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2013. 6. 28. 22:22

가장 최신 슈퍼맨 영화인 <맨 오브 스틸>은 흥행성적에도 불구하고 평은 적잖이 갈리는 영화입니다. 특히 해외사이트에는 기존 슈퍼맨 작품들의 팬들을 중심으로 영화 마지막의 어떤 문제적 진행에 대한 논란이 끊이질 않습니다. 이들이 어떤 지점에서 불편함을 느꼈는지, 슈퍼맨의 핵심적 가치는 무엇인지에 대해 정확히 짚어낸 코믹스 얼라이언스 기사가 있어서 번역해 보았습니다. 원문은 이곳입니다.


당연하지만 스포일러가 잔뜩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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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설] 선택과 <맨 오브 스틸>의 도덕적 세계관
앤드류 윌러


슈퍼맨은 다른 (슈퍼)히어로들과 다르다. 그는 최초의 슈퍼히어로 중 한 명이고, 장르 자체를 정의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중에서 최고이기도 하다. 여기서 "최고"라는 것은 도덕적 의미의 최고를 말한다. 현재 우리가 이해하는, 우리의 문화적 사전 안에 존재하는 죠 슈스터제리 시겔의 창작물은 영웅적 미덕의 이상을 상징한다. 하지만 그런 관점은 잭 스나이더의 신작 영화 <맨 오브 스틸> 이후 바뀔지도 모른다. 



이하 내용에는 <맨 오브 스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다.


마지막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슈퍼맨과 조드 장군의 마지막 대결은 상당한 논란을 야기했다. 조드가 무고한 사람을 죽이려고 하고, 자신을 막지 않으면 모두를 죽이겠다고 맹세하자 슈퍼맨은 조드의 최후통첩을 받아들여 그의 목을 꺾어버림으로써 싸움을 끝낸다.

어떤 사람들은 이 장면을 보며 "슈퍼맨에게 달리 방법이 있었겠나?"라고 물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은 그 밖의 대안을 내놓을 수도 있다. 유용한 대화는 아니다. 흔해빠진 "누가누가 이길까?"식 논쟁이니까. 답은 언제나 같다: 결과는 작가에 의해 정해지고, 이야기는 그 결과을 위해 바뀐다는 것이다. 슈퍼맨은 다른 선택이 없어서 조드를 죽인 것이 아니라, 스토리를 짜는 사람들이 그것을 바랬기 때문에 죽인 것이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2대 1로-*역주: 크리스토퍼 놀란은 처음에 슈퍼맨이 살인하는 것에 극렬 반대했는데, 스나이더와 고이어가 강력하게 추진했다는 내용.)

이 선택은 많은 것을 드러낸다. 즉, 감독 잭 스나이더와 각본가 데이빗 고이어는 슈퍼맨에게도 살생이 필요한 때가 있다고 설정하고 싶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이런 삭막한 메세지야말로 현대 픽션에서 가장 도덕적인 캐릭터 중 하나를 이용해 전달하기에 적합한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슈퍼맨은 살생할 수 있는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을 생각해볼 수는 있다. 실제로 전에도 있었던 전개니까. 하지만 내 생각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명 보존의 명제에 관해서는 슈퍼맨을 한 극단에 위치시킬 것 같다. 슈퍼맨이 한 생명을 위해 다른 생명을 끝내야 하는 순간은, 이야기 전체가 그 순간을 성립시키기 위해 비틀어져야 할 정도로 막대한 무게감을 지녀야 한다. 나는 고이어와 스나이더는 <맨 오브 스틸>에서 그 순간을 획득해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러분은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이것은 우려스러운 선택이다. 왜냐면 영화는 그 밖의 도덕적 메시지조차 전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진리나, 정의, 영웅적 행위, 희생, 희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희망이 언급되기는 한다. 슈퍼맨의 가슴의 글자가 "희망"을 뜻한다고 하지만, 나는 영화 어디에도 희망이라는 이상을 보여주는 장면을 전혀 떠올릴 수 없었다. 영화 마지막에 폐허 속에 서 있는 캐릭터들은 희망보다는 암담한 인내력을 보여주는 것 같다. 마지막 부분에 목에 망토를 두르고 바깥에서 노는 어린 클라크 켄트의 모습이 잠깐 비춰지긴 한다. 언뜻 희망적으로 보이는 장면이다. 하지만 그것은 모든 것이 망해버리기 전의 과거에 있던 일로, 희망은 나이브한 것임을 제시하기도 한다.

