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2. 13. 21:05
[해리포터]를 너무나 좋아하는 김순희씨. 자신의 이름과 좀 비슷한 '수니 킴'이라는 오리지널 주인공을 내세워 해리포터 팬 픽션(줄여서 팬픽. 특정 작품의 팬이 원작을 자신의 의도대로 비틀거나 캐릭터만 빌려 전혀 다른 내용을 전개하는 등의 팬에 의한 픽션 문학.)을 썼다. 수니 킴은 양친을 데스이터에게 잃고 고아원에서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으나 신비하고 아름다운 보라색 눈동자가 매력적인 밝고 순수한 미소녀로 호그와츠에 편입학한다. 해리, 론, 루핀, 블랙, 프레드와 죠지와 염분을 뿌리게 하고 공부도 한 과목 빼고는 (모든 것이 뛰어난 캐릭터가 요리만은 못한다던가 하는 식의 애교스러움을 의도한 흔한 설정) 다 잘하며 심지어 적대적 캐릭터인 말포이나 스네이프도 홀딱 반하게 만든다. 마지막에는 캐릭터 중 한명과 행복하게 이어지거나 볼드모트의 공격으로부터 해리를 지키고 죽어가며 영영 해리의 마음 속에 남는다는 엔딩으로 끝이 난다. 혹은 그 주저할 수 없는 매력으로 볼드모트마저도 홀려서 개과천선시키던가.

메리 수(Mary Sue)는 특정한 타입의 가상의 캐릭터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단어의 기원은 미국 팬 픽션 및 슬래쉬(Slash. 일본의 '야오이'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주로 여성이 제작, 향유하는 남성 동성애물을 의미함.)의 탄생지이기도 했던 스타트렉 팬픽계로 여겨지며, 1973년 파울라 스미스가 당시 팬픽계에 만연하던 타입의 오리지널 캐릭터를 비꼬기 위해 쓴 A Trekkers Tale이란 단편의 메리수라는 이름의 캐릭터로 거슬러 올라간다.

메리수는 대부분의 경우 여성 캐릭터다. 간혹 남성 메리수 계열 캐릭터가 보일 경우 마티 스튜(Marty Stu)나 게리 스튜(Gary Stu)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캐릭터 자체의 성별에 무관하게 메리수라는 명칭이 폭넓게 사용된다. 메리수 캐릭터란 대체로 나이가 10대 정도이거나 외모가 10대이며, 용모 등이 지나치게 이상화되었고, (종종 세계관에는 안 맞는) 특이하거나 막강한 특수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종종 원작의 주요 캐릭터들을 재치고 대활약하고, 그들의 호감을 사서 사랑을 나누기도 하며 (간혹 그녀와 대립하거나 적의를 보이는 캐릭터도 있지만 99%의 확률로 작가에 의해 응징을 당함), 분명한 성격적 결점이나 단점 없이 과도하게 완벽한 캐릭터를 말한다. 때로는 극단적으로 비극적이고 드라마틱한 과거나 트라우마, 숙명을 지니고 있고 일단 설정부터 복장까지 뭐든지 도를 넘어서 지나친 것이 특징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작가의 다소 사춘기적인 환상 및 원망충족적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캐릭터인 것이다.

국내에 상응될만한 개념이라면 지나치게 강하고 유능하고 인기가 많은 주인공인 '먼치킨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메리수와의 차이점이라면 메리수가 주로 여성이 주도한 팬 픽션계의 산물로, 대체로 정서적, 인간관계적 우위에 대한 판타지가 강한 반면, 먼치킨은 남성 작가와 독자가 많은 국내 판타지 및 무협 소설에서 태어나 절대적인 힘의 우위에 대한 판타지를 더 강하게 추구하는 점이라고 들 수 있겠다. 전반적으로 메리수적(的) 욕망을 간략히 정리하자면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싶다'이고, 먼치킨적 욕망의 요점은 '누구보다도 강해지고 싶다'인 셈이다. 물론 이들의 경계는 칼같이 나뉘어진 것이 아니어서, 먼치킨적 능력을 갖춘 메리수나 메리수적 인기를 누리는 먼치킨도 흔히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과도하게 뛰어난 주인공의 정형이라는 공통분모이다.

즉 좋아하는 세계관 속에서 좋아하는 인물들과 사이좋게 지내며 좋아하는 모험을 펼치고 싶다는, 굳이 특정 작품의 팬이 아니라도 최소한의 상상력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꿈꿀 수 있는 순수한 의미의 판타지인 셈이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상당 부분 원망충족적 판타지(wish fulfillment fantasy)를 위해 탄생한 인물형이다.

