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2015.05.04 14:02

원문: 왜 스타워즈 프리퀄 삼부작은 많이 미움 받는가?

스타워즈의 날을 기념해 번역해 봤습니다.

필자와 동의하는지 여부는 넘어가더라도, 적어도 왜 대다수의 오리지널 삼부작 팬들이 프리퀄에 격렬히 반응했는지 자비 없이 잘 정리가 되어있는 글이라서 꽤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왜 스타워즈 프리퀄 삼부작은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가?]


왜냐면 스타워즈 프리퀄 삼부작은 오리지널 삼부작만큼 좋은 영화들이 아니었고, 그에 비해 기대치는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또한 스타워즈 프리퀄은 그 자체만으로 매우 형편없는 영화들이기도 하다. 흔히들 프리퀄이 오리지널 삼부작을 망쳤다고 말하지만, 애초에 오리지널 삼부작이 마련해준 지지층이 없었더라면 프리퀄이 흥행조차 못했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는다. 만약 [보이지 않는 위험]이 최초의 스타워즈 영화였다면 스타워즈는 지금쯤 극소수의 팬들이나 기억하는 잊혀진 영화 시리즈가 되었을 것이다.

오리지널 삼부작의 장점 중 하나는 단순한 선악 대결구도다. 다스베이더와 황제는 사악했고, 루크와 그 일행은 악하지 않았으며, 나쁜 놈들은 착한 놈들을 없애려고 전쟁을 일으켰고, 결과는 좋은 영화들이었다. 

하지만 프리퀄은 무역분쟁에 대한 내용이었다. 무역분쟁에 관한 좋은 영화가 있다면 하나 대봐라. 인물들이 서성대며 대화하거나 상원회에서 투표하는 장면이 많았고 라이트세이버로 재밌는 일을 하는 장면은 적었다. 한마디로 지루한데다가 더 나쁜 점은 각본이 나쁜데 지루하다는 점이다. 이왕 무역분쟁에 관한 대화를 본다면 흥미로운 캐릭터들이 톡 쏘는 대사를 주고 받는 장면을 보고 싶다. 처참한 대사를 들으면서 “왜 저 사악한 자본자들은 아시아 억양으로 말하는 거지? 대체 왜 그렇게 설정한 거지?”같은 딴 생각이나 하고 싶지는 않다.

오리지널 삼부작은 영화사에 남을만한 악역을 낳았고 카리스마적인 영웅 캐릭터들과 대립시켰다. 2003년 미국 영화연구소는 역대 가장 위대한 영웅 캐릭터와 악역 캐릭터 순위를 매겼다. 다스베이더는 악역 3위에 올랐고, 한 솔로는 선역 14위, 오비완 케노비는 37위에 올랐다. (원작 삼부작에서 알렉 기네스가 연기한 버전의 오비완) 프리퀄 캐릭터는 당연히 한명도 없었다. 그나마 프리퀄에서 가장 흥미로운 악역이라고 칠 수 있는 다스마울의 출연분량은 15분 남짓이고, 유일하게 흥미로운 선역은 오비완이지만 그마저도 맥그레거가 알렉 기네스 흉내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오리지널 삼부작은 훌륭한 스토리 전개와 박진감 넘치는 결말을 주었다. [제다이의 귀환] 후반부에 주인공들은 적의 덫에 걸리고 만다. 한과 레이아는 엔도르에서 붙잡혔고, 함대는 데스스타에 의해 폭발당하기 직전이었으며, 루크는 다크사이드로 넘어갈지 고민하고 있었다. 주인공들은 지고 있었고, 쉽사리 타결책이 보이지 않았다.

세 번째 프리퀄의 결말에서는 네 명의 주역들 사이에 매우 길고 지리한 라이트세이버 결투가 있었다. (요다 VS 팰퍼틴, 오비완 VS 아나킨) 그리고 누가 살아남을지는 뻔했다. 긴장감도 박진감도 없고, 프리퀄이 다 끝났다는 안도감만이 있었다.

사실 어떤 추가적 짜증 요소가 없었더라면 끔찍하게 형편없는 대사와, 의미 없는 플롯과, 캐릭터성의 부재 정도는 잊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자자 빙크스는 모든 의미에서 큰 실수였다. 전혀 웃기지도 않았고, 거의 모든 장면에 삽입되는 바람에 더 큰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자자는 다른 인물들이 대화하는 장면 배경에서 덜렁댔고, 똥을 밟고, 방귀를 맞고, 한마디로 최저급의 싸구려 개그 캐릭터처럼 행동했다. 심지어 자자에겐 만회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아서, 끝까지 용기나 지혜를 드러내는 장면도 없이 그냥 영화 내내 망한 캐릭터였다. 원작 삼부작에는 순수한 개그캐릭터는 필요 없었다. 전개 과정에 직관적인 개그씬을 넣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자는 두 명의 엄청나게 짜증나는 아나킨들과 함께 프리퀄 삼부작 내내 짜증덩어리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증오를 일으키기엔 부족하다. 프리퀄은 지루하고 짜증나고 영혼이 없지만, 그런 영화는 수없이 많다. 프리퀄이 미움받아야 하는 이유는 원작 삼부작을 깎아내리기 때문이다. 프리퀄이 나오기 전까지 아나킨 스카이워커는 포스의 다크사이드로 끌려온 선량한 파일럿이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아나킨이 징징대고 짜증나는 아이였고 연기 못하는 낭만적인 바보에다가 하필이면 C3PO와 R2D2의 절친을 디자인한 놈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다스베이더는 속죄의 순간이 주어진 악인 중의 악인이 아니라 하늘을 향해 폭소가 터질만큼 끔찍한 “안돼애애애ㅐㅐㅐㅐ”라고 외친 가망 없는 루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프리퀄은 그냥 나쁜 영화들이다. 게다가 좋은 영화들을 악화시키기까지 했다. 그러니 당연히 미움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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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2013.07.23 12:51

각지에서 수많은 상을 받고 평단의 극찬을 받은 <액트 오브 킬링>은 학살자가 학살을 재연하는 다큐멘터리의 감독 조슈아 오펜하이머 인터뷰를 번역해 보았습니다. 1965~1966년 인도네시아 학살의 가해자 중 한명인 안와르 콩고는 다큐멘터리 제작자 조슈아 오펜하이머의 요청에 따라 친지들을 모아 자신이 저지른 학살을 연극적으로 재연합니다. 학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곳에서 읽어볼 수 있습니다. 현재 부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2회 상영했고 마지막으로 7월 26일 상영한다고 합니다.



[번역] 조슈아 오펜하이머: “학살을 미화하는 이유는 거울 속의 자신을 마주보고 싶지 않기 때문”

원문 링크.


조슈아 오펜하이머: “학살을 미화하는 이유는 거울 속의 자신을 마주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슈아 오펜하이머는 1960년대 학살의 생존자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인도네시아로 향했다. 그런데 결국은 학살자들을 촬영하며 그들과 친해지기까지 했다. 그 결과물은 올해 최고의 영화로 각광받는 <액트 오브 킬링>이다.

안와르 콩고는 자신이 사람을 어떻게 죽였는지 보여준다. 다음에는 차차차 춤을 춘다. 처음에는 구타해서 죽였지만, 피가 너무 많이 나왔다고 한다. (“비린내가 말이 아니었죠.”) 그래서 친구에게 앉아보라고 하고, 전선 한쪽 끝을 기둥에 묶고, 반대편을 친구의 목에 감고 당기는 시늉을 한다. “이렇게 하는 거죠!”

