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온라인 생활이 바빠 오프라인 활동이 느려지는...좋은 의미로 바쁘면서도 (드뎌 일시적이나 용돈벌이가 가능T_T) 뉴스 땜에 마음도 싱숭생숭한데다 안 좋은 그런 상태 지속중입니다.
대신이라기엔 뭐 하지만 최근에 읽은 책 감상이나 짤막하게....
동생 위부인이 제가 동네에 북오프가 있다고 하니 [고독한 구르메]라는 만화가 복간되었는데 웬 아저씨가 일본 전국을 돌며 맛있는 걸 먹는 그런 내용이라고 일본에서 요즘 히트라고 (대체 일본 만화 블로그를 얼마나 돌아다니면...일본에 있는 나보다 더 잘 아는거냐...) 했습니다. 정작 북오프에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아서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몇일 전 학교 앞 서점에서 잡지를 구입하다가 카운터 바로 앞에 문고판과 그보다 더 두껍고 판형도 큰 신장판 발견...하고 바로 사지는 않았지만 금요일 밤 수업 끝내고 오면서 빈궁한 유학생이라 비싼 신장판은 어렵고 문고판을 사 전철에서 읽었습니다.
보면서 깨달은 것은 동생의 설명이 맞기도 하지만 틀리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일단 주인공 아저씨가 일본 전역(이라해도 주로 도쿄지만...)에서 밥을 사먹는 것이긴 하지만 들리는 이미지처럼 한가하게 전국 식도락여행을 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정확히는 자영업 세일즈맨 이노카시라가 업무 중 어쩌다가 들른 지역에서 마침 배가 고프길래 먹는, 각 화 10페이지로 끝나는 형식의 만화입니다. (10페이지라고 해도 작화가인 다니구치 지로 특유의 꼼꼼하고 세밀하고 사실적인 작화 덕분에 상당한 무게감이 있지만...) 식당이 있기에 그곳에 간다라기보다는 그곳에 마침 식당이 있어서 먹었다는 느낌이 강하지요. 물론 예전 맛집을 기억해서 찾아가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도 '마침 그 장소에 있어서' 찾아가는 것이지 궁극적인 목적지가 아닙니다. 이 만화에서 식당은 이노카시라의 '여행길'에 잠시 들른, 배를 채우고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한 휴식처라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식당의 이름이나 약도가 구체적으로 소개되지도 않고 꼭 그 정도로 눈돌아가게 맛있는 집만 나오는 것도 아니고 맛집탐방 정보를 기대하고 산 분들에겐 실망스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원래 생활 속의 먹거리라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닐까요?
물론 그렇다고 이노카시라가 먹는 행위나 맛 자체를 소홀히 하고 소화만 되면 다 똑같다는 식으로 넘기는 아저씨...였다면 제목에 [구르메]가 붙었을 리가 없구요^^; 실제 맛있고 양도 좀 되는(!) 음식을 선호하고 여건이 허락하는 한에 맛있는 것을 먹고 싶어하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모르는 가게에 들어가기 쭈뼛해하고 과자가게에 남자 혼자서 들어가면 좀...이러며 소심하게 눈치 보는, 적잖이 공감이 가는 평범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의 특징이자 매력이 바로 이런 이노카시라의 성격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리얼리티'라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오갈 법한, 내용하고는 하등 상관없는(하지만 '분위기'를 묘사하는 기능적 도구로써는 매우 중요한!) 다른 손님들의 시시콜콜한 대화, 먹고 싶어하는 메뉴를 제대로 먹지 못하거나 재료가 겹치는 요리를 골라 실패...라고 중얼거리는 세세한 '어긋남'이, 평범한 동네 밥집을 포함해 편의점 야식까지 구르메의 식사로 만드는 리얼리티의 힘입니다. [그곳에 있기에 그것이 맛있었다]는 감각이라고 할까요. 음식의 맛과 양도 중요하지만 리얼리티의 영향으로 그만큼 중시되는 것은 바로 먹는 '공간'입니다. 일본의 유수한 음식만화가 지금까지 크게 간과하고 있던 치명적인 부분이기도 하구요. 물론 가게 분위기가 어쩌니 인테리어가 어쩌니 하는 단편적인 거론은 있지만 그것을 [고독한 구르메] 수준으로 세심하고 구체적이고 생동감 있게 살려낸 것은 아마도 없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렇다고 [맛의 달인]같은 순수하게 음식 그 자체를 추구하는 만화가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고독한 구르메]는 먹는 행위에 있어 '공간'의 중요성을 최대한으로 증폭해내고 완성해낸 만화라는 점입니다. 그만큼 다양한 공간(식당이 아닌 경우도 많습니다!)이 주는 생생함, 공기, 그에 영향받는 주인공의 미묘한 감정이 마치 독자가 그곳에 있는 듯한 현장감마저 느끼게 하고, 그만큼 각 공간을 독특하고 일종의 의미있는 것으로 자리매김합니다.