어린 클라크 켄트가 그 망토를 둘렀을 때 무슨 흉내를 내고 있었냐고 질문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놀이는 슈퍼히어로 흉내를 낼 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최초의 슈퍼히어로는 슈퍼맨이다. 그럼 어린 클라크는 아라곤 흉내를 내는 건가? 아니면 헤라클레스? 오페라의 유령? 아니면 이 세계에는 마블코믹스가 존재해서, 토르 놀이를 하는 건가?

이 질문을 제시한 이유는 말장난이 아니라, 저 장면이 영감을 주는 존재로써의 슈퍼맨에 대한 제작자들의 불완전한 이해력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이 슈퍼맨은 우리가 우러러볼 대상이 아니다. 내가 관람할 때 슈퍼맨이 조드를 죽이는 장면에서, 그곳에 있기에는 너무 어린 여자아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저 아저씨 눈 왜 안 움직여요? 왜 저 아저씨 안 움직여요?”

그것은 즉각적으로 불편한 고통의 순간이었다. 이 소녀는 망토를 걸치고 이 버전의 슈퍼맨 흉내를 내지는 않을 것이다. 나 역시 어떤 아이라도 이 슈퍼맨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스나이더와 고이어는 사람이 망토를 두르고 정원에서 뛰어다닐만한 영감을 어디서 받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 세계에서는 누군가 망토를 줬기 때문에 망토를 두를 뿐이다. 


이 영화 속의 슈퍼맨은 영웅이 아니라 골칫거리다. 이 영화는 슈퍼맨이 우리 별에 오지 않았더라면 모든 인물들의 처지가 더 나았을 것이고, 수 천명의 사람들이 죽지 않았을 내용이다. 이런 것을 희망의 메시지라고 보기는 어렵다. 만약 제작자들이 조드가 전부터 지구를 노리고 있었고, 죠-엘은 그것을 막으려고 아들을 보냈다는 내용으로 썼다면, 이야기의 중심에 절박함과 복수 대신 영웅적 행위가 존재했을 것이다. 슈퍼맨은 문제가 아닌 해법이 되었을 것이다.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들은 비슷하게 진행되지만, 모든 사건에 도덕적인 무게가 주어질 것이다. 그러나 제작자들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슈퍼맨의 도덕관을 지탱하는 큰 기둥 중 하나는 양아버지인 죠나단 켄트다. 이 영화는 죠나단에게서 그 역할을 제거해 버린다. 대부분의 버전에서 클라크 켄트는 정직하고 선한 양부모에게서 자신의 가치관을 배운다. 이 영화의 죠나단은 거짓말을 가르친다. 타인의 생명보다 자기보존을 우선하도록 가르친다. 여기에는 진리도 정의도 없다. 희생은 있지만, 전혀 영웅적이지 않다. 파 켄트(*역주: "파"는 사투리로 "아빠," 클라크가 죠나단을 부를 때의 호칭임)는 자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고집을 부리다 죽는다. 우리는 슈퍼맨의 전제가 그에 의존하기에 파 켄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안다. 파 켄트는 도덕적인 길잡이가 될 수도 있었지만, 제작자들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켄트 부부는 클라크에게 영웅이 되라고 하지 않았기에, 영웅 되기는 클라크의 가치가 되지 못한다. 그 가치는 유령판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페이퍼클립같은 친아버지에 의해 주입된다. 제작자들은 슈퍼맨의 도덕적 뿌리를 지구가 아닌 크립톤에 둠으로써, 슈퍼맨이 인류가 구원받을 가치가 있다고 믿는 근원적 이유를 앗아간다. 이런 오리진 스토리는 인류가 근본적으로는 선하다는 관념을 어디에서도 보여주지 않는다. 제작자들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럼에도 슈퍼맨의 내재적 도덕심을 보여줄 기회는 여러 개 있었다. 도중에 클라크는 바다에서 막 걸어 나와 옷을 찾아 입어야 할 상황에 처한다. 옷을 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었고, 나중에 돌려주겠다는 등의 약속이 적힌 쪽지를 두고 가져갔을 수도 있었다. 그런 장면은 클라크카 도덕적으로 올바른, 무리를 해서라도 바른 행동을 하려는 사람임을 보여줬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클라크는 몰래 옷을 훔쳐서 달아난다. 제작자들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제작자들은 클라크 켄트의 근본적 선량함을 묘사할 수 있는 모든 기회에서 다른 방향으로 갔다. 누가 자신에게 맥주를 끼얹자 음험하고 보복적으로 행동하게 만들었다. 걱정하는 교사의 손에 화상을 입히게 해서 심술궂고 해롭게 만들었다. 말다툼 중에 자신의 가족을 부정하게 만들었고, 한 키스씬에서는 자신의 인간성을 부정하게 했다. “첫키스 이후로는 내리막길이라고 하던데요.” “인간들 경우에나 그렇겠죠.” (물론 농담이긴 하지만, 그을린 폐허 구덩이 위에서 솔직히 남이나 다름없는 사람의 얼굴을 빨면서 하는 농담이라는 점은, 그가 우리 중 하나가 아니라는 개념에 무게를 더한다.)