안와르는 아직도 자신이 한 짓에 대한 악몽을 꾼다. 술, 마리화나, 엑스타시를 하며 잊으려고 한다. 그리고 춤을 추고 노래를 한다. 안와르의 친구는 미소 지으며 말한다. “참 유쾌한 분이에요.”

1965년 인도네시아 쿠데타로부터 1년 뒤, 백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공산주의자 (실제로는 군에게 적대적인 인물 전반 및 화교, 지식인, 노동조합원 등)”로써 살해당했다. 안와르는 개구리 부대라는 학살자 집단의 두목이었는데, 몸소 1000여명을 살해했다. 안와르는 그와 그의 친구들에게 과거의 범죄를 극적으로 각색할 무대를, 즉 학살의 주인공 역할을 자랑할 기회를 마련해준 다큐멘터리 <액트 오브 킬링>의 주인공이다.

감독 조슈아 오펜하이머는 10년 전에 생존자들을 인터뷰하며 이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존자 한 명의 권유로 카메라를 가해자들에게 돌리게 되자, 가해자들은 매우 적극적으로 자신들 입장에서 역사를 말하려는 것을 알았다. 학살자들은 수십년간 서로에게 반복해온 이야기, 즉 자신들이 지배계급이므로 그 행위는 영웅적이라는 버전의 이야기를 채용했다.

안와르같은 폭력배에게 있어서 오펜하이머는 “아름다운 가족영화”를 만들 기회를 제공한 셈이었다. 자신들이 사랑하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영감을 받은, 성공담을 기념하는 영화를 말이다.

“그들은 과거에 저지른 행위의 현실로부터 절박하게 도망치려고 합니다.” 현재 코펜하겐에 거주중인 38세의 하버드 졸업생 오펜하이머는 말한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거울 속의 살인자와 마주보고 싶지 않으니까 학살을 미화합니다. 피해자들이 반론하지 못하도록 계속 억압합니다. 그 정당화 - 기념행위 - 를 자세히 살펴보면, 정작 반성의 부재보다 살인자의 양심이 해체되는 순간을 보게 됩니다. ‘반성의 부재’로 보이는 증상은 역설적으로 그들의 인간성의 상징입니다.”

<액트 오브 킬링>은 오펜하이머의 영화인만큼 안와르의 영화이기도 하다. 그의 영화 취향은 서부극에서 갱스터 스릴러와 엘비스 프레슬리 뮤지컬에까지 이른다. 쿠데타 전의 사회주의 대통령 수카르노 연정 하에서 보이콧 당하던 미국적인 영화들이다. 재연된 학살극에는 끔찍하게 화려하고 기괴한 캠프함이 있다. 한 장면에서는 안와르의 피해자의 딸이 자기 아버지의 간을 안와르에게 강제로 먹인다. 안와르는 자기 자신을, 그의 절친한 친구 헤르만은 피해자의 딸을 연기한다. 헤르만은 통통한 아마추어 배우로, 빨간색과 금색의 반짝이 배꼽티, 짙은 아이라이너, 거대한 머리장식으로 치장했다. (오펜하이머에 의하면 “분장 아티스트 겸 의상 디자이너가 가수 디바인을 참 좋아해서”라고 한다) 헤르만은 키득거리고 비명을 지르며 안와르의 입에 고기를 밀어 넣는다. 오펜하이머는 곁에서 조용히 지켜보며 폭력배들이 필요한 것들을 전부 제공한다. 이 보기 거북한 재연극의 몽타쥬와 고백적이고 정치적인 폭로극은 다큐멘터리의 대부이자 본 작품의 총책임 프로듀서를 담당한 베르너 헤어조크와 에롤 모리스의 관심은 물론, 전세계 평론가들을 압도하며 사로잡았다. 

안와르가 과거의 악몽을 꾸듯이, 오펜하이머도 악몽을 꾸었다. (“온 가족이 모이는 자리가 점차 사랑하는 사람이 고문당하거나 살해당하는 장면으로 변해갔다.”) 오펜하이머는 너무나 오랜 시간을 안와르와 보낸 나머지 안와르의 세계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수 천명의 사람에게 끔찍한 짓을 저지른 괴물은 달달한 차를 내주고, 클리프 리처드 레코드를 틀고, 손주들에게 다친 동물을 보살피는 법을 가르치는 말쑥한 신사이기도 하다. 

이 불협화음은 영화는 불편하게 만든다. 관객으로 하여금 학살자를 이해하도록 몰아붙이기 때문이다.

오펜하이머는 말한다. “이런 일들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아내서 사전에 방지하려면, 어딘가에 괴물이 있으니 경계하고 그것을 가두거나 죽이거나 수용소에 넣으면 해결된다는 식의 판타지를 버려야 합니다.” 

“누군가를 악당이라고 부르면 나는 착한 사람이라고 위안하게 됩니다. 자신을 미화하는 거죠. 나는 이것을 ‘스타워즈 윤리관’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런 윤리관은 많은 이야기의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여전히 안와르와 연락을 한다. 두 사람은 한 달에 한번 정도 스카이프로 대화를 나눈다. 

오펜하이머는 말한다. “나는 안와르에게 마음을 씁니다. 우리의 관계를 우정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요. 나는 심판받지 않은 정권을 생존자들을 위해 폭로하려고 했습니다. 한편 안와르는 자신의 고통으로부터 도망치면서, 자기 트라우마를 보호할 영상적이고 정신적인 상처조직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나는 그를 좋아할 수는 없지만, 같은 인간을 향한 애정은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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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2013.06.28 22:22

가장 최신 슈퍼맨 영화인 <맨 오브 스틸>은 흥행성적에도 불구하고 평은 적잖이 갈리는 영화입니다. 특히 해외사이트에는 기존 슈퍼맨 작품들의 팬들을 중심으로 영화 마지막의 어떤 문제적 진행에 대한 논란이 끊이질 않습니다. 이들이 어떤 지점에서 불편함을 느꼈는지, 슈퍼맨의 핵심적 가치는 무엇인지에 대해 정확히 짚어낸 코믹스 얼라이언스 기사가 있어서 번역해 보았습니다. 원문은 이곳입니다.


당연하지만 스포일러가 잔뜩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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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설] 선택과 <맨 오브 스틸>의 도덕적 세계관
앤드류 윌러


슈퍼맨은 다른 (슈퍼)히어로들과 다르다. 그는 최초의 슈퍼히어로 중 한 명이고, 장르 자체를 정의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중에서 최고이기도 하다. 여기서 "최고"라는 것은 도덕적 의미의 최고를 말한다. 현재 우리가 이해하는, 우리의 문화적 사전 안에 존재하는 죠 슈스터제리 시겔의 창작물은 영웅적 미덕의 이상을 상징한다. 하지만 그런 관점은 잭 스나이더의 신작 영화 <맨 오브 스틸> 이후 바뀔지도 모른다. 



이하 내용에는 <맨 오브 스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다.


마지막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슈퍼맨과 조드 장군의 마지막 대결은 상당한 논란을 야기했다. 조드가 무고한 사람을 죽이려고 하고, 자신을 막지 않으면 모두를 죽이겠다고 맹세하자 슈퍼맨은 조드의 최후통첩을 받아들여 그의 목을 꺾어버림으로써 싸움을 끝낸다.