또한 주인공의 입장상 독자로써도 이입하기 쉬운 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오로지 맛집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먼 동네나 지방까지 여행하고, 항시 인터넷과 잡지 등을 통해 철저히 맛집 체크를 할 정도의 '독한' 매니아급 구르메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렇다고 그 정도의 식도락가가 아닌 사람이라고, 맛있는 것이 싫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사실 아마도 숫적으로는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맛있는 것이 좋기는 하나 매니아 정도로 맛집을 찾아다니는 여유 또는 여력이 없는 사람들이고, 주변에, 그리고 마침 들른 모르는 동네에 맛있고 포만감을 채워주는 식당을 어쩌다가 만나면, 그것만으로도 충만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맛난 밥 한 그릇이 인생이라는 여행길에 지친 기력을 되살려주고 다시 길을 나설 수 있는 소중한 '인연'임을 각인시키는 만화, [고독한 구르메]입니다.
덧1. 다니구치 지로의 작품이 점점 국내에 소개되는 중이니 이것도 곧 번역될 듯도 합니다.
덧2. 이노카시라는 [맛있는 건 좋아하지만 술은 못하는] 점이 공감이 느껴지더군요~ 좀 귀여운 아저씨고 가게 분위기 살피고 눈치 보고 엉겹결에 따라서 주문해버리는 소심함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합니다.
덧3. 오오사카편을 보면 왜 관동 사람들이 관서 사람을 어려워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물론 그래도 오오사카 사람들...참 재미있습니다^^ 카와사키편은 보면서 당혹감과 동시에 부러움(?!)에 몇번이나 [푸핫...이 아저씨 대낮부터 뭐 하는거야!]를 연발했는데 일본웹의 반응을 보면 저만 그런 게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하핫.
소년애(少年愛) 장르의 원조, 즉 야오이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다케미야 케이코의 [바람과 나무의 시].
시기적으로는 하기오 모토의 [토마의 심장]이 먼저 나왔지만 정신적인 사랑에 가까웠고
하기오 본인도 인정하듯 그녀를 남남물에 끌어들이고 육체적인 소년애를 부각시킨 것은 바로 다케미야.
뭐 그런 것만이 아니라 심리묘사 등의 연출에서도 일본만화 연출사에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작품인데...
사실 이미지 상으로는 남자 기숙사 배경의 응응응 하는 삐리리 내용이라는 편견이 있지만,
정작 안을 들여다보니 그 정체는 사실.........
무협물이었다.
그 증거로 화려한 무술연무를 자연스럽게 일상동작으로 화한 질베르를 봐라!
때는 19세기 말, 불란서국 남부의 낙혼부라도 (落魂不羅道) 학원.
불란서국은 십수년전 보불전쟁에서 큰 타격을 입고 젊은이들의 무술수행에 힘을 쏟고 있었다.
그러한 낙혼부라도는 대체 어디서 배웠는지 사파(邪派)의 요술과 암기를 사용하는 질베르에 의해
혼란에 휩싸여 학생들의 기강에 애로사항의 꽃밭을 이루게 했다.
보다못한 B클래스의 지도생인 칼이 질베르를 저지하려고 했으나,
되려 질베르의 다크사이드 빠와~ 언리미티드 빠와에 호되게 당해 간신히 목숨만 건지고 도망쳤다.
이대로 과거의 명문, 낙혼부라도는 똥통학교로 전락하는 것인가?
모두가 희망을 버리려던 찰나, 폭풍우와 함께 한명의 전학생이 찾아온다.
