 예수 이미지 집착에 대해 말이 많지만, 사실 팔을 벌리는 것만으로는 구세주가 될 수는 없다. 영화는 기독교와 전혀 관련성이 없고, 나자렛 색깔을 좀 빌려왔을 뿐이다. 예수는 목을 꺾어버리거나 도시를 파괴하지 않았다. 예수는 어디를 봐도 상당히 괜찮은 친구였다. 예수의 이야기는 연민과 희생에 대한, 완전한 도덕적인 슈퍼히어로 이야기다. 그는 남의 트럭을 테러하려고 외딴 마을의 전깃줄을 뜯어내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히어로도 있다. 나는 문제의 목 꺾기 사건 한참 전부터 클라크 켄트의 모든 선택이 울버린같은 히어로가 할만한 선택이라고 느꼈다. 울버린은 사람을 싫어하고 쪼잔하고 음울하면서 그걸 다 간지나게 보이게 하는 캐릭터다. 하지만 울버린은 구세주는 아니다. 울버린은 귀감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 “울버린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라고 쓰여진 팔찌를 차고 다니진 않았을 것이다.

히어로들은 각자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각자 다른 이야기를 전달한다. 대부분의 관객에게 슈퍼맨은 정의로운 영웅이고, 이 점을 탐구하지 않는 이야기는 슈퍼맨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맨 오브 스틸> 제작자들은 슈퍼맨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에는 큰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슈퍼맨의 이름은 제목에도 나오지 않는다. 작중에 처음 그 이름이 언급될 때는 간신히 기어나오는 느낌이다. 이름이 큰 소리로 제대로 읊어질 때, 대사를 말하는 병사는 스나이더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그 이름에 “전혀…좋은 인상을 받지 않는다.” 캐릭터의 가슴에 있는 “S”는 사실 알파벳 “S”가 아니다. 영화는 단 한번도 “슈퍼맨”이라는 단어를 자랑스럽게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에 악당은 슈퍼맨을 파괴해버린다. 악당이 승리한 것이다. 조드 장군은 라라 로-반의 아들을 찾아내겠다는 맹세를 지키고, 비록 크립톤을 자신의 뜻대로 부활시키는 데에는 실패하지만, 슈퍼맨을 이용해 자살하겠다는 목적은 달성한다. 조드는 왜 슈퍼맨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부추겼을까? 그것은 자신의 라이벌인 고결한 죠-엘의 마지막 유산을 타락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조드는 칼-엘의 영혼에 지울 수 없는 흠집을 내고자 했다.

조드 때문에 슈퍼맨은 절대로 위대해질 수 없다. 절대 어떤 귀감이 될 수도, 슈퍼맨이 될 수도 없다. 자신이 쌓아온 시체의 산 위에서는, 그 오랜 기간 동안 인류에 대해 그토록 무심했던 전력으로는, 끔찍하게 부러지는 뼈의 소리로 우리 별에 자신의 존재를 알린 시점에서는 불가능하다.

이것이 스나이더와 고이어가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다. 그들은 나름 타당한 선택을 했고, 이 버전의 스토리와 캐릭터를 즐기는 관객도 있다. 이 버전의 슈퍼맨이 좋다고 말해서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영감을 주는 존재로써의 슈퍼맨을 원한다고 주장하면서 "이것이 나의 슈퍼맨"이라고 한다면 나는 놀랄 것이다.

슈퍼맨에 대한 가장 유명한 문구 중 하나는 죠지 리브스가 주연한 1950년대 TV 시리즈 <슈퍼맨의 모험> 오프닝에서 나온다. 한 남자가 외친다: “저기! 하늘을 봐! 새야!” 이제 와서 식상할 정도로 반복되었으니, 그 뒤의 대사는 다들 알 것이다. 지금 와서는 그 문구에 진부하지 않은 오마쥬를 바치기 어렵다. 하지만 그 안에는 핵심적인 요소가 있다. 많은 팬들에게 있어 슈퍼맨은 경외심을 가지고 우러러보게 되는 존재다. 이 말은 은유가 아니다. 그는 정말로 우리 위에 있다. 그는 모범적이다. 그는 훌륭하다.

그 누구도 경외심을 품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맨 오브 스틸을 바라보지는 않을 것이다. 화면 속에서 드러났듯이, 이 사내는 우리 중의 최선을 대표지도 않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상도 아니다. 고이어와 스나이더의 선택은 그의 도덕적 힘을 벗겨버리고, 우리에게는 적절한 순간이라도 살인하지 않을만큼 순수하고 선한 사람은 없다는 메세지를 남겨준다. 맨 오브 스틸은 미덕의 귀감이 아닌, 죽음과 학살의 상징이다.