어떤 사람들은 이 장면을 보며 "슈퍼맨에게 달리 방법이 있었겠나?"라고 물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은 그 밖의 대안을 내놓을 수도 있다. 유용한 대화는 아니다. 흔해빠진 "누가누가 이길까?"식 논쟁이니까. 답은 언제나 같다: 결과는 작가에 의해 정해지고, 이야기는 그 결과을 위해 바뀐다는 것이다. 슈퍼맨은 다른 선택이 없어서 조드를 죽인 것이 아니라, 스토리를 짜는 사람들이 그것을 바랬기 때문에 죽인 것이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2대 1로-*역주: 크리스토퍼 놀란은 처음에 슈퍼맨이 살인하는 것에 극렬 반대했는데, 스나이더와 고이어가 강력하게 추진했다는 내용.)

이 선택은 많은 것을 드러낸다. 즉, 감독 잭 스나이더와 각본가 데이빗 고이어는 슈퍼맨에게도 살생이 필요한 때가 있다고 설정하고 싶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이런 삭막한 메세지야말로 현대 픽션에서 가장 도덕적인 캐릭터 중 하나를 이용해 전달하기에 적합한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슈퍼맨은 살생할 수 있는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을 생각해볼 수는 있다. 실제로 전에도 있었던 전개니까. 하지만 내 생각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명 보존의 명제에 관해서는 슈퍼맨을 한 극단에 위치시킬 것 같다. 슈퍼맨이 한 생명을 위해 다른 생명을 끝내야 하는 순간은, 이야기 전체가 그 순간을 성립시키기 위해 비틀어져야 할 정도로 막대한 무게감을 지녀야 한다. 나는 고이어와 스나이더는 <맨 오브 스틸>에서 그 순간을 획득해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러분은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이것은 우려스러운 선택이다. 왜냐면 영화는 그 밖의 도덕적 메시지조차 전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진리나, 정의, 영웅적 행위, 희생, 희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희망이 언급되기는 한다. 슈퍼맨의 가슴의 글자가 "희망"을 뜻한다고 하지만, 나는 영화 어디에도 희망이라는 이상을 보여주는 장면을 전혀 떠올릴 수 없었다. 영화 마지막에 폐허 속에 서 있는 캐릭터들은 희망보다는 암담한 인내력을 보여주는 것 같다. 마지막 부분에 목에 망토를 두르고 바깥에서 노는 어린 클라크 켄트의 모습이 잠깐 비춰지긴 한다. 언뜻 희망적으로 보이는 장면이다. 하지만 그것은 모든 것이 망해버리기 전의 과거에 있던 일로, 희망은 나이브한 것임을 제시하기도 한다.

어린 클라크 켄트가 그 망토를 둘렀을 때 무슨 흉내를 내고 있었냐고 질문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놀이는 슈퍼히어로 흉내를 낼 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최초의 슈퍼히어로는 슈퍼맨이다. 그럼 어린 클라크는 아라곤 흉내를 내는 건가? 아니면 헤라클레스? 오페라의 유령? 아니면 이 세계에는 마블코믹스가 존재해서, 토르 놀이를 하는 건가?

이 질문을 제시한 이유는 말장난이 아니라, 저 장면이 영감을 주는 존재로써의 슈퍼맨에 대한 제작자들의 불완전한 이해력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이 슈퍼맨은 우리가 우러러볼 대상이 아니다. 내가 관람할 때 슈퍼맨이 조드를 죽이는 장면에서, 그곳에 있기에는 너무 어린 여자아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저 아저씨 눈 왜 안 움직여요? 왜 저 아저씨 안 움직여요?”

그것은 즉각적으로 불편한 고통의 순간이었다. 이 소녀는 망토를 걸치고 이 버전의 슈퍼맨 흉내를 내지는 않을 것이다. 나 역시 어떤 아이라도 이 슈퍼맨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스나이더와 고이어는 사람이 망토를 두르고 정원에서 뛰어다닐만한 영감을 어디서 받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 세계에서는 누군가 망토를 줬기 때문에 망토를 두를 뿐이다. 


이 영화 속의 슈퍼맨은 영웅이 아니라 골칫거리다. 이 영화는 슈퍼맨이 우리 별에 오지 않았더라면 모든 인물들의 처지가 더 나았을 것이고, 수 천명의 사람들이 죽지 않았을 내용이다. 이런 것을 희망의 메시지라고 보기는 어렵다. 만약 제작자들이 조드가 전부터 지구를 노리고 있었고, 죠-엘은 그것을 막으려고 아들을 보냈다는 내용으로 썼다면, 이야기의 중심에 절박함과 복수 대신 영웅적 행위가 존재했을 것이다. 슈퍼맨은 문제가 아닌 해법이 되었을 것이다.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들은 비슷하게 진행되지만, 모든 사건에 도덕적인 무게가 주어질 것이다. 그러나 제작자들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슈퍼맨의 도덕관을 지탱하는 큰 기둥 중 하나는 양아버지인 죠나단 켄트다. 이 영화는 죠나단에게서 그 역할을 제거해 버린다. 대부분의 버전에서 클라크 켄트는 정직하고 선한 양부모에게서 자신의 가치관을 배운다. 이 영화의 죠나단은 거짓말을 가르친다. 타인의 생명보다 자기보존을 우선하도록 가르친다. 여기에는 진리도 정의도 없다. 희생은 있지만, 전혀 영웅적이지 않다. 파 켄트(*역주: "파"는 사투리로 "아빠," 클라크가 죠나단을 부를 때의 호칭임)는 자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고집을 부리다 죽는다. 우리는 슈퍼맨의 전제가 그에 의존하기에 파 켄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안다. 파 켄트는 도덕적인 길잡이가 될 수도 있었지만, 제작자들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켄트 부부는 클라크에게 영웅이 되라고 하지 않았기에, 영웅 되기는 클라크의 가치가 되지 못한다. 그 가치는 유령판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페이퍼클립같은 친아버지에 의해 주입된다. 제작자들은 슈퍼맨의 도덕적 뿌리를 지구가 아닌 크립톤에 둠으로써, 슈퍼맨이 인류가 구원받을 가치가 있다고 믿는 근원적 이유를 앗아간다. 이런 오리진 스토리는 인류가 근본적으로는 선하다는 관념을 어디에서도 보여주지 않는다. 제작자들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럼에도 슈퍼맨의 내재적 도덕심을 보여줄 기회는 여러 개 있었다. 도중에 클라크는 바다에서 막 걸어 나와 옷을 찾아 입어야 할 상황에 처한다. 옷을 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었고, 나중에 돌려주겠다는 등의 약속이 적힌 쪽지를 두고 가져갔을 수도 있었다. 그런 장면은 클라크카 도덕적으로 올바른, 무리를 해서라도 바른 행동을 하려는 사람임을 보여줬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클라크는 몰래 옷을 훔쳐서 달아난다. 제작자들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제작자들은 클라크 켄트의 근본적 선량함을 묘사할 수 있는 모든 기회에서 다른 방향으로 갔다. 누가 자신에게 맥주를 끼얹자 음험하고 보복적으로 행동하게 만들었다. 걱정하는 교사의 손에 화상을 입히게 해서 심술궂고 해롭게 만들었다. 말다툼 중에 자신의 가족을 부정하게 만들었고, 한 키스씬에서는 자신의 인간성을 부정하게 했다. “첫키스 이후로는 내리막길이라고 하던데요.” “인간들 경우에나 그렇겠죠.” (물론 농담이긴 하지만, 그을린 폐허 구덩이 위에서 솔직히 남이나 다름없는 사람의 얼굴을 빨면서 하는 농담이라는 점은, 그가 우리 중 하나가 아니라는 개념에 무게를 더한다.)