이러한 판타지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거의 모든 형태의 '이야기'가 현실에서는 좀처럼 일어나기 힘든 원망충족적 판타지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니, 지극히 자연스럽고 근본적인 인간의 욕망에 해당한다. 그러한 욕망과 판타지를 현실 속에서나마 가장 가깝게, 가장 저렴하게 실현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몸소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다. 사실상 전래동화에서부터 블록버스터 영화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야기가 이러한 원망충족적 판타지에 바탕을 두고 있고 바로 그 판타지를 보는 이에게도 공감을 얻고, 또한 일부 충족시키기 때문에 영원히 계속되고 반복되는 것이다. 영화 속의 남자 주인공들은 온갖 미인을 후리면서 악당을 물리치고 세계를 구하고, 여자 주인공들은 각종 고난을 극복하고 운명적인 상대와 행복하게 맺어지는 비슷비슷한 이야기가 힘을 지니고 있는 것도 원망충족적 기능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메리수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순수한 원망충족적 주인공의 전형인 셈이니까. 이야기-픽션을 탄생시키는 가장 근본적인 욕구 중 하나가 원망충족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럼에도 굳이 '메리수'라는 개념이 만들어진 이유는 맥락의 차이점에 있다. 즉 팬 픽션 세계,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동인계라고 할 수 있는 팬 공동체라는 특별한 영역과 맥락 안에서 극단적인 원망충족형 주인공은 좀더 미묘한 위치에 놓인다. 패러디나 팬 픽션이 아니더라도 지나치게 '잘난' 주인공은 간혹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아니 오히려 주인공을 멋지고 잘나게 하려던 작가의 의도와 정반대로 작용해 수용자의 반발을 사기도 한다. 국내의 먼치킨 주인공에 대한 개념 성립과 반발은 팬 픽션이 아니라 대부분의 작 판타지, 무협소설의 천편일률성에 대한 불만으로부터 생겨났다. 즉 부분적으로는 소설이 많아졌다는 사회적, 경제적 특성과 그로 인해 독자 수준의 향상 및 다양화로 비슷한 이야기에 식상함을 느끼는 것이다. (이야기 자체가 귀했던 시절에는 아무리 막내로 태어난 주인공이 착한 일 한번 했다고 온갖 미물들의 도움을 얻어  공주도 얻고 왕위도 얻는 식의 먼치킨에 메리수스러운 패턴이 번복되도 진지하게 의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러한 극단적 원망충족형 주인공에 대한 반발이 창작소설계보다 훨씬 앞서 70년대 미국의 팬 픽션계에서 먼저 드러난 것은, 앞서 말했듯이 팬 공동체라는 특수성 때문이다. 이곳에서의 창작은 엄밀히 말하자면 일본에서 '2차 창작'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미 창작된 기존 작품의 세계관과 캐릭터를 빌리는, 따라서 '자기 것이되 자기 것이 아닌' 미묘한 위치에 놓인다. 즉 원작자와 팬 작가라는 두명의 작가가 존재하는 셈이다. 하지만 팬 공동체 안에서 팬 픽션에 대한 권력과 소유권은 원작자와 작가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공동체 자체로 확대된다. 즉 '나의 세이버땅 하아하아' 류의 특정 캐릭터에 대한 애정을 나타내는 문장에서도, 엄밀히 말해 세이버는 '나'만의 것이 아니라 '세이버를 좋아하는 모든 사람'의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나'의 세이버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공적으로 존재하는 캐릭터인만큼 '나'의 것이면서 동시에 '모두'의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극단적 원망충족형 주인공은 발생하기 쉬우면서 (작가 자신도 특정 작품의 팬인만큼 그 속에 개입하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고 무엇보다 쓰기가 쉽다) 동시에 타인의 공감은 얻기 어렵다. 앞서 말한 영화 속의 원망충족형 주인공들이 계속 인기를 끄는 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공감과 자기이입을 통한 만족감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팬 픽션의 경우 좀 다르다. 물론 모든 캐릭터에게 사랑 받고 영웅이 되는 주인공에 감정이입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바로 그렇기에 메리수나 먼치킨 주인공들이 존속하고 있는 것이니까. 동시에 그만큼 반발을 가지는 사람도 많다. 왜냐면 그 주인공을 독자가 감정이입이 가능한 주인공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과도한 자기삽입형 인물로 보였기 때문이며, 게다가 여러 팬들이 공유하는 다른 저작물 작품의 세계 안에서 그렇게 '설치기에' 더더욱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즉, 메리수에 공감하는 독자는 앞서 말한 [수니 킴]에 자신을 이입할 수 있는 사람이고, 메리수를 싫어하는 독자에게 수니 킴은 작가 [김순희]의 가증스러운 분신일 따름이다. 그것도 너무나 동경하는 호그와츠의 세계와 사랑하는 캐릭터들에 대해 '감히' 픽션을 통해서나마 소유권을 주장하고 '더럽히는' 것이다. 실제로 메리수 주인공은 문자 그대로 '우주법칙을 비트는' 능력이 있기에 팬들이 생각하는 '더럽힌다'는 주장은(영미권에서는 이렇게 원작 캐릭터가 진지한 의미로 '망가지는' 것을 character rape-캐릭터 강간이라고 표현한다) 어느 정도 타당한 바가 있다. 