그의 이름은 세르쥬...과거 낙혼부라도를 비롯해 전 구라파 무림 최고의 고수였으나,
밀교의 여인과 사랑에 빠져 사랑의 도피를 한 후 행방이 묘연했던 아스란의 외아들이었던 것이다.
낙혼부라도의 사람들은 세르쥬 소년에게 새 시대의 희망을 본다.
그야말로 질베르를 쓰러뜨리고, 학교에 평화와 영예를 되찾아줄 것이라고...
물론 질베르도 호락호락 당하고 있지많은 않았다.
비열하면서도 무시무시한 암기를 사용해 세르쥬를 위기에 빠뜨린다.
이 장면에서 보다시피 독을 바른 암기가 심장 주위에 맞아 세르쥬는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세르쥬는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가 물려주신 육중한 건반의 피아노로 수행한 몸으로
타고난 재능도 더해 다져진 악력과 내공이 비범하였으며 사실 심장이 오른쪽에 있는 선택받은 몸이라
질베르의 치명적인 공격을 이겨낼 수 있었고 바로 다음 순간 막강한 반격을 행한다.
바로 전설의 변호사가 가르쳐준 비술 [찌르기]와 [증거 제시] 양 기술을 합친, [이거나 처먹어라!]....
질베르는 패배감에 전신을 부들부들 떨고, 이들의 대결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데...
......라는 건
물론
당연히
뻥
제가 아무래도 뭘 건전하게 만드는 재주는 있는 것 같습니다.
어디 사전검열이 철저한 나라에나 취직할까...
농담이고 사실은 매우 진지하고 위험한 내용이고
사실 너무 길어서 다 사지도 못했고 아직 문고판 2권까지밖에 안 읽었지만
그리고 대작, 명작인 것은 알지만 그래도 보다보면......
막 웃음이 멈추지 않아서 미치겠어요 ㅎㅎㅎ
아니, 대체 같은 시대에 비슷한 배경에 소재라도 [토마의 심장]은 진지하게 봤는데
[바람과 나무의 시]는 왜이리 뿜는지...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뿜습니다.
어쩌면 [거인의 별]과 [내일의 죠]의 차이같은 거 일지도 모르겠군요...
아니 그러니까 왜 웃기냐하면...
마 이런 장면이 줄기차게 나오는데 안 웃고 배기겠어요 ㅎㅎㅋㅋㅋㅋㅋㅋㅋㅋ
나름 생각해 봤는데 [토마의 심장]은 아예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문제를 다루는 반면,
(물론 육체적 폭력에 대한 소재도 중요하지만 결국 육체적인 점 자체보다는 폭력이 정신에 끼친 영향이 더 메인)
[바람과 나무의 시]는 사실 까놓고 보면 적나라한 육체관계를...70년대식에다가 시적인 연출로 그리니까
그 동안 통 포스팅을 못하다 보니 썰렁한 블로그....뭐 간혹 피땀을 주입한 포스팅을 해도 찬바람 불 때가 더러 있으니 그다지 새로운 현상은 아닙니다만 그만큼 방문객들이 하이클래스하고 쿨하고 쉬크하시다는 의미지요☆
그래도 포스팅하지 않는 돼지는 그냥 돼지일 뿐이라는 옛 말이 있듯이 근황이 아닌 포스팅을 해보겠습니다.
....사실 얼마 전에 구입했으니 어떻게 보면 근황이지만...
아무튼 요전에 동네 북오프에서 산 하기오 모토의 [마지널], 문고판으로 전 3권입니다.
이 만화는 해적판을 본 친구가 귀뜸해준 기억은 있는데 [남자밖에 안 태어나는 나라에서 남자 두명이 수수께끼의 미소년을 만나 사막을 여행하는 이야기]라고 했습니다만 아주 틀린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맞다고는 하기 좀(...)
어쨌든 남자밖에 태어나지 않는 세계관이 배경이기는 합니다. (단 동물은 암수가 있습니다.) 이 세계에는 단 한명의 '마더'라는 존재가 출산을 전담하여 숭배의 대상이고 나이가 찬 남자는 '도시'를 찾아가 '마더'에게 아이를 받아 키우며 사회가 유지됩니다. 그런데 몇년 전부터 아이의 수가 급감하고 세계에는 망조가 보이며 사회는 혼란에 휩싸입니다. 이러던 와중 멸망해가는 부족의 남자 그린쟈는 사막에서 기억을 잃은 금발의 소년을 발견합니다.