이런 묘사들을 별로 중요하지 않는, 사소한 것으로 치부할 수는 있다. 하지만 반면 핵심적인 “미덕의 묘사” 부분은 어떤가? 위의 행동은 우리 모두가 저지르는 잘못이고, 누구에게나 처음이 있었다고 반론할 수는 있다. 물론 사실이다. 슈퍼맨은 픽션의 어떤 캐릭터만큼이나 투명한 미덕의 귀감이지만, 클라크에게는 실수와 단점이 어느 정도 허용된다. 특히 망토를 두르기 전에는.

하지만 도중에 우리는 그의 도덕적 가치가 무엇인지 봐야 한다. 우리는 클라크가 믿는 것, 선택하는 것을 드라마적인 묘사로 볼 수 있어야만 한다. 이 영화는 주어진 모든 기회에서 그런 묘사를 피한다. 클라크가 술집에서 싸움을 피하는 것도 폭력이나 보복행위를 피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튀는 것을 피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비를 건 상대의 사유물을 파괴함으로써 폭력과 보복을 달성한다.

이 슈퍼맨은 결코 도덕적이지 않다. 연민이나 양심도 보이지 않는다. 파괴행위가 인구 집중지역을 피해가도록 유도하지도 않으며 인류와 어떤 유대감을 맺지도 않는다. 구해줄 사람들을 찾아 세상을 여행하는 대신, 눈 앞에서 불 타 죽기 직전쯤 되야 사람을 구하는 내성적인 은둔자다. 그만큼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기대되는 수준에서, 문자 그대로 최소한만을 행한다. 그는 영웅이 될 수 없다. 또 다른 하늘 위의 아버지인, 영원히 캔사스와 오즈 사이 어딘가에서 날려다닐 죠나단 켄트가 가르쳐준 보신주의에 얽매여있기 때문이다. 


제작자들은 전체적으로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도덕적인 가치를 주입할 수 있었다. 클라크의 내성적인 면을 유지시키되 도시전설로써의 측면을 강조할 수도 있었다. 망토나 코스츔 없이, 세상을 떠돌며 놀라운 힘과 용기로 생명을 구하는 슈퍼맨으로써 말이다. 이것이 애초에 로이스 레인을 슈퍼맨에게 끌어들인 이유였다. 하지만 로이스의 조사에는 단지 두 가지의 영웅적 행동만이 참고자료였다. 그녀는 어떤 “슈퍼맨”에 대한 도시전설이 아니라, 빅풋을 따라 UFO로 들어가서 슈퍼맨에 대해 알게 된다. 


만약 클라크가 아버지의 조언을 무시하고 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켜왔다면, 같은 진행이라도 다른 도덕적 중심을 지닌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조드가 지구 사람들에게 “슈퍼맨을 내놔라.”고 했을 때 사람들은 “그럴 수 없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왜냐면 세상에는 그런 “슈퍼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희망과 영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작자들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영화의 예수 이미지 집착에 대해 말이 많지만, 사실 팔을 벌리는 것만으로는 구세주가 될 수는 없다. 영화는 기독교와 전혀 관련성이 없고, 나자렛 색깔을 좀 빌려왔을 뿐이다. 예수는 목을 꺾어버리거나 도시를 파괴하지 않았다. 예수는 어디를 봐도 상당히 괜찮은 친구였다. 예수의 이야기는 연민과 희생에 대한, 완전한 도덕적인 슈퍼히어로 이야기다. 그는 남의 트럭을 테러하려고 외딴 마을의 전깃줄을 뜯어내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히어로도 있다. 나는 문제의 목 꺾기 사건 한참 전부터 클라크 켄트의 모든 선택이 울버린같은 히어로가 할만한 선택이라고 느꼈다. 울버린은 사람을 싫어하고 쪼잔하고 음울하면서 그걸 다 간지나게 보이게 하는 캐릭터다. 하지만 울버린은 구세주는 아니다. 울버린은 귀감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 “울버린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라고 쓰여진 팔찌를 차고 다니진 않았을 것이다.

히어로들은 각자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각자 다른 이야기를 전달한다. 대부분의 관객에게 슈퍼맨은 정의로운 영웅이고, 이 점을 탐구하지 않는 이야기는 슈퍼맨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맨 오브 스틸> 제작자들은 슈퍼맨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에는 큰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슈퍼맨의 이름은 제목에도 나오지 않는다. 작중에 처음 그 이름이 언급될 때는 간신히 기어나오는 느낌이다. 이름이 큰 소리로 제대로 읊어질 때, 대사를 말하는 병사는 스나이더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그 이름에 “전혀…좋은 인상을 받지 않는다.” 캐릭터의 가슴에 있는 “S”는 사실 알파벳 “S”가 아니다. 영화는 단 한번도 “슈퍼맨”이라는 단어를 자랑스럽게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에 악당은 슈퍼맨을 파괴해버린다. 악당이 승리한 것이다. 조드 장군은 라라 로-반의 아들을 찾아내겠다는 맹세를 지키고, 비록 크립톤을 자신의 뜻대로 부활시키는 데에는 실패하지만, 슈퍼맨을 이용해 자살하겠다는 목적은 달성한다. 조드는 왜 슈퍼맨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부추겼을까? 그것은 자신의 라이벌인 고결한 죠-엘의 마지막 유산을 타락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조드는 칼-엘의 영혼에 지울 수 없는 흠집을 내고자 했다.

조드 때문에 슈퍼맨은 절대로 위대해질 수 없다. 절대 어떤 귀감이 될 수도, 슈퍼맨이 될 수도 없다. 자신이 쌓아온 시체의 산 위에서는, 그 오랜 기간 동안 인류에 대해 그토록 무심했던 전력으로는, 끔찍하게 부러지는 뼈의 소리로 우리 별에 자신의 존재를 알린 시점에서는 불가능하다.

이것이 스나이더와 고이어가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다. 그들은 나름 타당한 선택을 했고, 이 버전의 스토리와 캐릭터를 즐기는 관객도 있다. 이 버전의 슈퍼맨이 좋다고 말해서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영감을 주는 존재로써의 슈퍼맨을 원한다고 주장하면서 "이것이 나의 슈퍼맨"이라고 한다면 나는 놀랄 것이다.

슈퍼맨에 대한 가장 유명한 문구 중 하나는 죠지 리브스가 주연한 1950년대 TV 시리즈 <슈퍼맨의 모험> 오프닝에서 나온다. 한 남자가 외친다: “저기! 하늘을 봐! 새야!” 이제 와서 식상할 정도로 반복되었으니, 그 뒤의 대사는 다들 알 것이다. 지금 와서는 그 문구에 진부하지 않은 오마쥬를 바치기 어렵다. 하지만 그 안에는 핵심적인 요소가 있다. 많은 팬들에게 있어 슈퍼맨은 경외심을 가지고 우러러보게 되는 존재다. 이 말은 은유가 아니다. 그는 정말로 우리 위에 있다. 그는 모범적이다. 그는 훌륭하다.

그 누구도 경외심을 품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맨 오브 스틸을 바라보지는 않을 것이다. 화면 속에서 드러났듯이, 이 사내는 우리 중의 최선을 대표지도 않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상도 아니다. 고이어와 스나이더의 선택은 그의 도덕적 힘을 벗겨버리고, 우리에게는 적절한 순간이라도 살인하지 않을만큼 순수하고 선한 사람은 없다는 메세지를 남겨준다. 맨 오브 스틸은 미덕의 귀감이 아닌, 죽음과 학살의 상징이다.