만약 당신이 하늘을 나는 사람을 본다면, 놀라며 경외감에 손가락으로 가리키지 말아라. 대신 비명을 지르며 숨을 곳을 찾아라. 이제는 누구도 당신을 구해주지 못한다. 


Posted by 시바우치
2013. 2. 22. 15:49

중세 문서에서 발췌했다는 것 외에는 본문과 별로 관련 없는 고양이 그림.


2월 22일은 일본에서 고양이의 날입니다. 일본에서는 숫자 2를 “니”라고 읽는데, “니 니 니”하면 고양이의 울음소리인 “냐- 냐- 냐-”와 비슷하다고 그렇게 붙었습니다. 참고로 한국 고양이의 날은 9월 9일이고, 미국은 10월 29일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고양이의 날 중 하나를 맞아서 고양이에 대한 옛 아일랜드어 시를 하나 올려봅니다. 아일랜드어를 몰라서 영어로 번역한 것을 번역한 중역이라 본래의 의미가 많이 퇴색될 수 있음을 유의하고 읽어주세요.


판구르 반


판구르야, 하얀 판구르야,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

학자와 고양이 단 둘이서 함께

매일매일 주어진 일이 있으니

너는 사냥을 하고, 나는 공부를 하네

너의 빛나는 눈은 벽을 지켜보고

나의 허약한 눈은 책에 묶여 있네.

네가 기뻐할 때는 그 발톱이 쥐를 옭아맬 때

내가 기뻐할 때는 생각 끝에 문제를 풀어낼 때

각자 자기 일 즐기며 서로를 방해하지 않으니

우리 이렇게 지루함도 시기도 없이 살아가네


이 <판구르 반 (Pangur Bán)>이라는 시는 라이헤나우 수도원에서 발견된 문서 Reichenau Primer 중에 발견된, 필사하던 수도사로 추정되는 인물이 쓴 것입니다. “반”은 아일랜드어로 하얗다는 뜻이고 판구르는 당시에 고양이에게 자주 붙였던 이름이라고 하네요. (우리식으로 “나비” 정도?) 그래서 저자의 고양이는 하얀 고양이로 추정됩니다.

판구르 반은 사실 문서 귀퉁이의 낙서에 불과한 위치에 있어서, 오랜 기간 묻혀 있다가 1903년 켈트어 학자 위틀리 스톡스 Whitley Stokes 와 존 스트라챈 John Strachan이 공저한 아일랜드 고문서 모음집 <Thesaurus Palaeohibernicus>에 소개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고, 시인 로빈 플라워와 W. H. 오번 등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사실 로빈 플라워의 번역이 더 유명한 것 같지만 오번 쪽이 더 짧아서 편리해서 그 쪽을 번역...한 것만은 아니고, 짧은만큼 번역자의 해석과 개입이 적은 편일 것 같아서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아일랜드어를 모르니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구글신에게 정확한 번역이 어느 쪽인지에 대해 물어봤지만 대답이 없습니다(...)


저기 왼쪽 하단이라는데 무식해서 읽을 수가 없습니다 흑흑;


아무튼 그 옛날에도 고양이가 인간의 일을 방해했다는 이런 증거이런 증거가 남아있긴 해도, 이 시를 쓴 수도사의 경우처럼 결국은 귀여움을 받았으니까 곁에 둔 것이겠지요. 특히 가족 없이 속세에서 떨어져 엄격한 수도원 생활 속에서 필사에 매진하던 수도사에게는 큰 마음의 위안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쥐를 퇴치하기 위한 실용적 기능도 충실했고, 실제로 많은 수도원과 수녀원에서 그 목적으로 고양이를 기르기도 했죠. 


쥐잡이(...)


결론은 <판구르 반>은 인터넷에 넘치는 팔불출 고양이 주인의 오글거리는 고양이 숭배질이 인터넷 이전에도 있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양이 주인들의 팔불출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군요.


폰카가 없어서 타페스트리로 짜냄.jpg



출처: Pangur Ban 위키피디아 페이지 http://en.wikipedia.org/wiki/Pangur_B%C3%A1n

Pangur Ban MSS Still in Existence? http://suburbanbanshee.wordpress.com/2009/05/17/pangur-ban-mss-still-in-existence/

Reichenauer Schulheft - Reichenau Primer http://hildegard.tristram.de/schulh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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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바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