사실 줄거리를 여기까지만 설명하고 싶을 정도로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만화입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그린쟈의 시점에서 진행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린쟈가 주운 소년인 키라, 키라를 구입한 성질머리 급한 청년 아시진, '도시' 시장의 어린 아들, 하늘에서 떨어진 여행자, '마더'를 관리하는 메디컬 센터의 장관 등 다양한 입장에 처한 인물들의 눈을 통해 이 세계와 키라의 '진실'에 근접해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방대한 스케일과 적절한 균형감각은 데즈카 오사무 계통의 초기 스토리만화가 연상되는 형태로 다양한 사건과 모험이 벌어져 박진감이 넘치지만 동시에 적절한 페이스로 쉬어가면서 캐릭터들의 내면을 비춰내고, 또 그것이 내용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소녀만화적 감성과 섬세함도 갖추고 있기에 누구에게나 적절하게 추천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하선생 작품이라도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는....18금이고...어른이 봐도 대미지를 입을 수 있음.)
특이한 점은 여성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데도 근본적으로는 여성, 여성성에 대한 탐구라는 점. 다음이 궁금한 SF모험물이라는 장르를 취하면서도 동시에 젠더에 대한 상당히 심오한 철학을 담고 있습니다. 이거랑 우테나면 완전 젠더학, 여성향 개론 참고교본으로 써도 되겠다 정도. (오오...근데 그런 강좌 만들면 아무리 우리나라에서 인기 없는 젠더학이라도 나름 히트칠지도. [만화, 애니로 배우는 젠더학 개론]. 문제는 제가 그 쪽을 잘 모른다는...) 그리고 전체적으로도 작가의 균형감각이 상당히(!) 뛰어나서, 비단 앞서 말한 다중 시점의 밸런스 뿐만 아니라 세계관에 대한 감각 면에서도...예를 들면 이 세계의 인간들은 과학이 뒤쳐져있고 미신을 믿는 등 메디컬 센터의 (사실은 다른 우수한 과학력의 문명에서 온) 직원 및 그들 세계의 인간들이 보기에는 한없이 한심하고 미개하지만, 그들 나름대로의 직관과 행동력이 때로는 이성과 계산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센터 인간들보다 더 적절한 판단을 내리게도 하며 멸망해가는 상태를 어떻게든 극복하려고 합니다. 센터의 인간들도 사실 이런 식의 이분법적 인류가 존재하는 내용의 경우 과학맹신, 물질만능주의에 빠진 대체로 인정사정 없고 비인간적인 존재로 묘사될 가능성이 많은데 [마지널]에서는 과학력이 뛰어난만큼 당연히(!) 문명적으로도 발전한 사회라서 매우 합리적이고 조금 미묘한 듯 하지만 인권의식도 상당히 발달해 있습니다. 그 편이 사실적이기도 하구요.
아무튼 순식간에 읽어내리면서 읽은 후에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만화였습니다. 마무리도 정말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어서 좋더군요. 원서 읽으실 수 있는 분이면 서울역 북오프에 들어오는 걸 구하는 것도 괜찮을듯.
The Comics Journal 269호에 기재된 하기오 모토(萩尾 望都) 인터뷰입니다. 요즘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가 정식으로 출시되면서 하선생(^^;)님에 대한 관심이 증가되는 대세를 타는 것...도 있지만 컴퓨터 앞에 내내 붙어있다 보니 괴로워서 조금은 현실도피로 올리게 되었습니다. 출저는 일본 교토 세이카 대학교 만화학과에서 강의하는 미국인 인류학자 매트 손(Matt Thorn)의 홈페이지로 인터뷰도 매트 손이 담당했습니다. 사실 이분과도 지인 사이라 웬만하면 허가를 받고 올리고 싶었지만 작년부터 연락이 통 안되고 있어서(...) 문제가 생기면 삭제합니다.