만약 당신이 하늘을 나는 사람을 본다면, 놀라며 경외감에 손가락으로 가리키지 말아라. 대신 비명을 지르며 숨을 곳을 찾아라. 이제는 누구도 당신을 구해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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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바우치
영화2012.05.19 21:07

인기 영화를 초단축 대본으로 축약시키는 패러디 사이트 <Editing Room 편집실>의 <어벤져스> 편입니다. 당연하지만 스포일러 주의하시고...

원문은 이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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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2012.04.08 18:59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영미권에서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같은 기독교 명절에 단골로 방영하는 영화입니다.

원작은 뮤지컬이고 1973년, 2000년에 영화가 두 번 만들어졌는데 캐스팅 외에도 시대 차이와 방향성의 차이로 비교하며 보면 재미있습니다^^

 

우선 오프닝곡 Heaven On Their Minds (천국은 그들의 마음 속에) 입니다. 주인공인 유다가 과거를 회상하며 예수에게 의문을 던지는 형식으로 극을 소개하는 노래입니다.

일단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캐스팅인데...73년도에는 흑인 유다고 2000년도에는 대머리...아니 백인 유다입니다. 70년대에는 60년대 부상한 인종차별철폐 민권운동과 히피 움직임의 영향으로 의식적으로 다인종 캐스팅을 한 결과입니다. 가령 마리아 막달레나 역의 배우도 아시아계 혼혈인 이본 엘리만이고, 열두제자 중에서도 흑백 캐스트가 뒤섞여 있는데 당시로써는, 특히 성경 소재로써는 상당히 파격적인 캐스팅이었죠. 사실 극 자체가 역사적인 재현이 목표가 아닌 (솔직히 그럴 경우 백인 캐스트도 말이 안되진 하지만^^;) 인간 예수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이 목표이므로 인종적으로 다양한 캐스팅을 해도 무리는 아니지요.

아무튼 두 배우 다 자기만의 스타일로 훌륭한 퍼포먼스를 선보여서, 어느 한 쪽의 유다가 더 낫다고 말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전자는 강직한 이상주의자로써의 면이 더 강한 반면 후자는 좀더 정신적으로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느낌이죠. 예수 역의 경우 73년도판은 서구인들이 예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이미지의 비주얼입니다. 어깨 길이 머리에 수염과 선해 보이는 얼굴이라 척 봐도 예수답다는 점이 장점입니다. 몸이 왜소해서도 그렇고 목소리도 좀 그렇고 왠지 불쌍해 보이는 점도 있지만요. 반면 2000년도판은 어깨 길이 머리나 흰 옷같은 건 유지하여 예수의 이미지 중 일부는 따왔는데...뭔가 어중간하고 인상이 희미하달까요...역시 수염이 없어서인 듯...아예 180도 다른 이미지의 예수로 한다면 모르겠는데 기존 예수코드의 50%만 가져오니 뭔가 어중간해 보이는 듯요. 역시 수염은 중요합니다-ㅂ- 수염만 부족할 뿐 목소리는 상당히 어울립니다.

그리고 원작이 무대극이기에 두 영화 다 무대극적인 안무와 세트를 활용하고 있지만, 73년도판은 무려 이스라엘과 사해 주변에서 로케 촬영(!)을 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맞는 현지에서 히피 차림의 배우들이 춤추고 노래하니 정말 포스트모던함이 살아나지요. 아예 영화 도입부의 전주 부분에 배우들이 버스를 타고 유적지에 도착해서 의상을 입고 무대도구를 꺼내는 장면이 나올 정도로 대놓고 메타적입니다. 반면 2000년도판은 무대극 자체를 촬영한 것인데, 그래서 좀 좁은 느낌은 들지만 컨트롤이 잘 된 환경에서 요즘 관객 눈에는 더 친숙하고 안정된 안무와 연출을 보입니다. 이것도 각자 방향성이 다르니 취향 나름이겠지요.

 

다음은 What's the Buzz(무슨 일이죠)와 바로 이어지는 Strange Thing Mystifying(이상하고 희한한 일) 입니다. 예수가 파닥파닥대는 빠돌이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가르침을 주고, 마리아 막달레나가 지친 예수의 몸을 돌봐주는데 유다가 의의를 제기하다가 오히려 예수에게 한 마디 듣는 장면입니다.

73년도판은 이스라엘 로케촬영을 하느라 예산이 쪼달려서 로마 병사들도 연보라색 난닝구의 공사판 알바총각들로 전락...는 아닐테고 히피풍이니까...원래 당시 의상이 그랬으니까...로 이해해야겠죠?^^ 2000년도판의 예수도 난닝구니까요. 종교화나 인디아나 존스에서 익숙한 사막 아래 굴에서 촬영하여 로케를 잘 활용한 사례로 보입니다.

아무튼 사순절-부활절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날들이니 관련 곡 중심으로 살펴보죠.

 

This Jesus Must Die(예수는 죽어야 한다)는 예루살렘에 온 예수의 하늘을 찌르는 인기를 위협으로 느끼고, 그를 제거할 음모를 세우기 시작하는 유대교 대제사장 가야바와 휘하의 제사장들의 노래입니다.

아무래도 악역인만큼 검은 옷으로 통일한 것은 동일하나, 전자가 묘한 노출도로 70년대 판타지/7~80년대 특촬물 악당같다면 후자는 조폭이나 한 90년대 이후 영화의 악의 조직 및 뱀파이어 조직 간부같은 디자인입니다. 장소도 전자는 공사장같은 것 위에서 예수를 내려다보는 반면, 후자는 지하에서 모니터를 통해 예수를 감시하고 있어서 차이가 분명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제사장 중 하나인 안나스가 볼드모트같이 생겨서 후자에 추가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The Last Supper 최후의 만찬은...최후의 만찬입니다. 예수는 베드로가 자신을 세 번 부정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이 자리에 배신자가 있다고도 밝혀 유다는 차라리 누군지 밝히라며 반박하고 갈등을 느끼지만, 나머지 제자들은 전혀 상황파악을 못하는 속 편한 상태.

전자는 히피 피크닉ㅎㅎ이고, 긴박한 상황에 비해서 연기가 절제되어 있는 점이 유다가 배신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밝히지 않고 말라지도 않아 유다가 절박함을 느끼는 상황과도 잘 어울려 보입니다. 감정선을 표현하기 위한 템포조절과 연출도 좋구요. 후자는 무대극이라 어쩔 수 없긴 하지만 영화에는 좀 안 맞는 오버 연기가 튀는군요. 그냥 무대극을 그대로 촬영했다는 관점에서 보면 그럭저럭 괜찮습니다.

 

Gethsemane 겟세마네는 죽을 운명을 알면서 홀로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신에게 이 희생의 의미를 보여달라고 추궁하는 예수의 솔로 곡입니다.

이것도 음...역시 후자가 무대극을 촬영했다는 것은 감안해야 하지만 그래도 좀 더 영화적 연출을 고심해줬으면 하는 부분이랄까요...^^; 전자의 산을 오르는 예수나, 종교화의 편집, 일출과 연기가 아무래도 더 뛰어나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Herod's Song 헤로드의 노래는 예수가 제사장들의 음모로 체포되어 빌라도에게 보내졌다가, 빌라도의 명령으로 헤로드에게 보내져 헤로드에게 조롱당하는 내용입니다.