이런 묘사들을 별로 중요하지 않는, 사소한 것으로 치부할 수는 있다. 하지만 반면 핵심적인 “미덕의 묘사” 부분은 어떤가? 위의 행동은 우리 모두가 저지르는 잘못이고, 누구에게나 처음이 있었다고 반론할 수는 있다. 물론 사실이다. 슈퍼맨은 픽션의 어떤 캐릭터만큼이나 투명한 미덕의 귀감이지만, 클라크에게는 실수와 단점이 어느 정도 허용된다. 특히 망토를 두르기 전에는.

하지만 도중에 우리는 그의 도덕적 가치가 무엇인지 봐야 한다. 우리는 클라크가 믿는 것, 선택하는 것을 드라마적인 묘사로 볼 수 있어야만 한다. 이 영화는 주어진 모든 기회에서 그런 묘사를 피한다. 클라크가 술집에서 싸움을 피하는 것도 폭력이나 보복행위를 피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튀는 것을 피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비를 건 상대의 사유물을 파괴함으로써 폭력과 보복을 달성한다.

이 슈퍼맨은 결코 도덕적이지 않다. 연민이나 양심도 보이지 않는다. 파괴행위가 인구 집중지역을 피해가도록 유도하지도 않으며 인류와 어떤 유대감을 맺지도 않는다. 구해줄 사람들을 찾아 세상을 여행하는 대신, 눈 앞에서 불 타 죽기 직전쯤 되야 사람을 구하는 내성적인 은둔자다. 그만큼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기대되는 수준에서, 문자 그대로 최소한만을 행한다. 그는 영웅이 될 수 없다. 또 다른 하늘 위의 아버지인, 영원히 캔사스와 오즈 사이 어딘가에서 날려다닐 죠나단 켄트가 가르쳐준 보신주의에 얽매여있기 때문이다. 


제작자들은 전체적으로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도덕적인 가치를 주입할 수 있었다. 클라크의 내성적인 면을 유지시키되 도시전설로써의 측면을 강조할 수도 있었다. 망토나 코스츔 없이, 세상을 떠돌며 놀라운 힘과 용기로 생명을 구하는 슈퍼맨으로써 말이다. 이것이 애초에 로이스 레인을 슈퍼맨에게 끌어들인 이유였다. 하지만 로이스의 조사에는 단지 두 가지의 영웅적 행동만이 참고자료였다. 그녀는 어떤 “슈퍼맨”에 대한 도시전설이 아니라, 빅풋을 따라 UFO로 들어가서 슈퍼맨에 대해 알게 된다. 


만약 클라크가 아버지의 조언을 무시하고 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켜왔다면, 같은 진행이라도 다른 도덕적 중심을 지닌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조드가 지구 사람들에게 “슈퍼맨을 내놔라.”고 했을 때 사람들은 “그럴 수 없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왜냐면 세상에는 그런 “슈퍼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희망과 영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작자들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영화의 예수 이미지 집착에 대해 말이 많지만, 사실 팔을 벌리는 것만으로는 구세주가 될 수는 없다. 영화는 기독교와 전혀 관련성이 없고, 나자렛 색깔을 좀 빌려왔을 뿐이다. 예수는 목을 꺾어버리거나 도시를 파괴하지 않았다. 예수는 어디를 봐도 상당히 괜찮은 친구였다. 예수의 이야기는 연민과 희생에 대한, 완전한 도덕적인 슈퍼히어로 이야기다. 그는 남의 트럭을 테러하려고 외딴 마을의 전깃줄을 뜯어내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히어로도 있다. 나는 문제의 목 꺾기 사건 한참 전부터 클라크 켄트의 모든 선택이 울버린같은 히어로가 할만한 선택이라고 느꼈다. 울버린은 사람을 싫어하고 쪼잔하고 음울하면서 그걸 다 간지나게 보이게 하는 캐릭터다. 하지만 울버린은 구세주는 아니다. 울버린은 귀감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 “울버린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라고 쓰여진 팔찌를 차고 다니진 않았을 것이다.