원래 지면에는 인터뷰에 앞서 하기오 모토에 대한 굉장히 상세한 소개가 곁들여져 있는데 너무 길어서 우리나라에는 지식즐이라는 것이 있고 또한 미국과는 달리 하선생님 작품이 최소한 하나 정도는 정판으로 소개되고 있으니 생략합니다. 또한 주석도 일본 만화 및 문화에 익숙하지 않을 미국 독자를 위해 엄청나게 많이 붙어있고 상세히 설명되어 있지만 국내 실정을 고려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만 설명을 덧붙이겠습니다. 주석의 경우는 대상 독자가 다르니 번역보다는 제가 직접 쓰는 게 효율적일 듯해 그렇게 씁니다. 이미지도 제가 독자가 지겨워서 돌아가시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멋대로 도중도중 끼워 넣은 것으로 원문에는 없습니다.
인터뷰에 앞서 하기오 모토에 대해서 소개를 하자면 1949년 5월 12일생으로 황소자리 O형입니다. 모토라는 독특한 이름은 의외로 본명(!)으로 클래식을 좋아하던 부친이 모차르트의 ‘모’와 ‘트(일본어로는 ‘토’)’를 따서 지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소녀만화에 SF, 판타지, 코메디, 호러, 스릴러, 소년애 등 다양한 장르 및 소재를 접목시켜 치밀한 심리묘사와 탁월한 연출로 일본 소녀만화 역사에 있어 중요한 인물입니다. 대표작은 [토마의 심장], [포의 일족], [11인이 있다!], [이구아나 소녀],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 외 다수 있습니다. 쇼가쿠칸 (소학관) 만화상, 데즈카 오사무 문화상, 일본 SF 대상 등의 수상경력이 있습니다.
인터뷰는 2004년 12월 6일, 도쿄 외곽 한노시(市)의 하기오의 (상당히 넓은) 자택에서 진행되었습니다. 동거인이자 매니져인 죠 아키코도 당시 같이 있어 가끔 발언하기도 합니다. 인터뷰어인 매트 손과 하기오가 같은 세이카 대학에서 강의해 서로 친분이 있는 만큼 상당히 스스름없는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 재미있습니다.
매트 손: 그럼 가장 처음부터 시작하겠습니다.
하기오 모토: 좋아요.
손: 1949년 5월 12일에 태어나셨으니까, 저와 생일이 같으시네요?
하기오: 맞아요. 플로렌스 나이팅게일도 5월 12일생이었죠.
손: 후쿠오카현 오오무타 시 출신이시구요.
하기오: 그렇죠.
손: 어린 시절 얘기를 해주질 수 있을까요?
하기오: 네. 어린 시절이라...
손: 아버님께선 광산회사에서 일하셨죠?
하기오: 예. 오오무타는 탄광도시고 화학회사도 몇 개 있죠. 아버지는 석탄과 목재를 수송하던 항구에서 일하셨고, 초등학교 아이들도 전부 동네 점포나 광부의 자식이었어요. 우리는 베이비붐 세대라 한 반에 보통 50명은 되었죠. 한 학년에는 반이 대여섯 개나 있었죠.
손: 상당히 큰 학교였군요.
하기오: 그렇죠. 원래는 2층짜리 목재 건물이었지만 우리 세대를 수용하기 위해 몇 번이고 재건축했어요.
손: 4남매의 둘째셨죠?
하기오: 네. 언니, 저, 여동생, 남동생 이렇게 해서 4남매죠.
손: 형제 분들은 지금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하기오 웃음] 여쭈어도 괜찮을까요?
하기오: 물론이죠. 저희는 좀 모계랄까, 그런 느낌의 가족이었어요. 거의 여자애들만 태어났거든요. 언니는 결혼해서 남매 쌍둥이를 낳았어요. 형부는 후쿠오카현 야나가와 출신이고 지금 언니 부부가 거기서 시어머니를 모시며 살고 있죠. 여동생도 결혼해서...어디더라? 사이타마 현 끄트머리에 살고 있어요. 딸은 셋이고, 막내는 결혼했지만 첫째와 둘째는 아직 독신이고 직장에 다녀요. 남동생은 컴퓨터 회사에서 일했지만 우울증에 시달려서 2~3년 전에 그만두고 현재는 새의 사진을 찍거나 온천에 가면서 여유 있게 보내요.
손: 그렇군요.