헤로드 왕은 타락한 세속 권력자로 상징되는데, 73년도판에서는 휴양지를 즐기는 부호라면 2000년도판은 보드빌 클럽 사장이라 캐릭터 속성은 유지하면서 표현을 다르게 한 점이 재밌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세속적으로 뱃살 출렁거리는 전자 쪽이 조금 더 유쾌...가 아니라 바다가 이뻐서 전자가 좀 더 나은 것 같지만 일단은 옷을 입은 것을 선호하시는 분은 후자도 좋으실 듯요. 둘 다 능글맞고 경박한 캐릭터를 잘 살렸다는 점에서는 캐스팅과 연기는 공통적으로 탁월하다고 봅니다.

 

Judas' Death 유다의 죽음은 예수의 수모와 자신이 배신자로 영원히 낙인찍히는 것을 두려워하다가 미쳐서 자살하는 유다의 심정을 그린 곡입니다.

유다는 두 배우 다 좋아서 뭐라고 하기 어렵고...^^; 전자는 미친 사람처럼 산을 타는 연기가 매우 인상적입니다. 후자는 테이블에 네발로 기어오는 게 왠지 여배우나 여자 모델이 섹시 유혹 컨셉으로 기어오는 연출이 생각나서 부적절하게 뿜겼는데...광기나 자살 연출은 제법 괜찮게 한 듯 싶습니다.

Trial Before Pilate 빌라도의 재판은 애초에 무고한 죄인을 심판하고 싶지 않아 헤로드에 보낸 로마 총독 빌라도가, 결국은 헤로드가 도로  보내서 재판을 하게 되는 부분입니다. 결국 군중들의 희망에 따라 십자가형에 처하고 2천년 넘게 매주 한번씩 사도신경이라는 형태로 디스당함ㅇㅇ 

전자의 빌라도가 관료적 면모를 강조했다면 (문관 타입이라 솔직히 군중에게 얕잡혀 보이는 점도 납득) 후자는 군인으로써의 빌라도를 강조한 결과로 보입니다. 특히 2000년도판에선 로마 군복이 나치 SS 군복에 트렌치코트와 가슴판 갑옷을 더한 무슨 중2중2한 일본 애니나 수상한 페티쉬 장르에 나올 것 같은 복장이고, 빌라도 역의 배우가 덩치도 크고 근육질이고 수염도 길러서 마초하고 위압적인 이미지가 강해졌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 앞에서 무리해서 권위적인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하면서 정작 자신을 잘 제어하는 쪽은 전자의 빌라도로 보이고, 후자의 경우는 얼핏 강직하고 권위적인 군인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유약하고 예민한 내면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고 그마저도 무너지는 모습을 드러냅니다. 전문용어로 갭모에라고 하죠. 다소 아쉬운 점은 연기할 때 강조의 억양과 타이밍이 묘해서 자칫하면 개그로 보인다는 점...그나마 이 노래는 나은 편인데 "빌라도의 꿈"에서는 전국무쌍3의 노부나가 수준입니다.

게다가 왜 침대 위에 말채찍같은 게 있는지도 모르겠음...-_- 

연출과 촬영의 경우 전자는 원형극장 유적지를 잘 살린 점과, 군중샷에서 희열과 측은함이 뒤섞인 다양한 표정을 드러내는 점이 특징입니다. 후자의 경우 군중들이 대단히 획일적이기는 하지만 일단 통일된 안무로써는 무대에는 어울리는 연출로 보입니다.

 

Superstar 슈퍼스타는 극의 테마곡이자 피날레곡에 해당됩니다. 예수에게 유다의 영이 나타나 예수의 행동과 희생에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묻는 내용의 곡입니다.

전자의 경우 재판 장소였던 원형극장에서 그대로 유다의 등장이 이어지고, 예수의 십자가형은 별도의 공간에서 일어나며 교차편집되는 식입니다. 후자는 무대인만큼 같은 공간에서 유다가 예수에게 직접 접근해서 채근하는 연출이 있습니다. 의도적이겠지만 전자의 경우 피날레의 끝까지 나오지는 않고, 처형 장면으로 전환됩니다. 색깔 테마가 다른 것도 눈에 뜨이네요. 그나저나 흑형 유다의 미치게 술 달린 디스코 패션은 너무나 강렬함 버틸 수가 없음......

 

사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가 부활절 단골 영화라는 점의 아이러니는 인간 예수를 그리는 작품인만큼 부활은 나오지 않아서죠ㅎㅎ 그래도 신약성서 테마 영화로는 신자 비신자 가릴 것 없이 광범위하게 오랫동안 사랑받는 영화라 기독교 명절 기간 동안 애호되는 것도 납득이 갑니다. 전혀 접한 적이 없다면 아무래도 요즘 관객 눈에 더 낯익고 세련되어 보이는 2000년도 판부터 보셔도 괜찮을 듯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영화적인 완성도가 더 높은 것은 73년도 판이라고 생각하지만, 2000년도판도 몇 캐스팅과 의상과 빌라도 갭모에같은 고유의 미덕도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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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바우치
영화2011.02.18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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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4권까지 발매중인 독특한 음식만화 <대결! 궁극의 맛 (원제: 極道めし 직역하면 ‘조폭의 밥’ 정도)>가 현재 일본에서 영화로 제작중. 개봉은 올해 9월 예정이라고 합니다.

<대결! 궁극의 맛>이 독특한 이유는 교도소라는 배경도 그렇지만 기존 음식만화의 구조를 타파하는 구성에 있지요. 간단히 말해, 교도소에서 재소자들이 지금까지 먹었던 맛있는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내용의 음식만화입니다. 물론 그냥 얘기만 하면 재미없으니까 상품을 걸고 대결을 합니다. 새해 도시락 반찬(사실 구성은 초호화판 한솥도시락 정도지만)을 걸고 가장 많은 사람의 군침을 넘기는 이야기를 뽑는......초딩스러움과 잉여틱함의 중간에 있는 대결 같지만 뭐 교도소라는 한정된 공간에서라면 있을 법한 오락이겠지요.

등장인물들이 요리도 안하고 음식을 먹지도 않고 (간간히 소박한 교도소 급식을 먹는 모습은 나오지만, 절대 내용의 메인은 아닙니다) 오로지 과거의 음식 이야기만 하는 음식만화지만, 물론 영화는 실제 배우들이 연기하니 촬영하면서 맛있게 많이들 먹고 있다는군요...^^;

감독은 <명랑한 갱이 지구를 움직인다> <돼지가 있는 교실> 등을 감독한 마에다 테츠. <돼지가 있는 교실>은 실화를 다루는 만큼 잔잔하면서 다면적인 입장을 다루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절대 제목에 돼지가 나와서 본 것은...사실 맞지만...) 배우들로는 나가오카 타스쿠, 카츠무라 마사노부 등이 출연하고 공개된 사진에서 보다시피 원래는 각자 다른 방의 재소자들이었는데, 아마 흥미로운 이야기 중심으로 한 방으로 집합시킨 것 같습니다. 사실 원작을 읽어보면 뻘하거나 짧으면서도 이상하게 효과적인 이야기들의 배치도 재미있고 묘한 사실성을 더하긴 하지만, 영화의 러닝타임을 생각하면 감동적이거나 인상적인 이야기 중심으로 보여주는 것이 낫겠지요.

일본영화들이 어지간해선 국내에 개봉되지 못하는(개봉해도 오래 걸려있지 못하는) 현실이 아쉽지만, 음식 소재 영화에 한해서는 개봉확률이 높은 것 같아서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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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바우치
영화2010.08.08 11:34

브래드 피트가 흉물스러운 턱수염을 정리한 사건을 계기로 MSN 인터테인먼트가 스타들의 턱수염 특집을 개시.
좋은 수염부터 나쁜 수염까지 다양한 사례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이런 좋은 걸 이 몸이 놓질 수가 없지! 