히어로들은 각자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각자 다른 이야기를 전달한다. 대부분의 관객에게 슈퍼맨은 정의로운 영웅이고, 이 점을 탐구하지 않는 이야기는 슈퍼맨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맨 오브 스틸> 제작자들은 슈퍼맨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에는 큰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슈퍼맨의 이름은 제목에도 나오지 않는다. 작중에 처음 그 이름이 언급될 때는 간신히 기어나오는 느낌이다. 이름이 큰 소리로 제대로 읊어질 때, 대사를 말하는 병사는 스나이더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그 이름에 “전혀…좋은 인상을 받지 않는다.” 캐릭터의 가슴에 있는 “S”는 사실 알파벳 “S”가 아니다. 영화는 단 한번도 “슈퍼맨”이라는 단어를 자랑스럽게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에 악당은 슈퍼맨을 파괴해버린다. 악당이 승리한 것이다. 조드 장군은 라라 로-반의 아들을 찾아내겠다는 맹세를 지키고, 비록 크립톤을 자신의 뜻대로 부활시키는 데에는 실패하지만, 슈퍼맨을 이용해 자살하겠다는 목적은 달성한다. 조드는 왜 슈퍼맨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부추겼을까? 그것은 자신의 라이벌인 고결한 죠-엘의 마지막 유산을 타락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조드는 칼-엘의 영혼에 지울 수 없는 흠집을 내고자 했다.

조드 때문에 슈퍼맨은 절대로 위대해질 수 없다. 절대 어떤 귀감이 될 수도, 슈퍼맨이 될 수도 없다. 자신이 쌓아온 시체의 산 위에서는, 그 오랜 기간 동안 인류에 대해 그토록 무심했던 전력으로는, 끔찍하게 부러지는 뼈의 소리로 우리 별에 자신의 존재를 알린 시점에서는 불가능하다.

이것이 스나이더와 고이어가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다. 그들은 나름 타당한 선택을 했고, 이 버전의 스토리와 캐릭터를 즐기는 관객도 있다. 이 버전의 슈퍼맨이 좋다고 말해서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영감을 주는 존재로써의 슈퍼맨을 원한다고 주장하면서 "이것이 나의 슈퍼맨"이라고 한다면 나는 놀랄 것이다.

슈퍼맨에 대한 가장 유명한 문구 중 하나는 죠지 리브스가 주연한 1950년대 TV 시리즈 <슈퍼맨의 모험> 오프닝에서 나온다. 한 남자가 외친다: “저기! 하늘을 봐! 새야!” 이제 와서 식상할 정도로 반복되었으니, 그 뒤의 대사는 다들 알 것이다. 지금 와서는 그 문구에 진부하지 않은 오마쥬를 바치기 어렵다. 하지만 그 안에는 핵심적인 요소가 있다. 많은 팬들에게 있어 슈퍼맨은 경외심을 가지고 우러러보게 되는 존재다. 이 말은 은유가 아니다. 그는 정말로 우리 위에 있다. 그는 모범적이다. 그는 훌륭하다.

그 누구도 경외심을 품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맨 오브 스틸을 바라보지는 않을 것이다. 화면 속에서 드러났듯이, 이 사내는 우리 중의 최선을 대표지도 않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상도 아니다. 고이어와 스나이더의 선택은 그의 도덕적 힘을 벗겨버리고, 우리에게는 적절한 순간이라도 살인하지 않을만큼 순수하고 선한 사람은 없다는 메세지를 남겨준다. 맨 오브 스틸은 미덕의 귀감이 아닌, 죽음과 학살의 상징이다.

만약 당신이 하늘을 나는 사람을 본다면, 놀라며 경외감에 손가락으로 가리키지 말아라. 대신 비명을 지르며 숨을 곳을 찾아라. 이제는 누구도 당신을 구해주지 못한다. 


Posted by 시바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