하기오: 그리고 저는 결혼도 안하고 만화만 그리고 있네요. (전원 웃음)
손: 만화와 결혼하신 셈이군요.
하기오: 맞아요. 아, 고양이도 몇 마리 있죠. (전원 웃음)
손: 아주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셨죠?
하기오: 네, 그림 그리는 게 정말 좋았어요. 종이조각이 있으면 그렸어요. 광고지 뒷면, 포장지, 집안에 늘려 있던 얇은 B4 크기 종이에다 그렸어요. 두 장에 1엔짜리 종이였는데, 어머니에게 달라고 하면 주셨거든요. (웃음) 그러면서 그림 이야기를 그리고 놀았어요.
손: 당시에는 그림을 그린다는 것에 어떤 의미를 두셨죠?
하기오: 일단 모든 아이들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죠. 하지만 저는 좀더 열정적이었어요. 그림이 눈 앞에서 모양을 갖추어가는 과정을 보는 게 재미있어요. 선으로 그려진 그림, 만화의 세계요. 만화를 읽기 시작하면서 등장인물들을 좋아하게 되고, 관심을 가지게 되고, 직접 그려보기도 하고, 제 이야기를 만들기도 했어요. 놀이긴 했지만 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냈죠. 그래서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만화 전용 공책을 사서 별별 이야기를 다 그려 넣었죠.
하기오: 당시 (일본만화의) 상황을 이해하셔야 해요. 여자애들 만화를 보면 어머니인 줄 알았던 사람이 사실은 어머니가 아니고 (웃음), 친어머니는 다른 데 있다는 식의 이야기가 많았죠. 설정은 다양하게 있었어요. 예를 들면 가난한 아이는 사실 부잣집 아이거나, 부잣집 아이가 사실은 가난한 집에서 입양된 거라든가 말이에요. 그리고 가장 자주 사용된 장치는 기억상실증이었죠. (웃음) 똑같은 장치를 사용하는 한국드라마가 있더군요. 너무 자주 나와서 어쩌면 전쟁과 힘든 사회환경 때문에 사람들이 모든 걸 잊고 싶었던 무의식적인 바램이 있지 않았나 싶어요. 아무튼 여주인공은 친어머니를 찾아 떠나지만, 도중에 기억상실증에 걸리고 온갖 친절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게 되지요.
그 밖에 인기 있던 소재는 발레였어요. 한동안 소녀만화에서 발레가 붐이었죠.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주인공 소녀는 발레에 뛰어난 재능이 있지만, 재능 없는 부잣집 딸에게 주역을 빼앗기곤 했지요. (전원 웃음) 뻔한 이야기에서는 못된 여자애와 착한 여주인공이 뻔한 선과 악의 대결을 벌였죠. (전원 웃음)
아주 단순한 이야기였어요. 하지만 마키 미야코나 와타나베 마사코 같은 뛰어난 작가들은 그런 뻔한 이야기라도 재미있게 그려냈죠. 당시에 소녀만화를 그리던 여성 작가는 7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어요. 물론 남자 작가들은 많이 있었지만요. 특히 치바 테츠야의 소녀만화가 매우 좋았어요.
손: 치바의 첫 번째 연재작인 [엄마의 바이올린]도 그런 이야기였죠. 여주인공이 기억상실증에 걸린 어머니를 찾아 다니는 내용이었죠.
하기오: 네, 그리고 어머니는 딸의 바이올린 연주를 듣고 기억을 되찾구요.
손: 물론 여주인공은 온갖 고생을 다 하고서야 겨우 어머니와 만나죠.
하기오: 맞아요. 요코야마 미츠테루도 [말괄량이 천사]라는 소녀만화를 그린 적이 있는데 여주인공이 말괄량이였어요. 저는 그렇게 활발한 여주인공이 나오는 스토리가 좋았어요.
손: 하지만 전반적으로 당시 소녀만화 주인공들은 수동적이고 무력하고, 귀엽고 착하기만 했죠.
하기오: 네, 대부분은 그랬죠. 어쨌든 그림을 그리면서 “만화 친구”를 하나 사귀었고, 어느 날 친구가 제대로 된 만화책을 만들어보자고 하더군요. 하지만 아직 중1 학생들이라 정보도 없었고 하는 방법도 몰랐죠. 만화책을 보면 양면인쇄가 되어 있지만, 우리는 종이 양면에 그리면 안된다고 들었거든요. (전원 웃음) 게다가 다 그리고 나서야 칸을 칠 때 자를 대야 한다는 걸 알았어요. (전원 웃음) 우린 자 안 대고 그냥 그었거든요.