브래드 피트

....뭐, 뭐죠 왼쪽의 홈리스 영감님은?; 정말 깎아서 다행이네요...
참, 여기서 오른쪽도 수염 있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는데...영어는 수염을 길이, 부위, 형태에 따라 세분화해서
턱수염을 의미하는 beard는 어느 정도 길이가 있는 턱수염이고, 오른쪽의 짧게 깎은 수염은
스터블stubble이라고 따로 구별합니다.


러셀 브랜드

최근에는 영화 [아더]를 찍느라 수염을 깎았지만 평소에는 수염을 기른 모습이 익숙해서 낯설다는 평.
...그런데 오른쪽의 평소 모습은 약간 예수님 같기도(...)



데이빗 베컴

아 이건 어느 쪽도 우월하네요. 덧붙일 말이 없음.



죠니 뎁

죠니 뎁은 축복받은 골격의 소유자라 수염을 길러도 깎아도 멋있다는 평입니다.
...동감합니다.


유안 맥그리거

모든 남자스타들의 통과의례인 듯한 [덥수룩 턱수염] 과정을 거쳤던 유안.
그 아름다운 얼굴을 수염으로 가릴 필요는 엄따!--는 평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저 사진에서 약간 정돈한 (그러니까 오비완 look...) 정도는 좋다고 생각.



로버트 패티슨

너무 말끔번드르르한 뱀파이어보다는 약간은 수염이 난 편이 좋을 듯...
...도 하지만 그렇다고 부시시 나뭇꾼 턱수염은 영 아니잖아!--라는 평.
공자님이 말씀하신 중용이 요구되는 타입입니다. 그나저나 가운데의 썩소 사진은 안티의 소행?;



죠지 클루니

죠지의 경우도 유안처럼 바탕이 초 잘생겼으니 수염으로 가리지 마!--라는 평.
아무래도 수염이 하얗다보니 산타할아버지...아니 좀 나이들어 보이게 하는 점은 있네요.
...하지만 그래도 멋있긔!!!



짐 캐리

할리우드에서 가장 표현력이 뛰어난 얼굴을 수염으로 가리지 말라!--는 평.
그나저나 왜 할리우드 남배우들은 꼭 이 '통과의례'를 거치는 걸까요?^^;
...여배우로 치자면 마구 먹어서 살 찌도록 방치-와 비슷한 거려나...



다니엘 래드클리프

수염을 기르니 고정된 해리 포터 이미지에서 벗어나 좋다-는 평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좀 어중간해 보이지만 뭐 배우로써는 이미지가 다채로운 편이 좋으니...



스펜서 프랫

사실 바탕도 쫌 어중간했는데 수염을 길러서 히말라야 설인이 되었다는 평.
적어도 수염이 인상착의에 엄청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확실한 사례이기는 하네요...^^;



호아킨 피닉스

웬 산사람인가 하고 식겁...
 역시 이 분은 맨얼굴이 낫습니다;



저스틴 팀버레이크

맨얼굴의 동안 저스틴도 좋지만, 남자다운 수염 모습도 좋아!-라는 평.
솔직히 저스틴 팀버레이크는 뭘 하든 twink 얼굴이라 별로 관심이 없지만 그나마 수염이 있는 게 나을지도?



윌리엄 왕자

충격적이게도 턱수염을 기르는 편이 젊고 멋져 보이는 왕자. 역시 왕족에게는 수염이 있어야!--라는 평.
음 정말로 수염 있는 쪽이 젊어보이네요...벗겨진 머리를 향한 시선이 분산되어서일지도! (...)



톰 행크스

캐스트어웨이의 전설의 수염만큼은 아니지만, 이 정도도 충분히 멋있어!--라는 평.
당장이라도_윌슨을_외칠_것_같은_기세.jpg



이 특집의 교훈은 아무리 바탕이 훈남이라도 자신의 얼굴형에 어울리는 수염을 고민하고 연구하여

수염을 기른 후에도 그것을 내내 철저하게 관리하는 자만이 훌륭한 수염을 갖출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수염 관리를 잘 하는 남자일수록 그만큼 패셔니스타+나르시시스트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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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바우치
영화2010.07.02 14:05


은혼 극장판 매진.
예상했던 결과입니다. 아마 세번 다 예매한 분도 많겠지요?


명탐정 코난 극장판 자막판 매진. 이것도 예상함.
...근데 이거 무슨 시츄에이션이야??! 설마 란이 고무신을 돌려신었...?!
(뭐 솔직히 내용이 너무 질질 끄니 그럴만도 하지만...)
코난 요즘 거 보시는 분들 좀 알려주세요!-ㅂ-;;;;;


아시아 제작배급사 회고전: 선라이즈 기동전사 건담-우주세기의 기억.
7작의 우주세기 건담 극장판을 몰아서 상영하는 무시무시한 이벤트인데 당연히 전멸...아니 매진.
제타건담 극장판은 조금 보고 싶었는데 약간 아쉽습니다.
그러고보니 한양문고에 역습의 샤아 소설도 있던데 거기서도 샤아는 초딩인가요...


트릭3 극장판 매진.

...아아아아아앍!TTTTTTTTTTTTTTTTTTTTT (냉정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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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바우치
영화2010.03.19 23:34

*이 리뷰에는 다소의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지난주 생일로 (밥 먹을 상태는 아니라서;;) 어머니와 조조로 보러 갔는데 오오 정말 재밌더군요!

배우들도 훌륭하고 주옥같은 명대사가 줄줄이 박혀 있어서 좋았어요. 이거야 각본상 탈만한 작품입니다.

조지 클루니가 전직지원전문가(career transition consultant)...라는 그럴듯한 이름이지만 실상은 해고전문가인 '라이언 빙햄'으로 나오는데 간단히 말해 '스스로 부하를 자를 배짱이 없는 겁쟁이 사장'들을 위해 대신 해고 통보를 하는 직업입니다. 법적 분쟁 및 해고된 당사자들이 저지를만한 '미친 짓'을 방지하기 위해서죠.

특히 경제 한파로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이루어지면서 오히려 성황을 누리는 직업인데, 이 때문에 라이언은 미국 전역으로 출장을 다니며 1년 365일 중 대부분을 비행기에서 보냅니다. 보통 사람들이 불편하고 번거롭게 느끼는 비행기 여행의 요소들이 라이언에게는 친근하고 안정적인 '일상'의 의식이죠. 도입부에 일을 마치고 물 흐르듯이 호텔에서 짐을 챙기고, 공항에서 체크인을 하고 검색대를 통과하는 과정의 연출이 그렇게 의식화된 라이언의 삶을 잘 보여줍니다. 물론 당연히 마일리지는 엄청나게 쌓여서 항공사, 공항 라운지, 호텔에서 VIP 대우를 받고 마일리지 축적에 집착하여 지금까지 6명만 존재했다는 1000만 마일리지 등극의 꿈을 꾸는 마일리지 오덕이기도 합니다. 본직 외에도 '가방을 내려놓으라'는, 인생의 쓸데없는 짐을 훨훨 털어버리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기도 하지요. 이렇게 쿨쉬크하게 사는 듯한 라이언에게도 느닷없이 격변기는 세 여성들을 통해 들이닥칩니다. 첫번째는 자신과 꼭 닮은 커리어우먼 알렉스와의 만남이고, 두번째는 원격화상통신을 통한 해고통보 시스템을 제안하여 라이언의 삶의 방식을 위협하는 당돌한 신입사원 나탈리와의 동반출장, 세번째는 수년동안 얼굴도 마주치지 않았던 여동생의 다가오는 결혼식입니다.