앞서 말했듯이 메리수는 작가의 자기삽입형 주인공이기에 대부분의 경우 작가 자신도 이 캐릭터를 다룰 때 가장 기피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미움받는 것'이다. 이것은 작품 내는 물론 외적인 요소, 즉 독자들에게 미움받는 것도 포함한다. 그리고 창작 실력과 테크닉이 부족한 팬픽션 작가의 경우 그것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 원작의 세계를 비틀어 극도의 주인공 중심적 세계로 만든다. 원작에서는 어떤 과거로 두번 다시 제자를 안 들이는 캐릭터가 주인공만은 제자로 받아들이고, 절대로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 캐릭터가 주인공에게만은 마음을 열며, 결코 사랑을 할 수 없다는 캐릭터가 주인공을 열렬히 사랑하게 된다. 즉, 특정 원작-세계관의 기존 법칙을 싸그리 무시하고 오로지 주인공을 위해 돌아가는 우주로 탈바꿈시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법칙의 파괴 자체는 개그나 원작의 모순점을 폭로하기 위한 풍자적 목적으로도 종종 사용되니 그것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지만 문제는 작가가 독자들의 재미보다는 오로지 자신의 대리만족, 자신을 이입시키기 위한 캐릭터(참고로 꼭 오리지널 주인공일 필요는 없다. 기존 캐릭터의 가죽 속에 들어가는 메리수 캐릭터도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야오이는 그 특성상 작가와의 적당한 거리 유지가 이루어져 메리수 비난을 적당히 피할 수 있다는 점은 있지만 그래도 예외는 아니다.)를 위해 그렇게 한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목적이니 (물론 여기에 이입해서 만족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으니 상대적이다) 특히나 원작에 대한 애정의 정도와 특성에 따라 팬들 간의 미묘한 신경전이 펼쳐지는 팬 공동체에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 강한 저항감 때문에 영미권의 팬 공동체에서는 독자와 작가들의 의식 조성과 질적 향상을 위해 메리수의 정의 및 개념 정리, 그리고 메리수 리트머스 테스트라는, 자신의 캐릭터가 메리수인지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테스트 등, 메리수를 둘러싼 많은 토론이 오갔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메리수를 긍정하고 그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는 움직임도 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메리수는 가장 근본적인 형태의 주인공이다. 그리고 그렇게 대책없이 잘 나가는 사랑받고 유능한 주인공은 거의 모든 창작자가 필수적으로 거치는 과정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에 자작 소설이나 스토리를 짜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심지어 프로가 되어서도 이런 식의 주인공을 잘 만들어 인기를 끄는 작가도 많다.) 일반적으로 숙달된 창작자가 되기 전에는 자기 자신의 작품에 대한 객관화가 어렵기 때문에, 그 속에 과도하게 자신이 투영될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점점 숙련되며 주인공과 자신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두게 되고, 세계관의 법칙을 지키면서도 내용을 재미있게 꾸려나가는 법을 알게 되고, 주인공에게는 메리수의 요란하고 어색한 화장보다 내츄럴하면서 매력을 잘 살리는 화장법을 입히는 법을 알게 되며 차차 성숙한 작가로, 성인으로 성장해가는 것이다. 따라서 비툴 커뮤니티의 '자캐러'든 무협 소설의 주인공이든 메리수의 형제자매들은 어디서나 자연스럽게 범람하고 있다. 그것이 원작이 있는 세계관이든, 창작된 세계관이든 말이다. 물론 앞서 언급했듯이 다수의 팬들이 특정 작품의 세계관에 대한 애호를 공유하는 팬 공동체의 경우 일명 팬심적인 '소유권'이나 '캐릭터 강간' 등의 문제에 대해서 메리수 캐릭터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 여전하긴 하지만, 역으로 그만큼 메리수를 원하는 독자도 많기에 지속된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정말 치가 떨리게 싫으면 피하거나 안 보면 되고. TV 광고도 아니니 그 정도의 선택권은 있지 않은가.) 또한 플레이어가 직접 조작하는 게임같은 매체의 경우, 주인공이 게임 속 세계에 대해 메리수스러운 영향력이나 비중이 부족하면 이입도와 재미가 크게 떨어지니, 매체에 따라서는 오히려 매우 유용하지 않을 수 없겠다. 온갖 이성(혹은 동성)을 사랑의 포로로 만드는 연애시뮬레이션 게임이나 사람들의 칭송과 도움을 받으며 세계를 구하는 RPG 게임이나 주인공이 갈 수록 어마어마하게 강해지는 액션 게임이 소설이나 만화로 만들어지면 대체로 재미가 없어지는 이유가 극도의 메리수스러움이 게임에는 자유롭게 허용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얼마나 메리수스럽게 만드는가-게임 내에 영향력을 행세할 수 있는가가 관건이랄 수 있겠다.) 이렇게 메리수는 버릴 수도 무시할 수도 없는, 모든 창작자가 거치는 사춘기이자 원형이며 어느 시점에서는 훈훈하게 되돌아볼 수 있는 추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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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바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