이 영화는 언뜻 보면 하나의 특이한 개인에 대한 이야기 같지만, 사실은 인생에 대한 우화입니다. 구조조정과 불황에 오히려 번창하는 라이언의 직업부터가 그렇지만, 온갖 아이러니적 상황이 벌어지는 것은 곧 인생의 부조리함과 아슬아슬함을 반영한 것입니다. 원격화상 해고시스템을 제안한 나탈리는 무참하게도 문자메세지를 통해 남자친구에게 채입니다. 라이언은 안정된 인간관계를 부정하는 쉬크한 논리를 내놓으면서 여동생 결혼식을 위한 번거로운 사진을 찍고, 알렉스와 지금의 관계 이상의 무언가를 원하지만 자신이 뭘 원하지도 잘 모르고, 쿨하던 그가 어이없게도 사랑에 매달리는 남자, 버림받은 남자가 되고 맙니다. 라이언이 마일리지와 VIP 지위에 느끼는 집착은 역설적으로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암시합니다. 그가 (의뢰주 사장들을 대신하여) 해고하는 직원들이 직장에 갖다바친 세월과 열정이 웬 생면부지의 남자의 한마디에 끝장이 나는 것처럼 말이지요. 

생일날 봐서 그런지 주인공에게 공감하고 (아 물론 멋진 프로페셔널인 죠지 클루니와 저는 한점도 닮은 구석이 없지만, 주인공이 느끼는 고뇌나 고독에 대해서요) 온갖 희비극적 상황에 웃으면서도 자신의 지금까지의 인생을 돌아보게 만드는 영화였습니다. 인생에 목적을 부여하는 것만이 삶의 의미를 가져다 줄까요? 만약 그 목적이 달성된 다음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단 하나 확실한 건,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진실은 변함이 없을 겁니다.


*당황, 혼란, 분노, 절망 등 다양한 반응을 보이는 해고대상자들은 사실 배우가 아닌 실제로 해고를 겪은 일반인들 중에서 뽑았다고 합니다. 해고통보를 받았을 당시의 자신의 반응, 혹은 취했으면 좋았다고 생각하는 반응(저같은 경우 깽판 부리고 싶을 듯...^^)을 수집해서 재현해달라고 요청했더군요. 어쩐지 리얼리티가 있더니만...

*조연의 두 여배우들의 역할과 연기도 무척 훌륭합니다. 나탈리는 첫인상은 건방진 애송이였다가 남친에게 문자로 채여서 호텔 로비에서 엉엉 짜는 여자애가 되니 참 귀여워지더군요. 알렉스는 나쁜 여자라고 욕을 먹을만 하긴 한데(개인적으로는 그 미모와 몸매로 애 둘 있는 엄마라는 점이 가장 심각한 사기였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종류의 여성캐릭터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그려진 경우도 드물고, 또한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라이언의 일방적인 착각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라이언은 그녀를 자신과 똑같은, 문자 그대로 라이언 여성판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그렇지 않았고 타인인 이상 그럴 리도 없으니까요. 역으로 알렉스는 라이언을 자신과 똑같거나 비슷하게 따로 가정이 있으면서 캐주얼한 관계만으로 만족할 남자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 외에 등장시간은 짧지만 라이언을 은근히 강공스럽게 부려먹는 상사도 인상적인 캐릭터였습니다.

*결혼식 당일날 긴장해서 주일학교 교실에 틀어박힌 라이언의 매제가 읽고 있던 동화책이 국내에 [인형의 꿈]으로 번역된 [The Velveteen Rabbit 벨벳 토끼 인형]인데, 1920년대에 출간되어서 지금까지 사랑받는 고전입니다.



인형토끼가 소년에게 사랑받음으로써 진짜 토끼가 될 것을 꿈꾸고 마지막에는 진짜 눈물을 흘려서 요정에 의해 진짜 토끼가 된다는 내용인데, 라이언의 삶은 이 동화가 다소 어둡고 현실적으로 반영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마지막에 알렉스는 라이언에게 말합니다. '이게 (한 가정의 어머니이자 아내로써의) 진짜 나에요. 당신은 도피였어요. 나는 어른이잖아요.' 그녀에게도 자신이 '진짜'일 거라고 믿었던 건 라이언의 일시적인 착각이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자신의 진짜 삶은 남들에게는 비일상인, 허공에 떠도는 자의 인생이라는 것의 무게를 깨닫게 됩니다. 토끼인형과 달리 '진짜'라는 것을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규정할 수 없는 자는 홀로 그렇게 살아갑니다. 동시에 타인과 맺는 관계의 의미와, 자기 나름대로의 관계맺기를 실천해 갑니다. 신혼여행할 자금이 없는 여동생 부부에게 지금까지 금쪽같이 모아온 마일리지를 일부 양도하려고 하거나, 해고전문가라는 일의 무게를 너무나 치명적으로 깨닫고 직장을 그만둔 나탈리를 위해 후한 추천서를 써서 구직을 돕는 식으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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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바우치
영화2010.02.05 13:43

공주와 개구리 더빙만 상영하는 더러운 세상...-_-...개봉 첫주에는 대학로 CGV같은 애매한 데서만 자막상영을 해서 대학로는 연극 보러 가는 곳이지 영화 보러 가는 데가 아닌데~ 그리고 디즈니니까 더 나은 데로 상영관 바뀌겠지뭐~'3' 하고 느긋하게 생각했다가 이제 검색해 봤더니 종합예매사이트든 개별 극장이든 아예 한글더빙밖에 상영하지 않잖아! 디즈니코리아 이거 왜이래 이거! 내가 글 못 읽는 얼라새끼도 아닌데 왜 우리말 더빙같은 걸 듣고 있어야 해! 난 심지어 초딩 때도 일부러 자막상영하는 극장만 악착같이 찾아가서 본 몸이라고! (←골수 디즈니 빠였음) 게다가 요즘은 애들 영어교육에 좋다고 엄마들도 자막 더 선호한다고 들었는데? 대체 왜 자막 다 내린거야!

...해서 항의문의할 겸 배급처인 브에나 비지타 코리아로 전화했더니 응답기(그것도 메세지가 꽉 차서 더 녹음할 수도 없는-3-)만 돌아가네요 호호호...^^ 다죽었어
 
아무튼 일천년만에(기분상) 디즈니가 공들여 만든 2D 극장판 (요 몇년간은 2D 애니 만들어도 TV시리즈나 질 떨어지는 OVA 동인지 뿐이었는데TT) 애니라고 해서 기대하고 고대하고 있었는데 국내 배급상황이 이렇게나 치명적인 애로사항이 될 줄은 몰랐네요; 물론 아바타가 장기간 독점하고 겨울에 영화를 한꺼번에 개봉하는 것과 맡물려서 상영관 부족도 심각하겠지만, 그래도 미국에서 대히트한 작품이고 디즈니 본사로써도 회심작인데 홍보, 광고 단계조차 뭔가 부족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기분 탓일 뿐일까요? 왕년의 디즈니 팬으로써 고전적인 2D의 복귀작을 푸대접하고 3D 기술력에만 하앍대는 듯한 한국적 현실이 너무 안타깝네요.

물론 원고가 막혀서 영화 보고 상큼하게 리프레쉬~☆하려는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서 삐뚤어진 것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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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바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