손: 당시에는 만화 작법에 대한 책이 많이 없었나요?
하기오: 네, 거의 없었죠.
손: 데즈카 오사무의 아카혼 판본인 [만화대학 (1950년 혹은 1968년 판본)] 정도였나요?
아카혼(赤本): 조악한 용지에 인쇄된 만화 단행본으로 주로 대여의 형태로 유통됨. 아카혼 출판사들의 대부분은 관서지방의 영세 출판사로 데즈카 오사무도 아카혼 만화를 그렸다. 60년대 만화 판매시장이 대두하면서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하기오: 네, 그리고 독자작품을 모집하는 아카혼에서 기초를 많이 배웠죠. 먹과 불투명 화이트, 까마귀 깃털펜을 사용할 것, 연필 작품은 보내면 안됨 뭐 이런 거요.
손: 그렇게 해서 배우셨군요.
하기오: 예. 그리고 저희는 원고 원본을 한번도 본 적이 없어서, 제대로 된 원고는 어떤 모양일지 궁금했죠. (전원 웃음)
손: 아카혼 만화책을 많이 읽으셨군요?
하기오: 당시에는 서점 외에도 책을 빌려주는 대본소가 많이 있었어요. 5엔이면 한 권을 빌릴 수 있었죠. 그래서 집안 일을 도와주고 용돈으로 5엔 받아서 책을 빌려보곤 했어요. 가장 무서운 책들은 우메즈 카즈오 거였죠. (전원 웃음) 정말로요. 누구한테 우메즈 만화가 좋다고 들어서 빌려봤는데 진짜로 무서웠어요. 그 책은 다른 작가들의 시리즈도 실려서 그 후의 전개는 어떻게 됐는지 모르지만, 무언가 기분 나쁜 것이 다가온다는 공포를 느끼게 했어요.
하기오: 제 언니가...정확히는 3학년 때부터 책을 빌려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교실 구석에 학생들이 읽고 난 낡은 책을 두는 책장이 있었는데 그 중에 만화가 좀 있었죠. 언니는 학년지(학년별로 출시되던 쇼가쿠칸의 학습잡지)를 사보곤 했는데 거기도 만화가 있었어요. 먼 친척이었던 여자분이 서점을 운영하셔서, 새로운 책이 발매될 때면 찾아가서 보여달라고 부탁했죠. 만화를 사는 건 1년에 한, 두번 정도였어요.
손: 정말인가요? 많이 사보진 않으셨군요?
하기오: 어머니가 만화를 싫어하셨거든요. 성적이 오르거나, 아무튼 뭔가 특별한 일이 아니면 허락을 안하셨어요.
손: 어머님이 만화를 싫어하셨군요.
하기오: 네. 어머니와 아버지는 만화를 너무 어려서 글을 못 읽는 어린애들을 위한 거라고 생각하셨어요. 그분들은 지금도 만화가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 믿으신답니다.
손: 아니, 아직도요?
하기오: 예. 정말 인간은 한번 심어진 생각을 떨쳐내긴 어려운 것 같아요.
손: 그렇다면 어머님은 하기오 선생님이 만화가가 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시는 거죠?
하기오: 무슨 미술선생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웃음)
손: 미술선생이요?
하기오: 아이들에게 과외로 그림을 가르치는 일 있죠? 그런 거라고 생각하세요. 마치 다도나 꽃꽂이 선생처럼요.
손: (웃음) 아니 그 수십년 동안에요? 선생님 작품을 보지는 않으셨구요?
하기오: 물론 보긴 보셨죠. 하지만 만화가를 직업으로는 못 보시는 것 같아요. (손 웃음) 저를 따라 편집부에 가기도 하고, 쇼가쿠칸의 연말 파티에도 오셨고, 제 단행본도 보시고, 작업하는 것도 보셨지만...도저히 이해를 못하세요.
손: 놀랍군요. 많이 힘드셨겠네요.
하기오: 네, 제가 서른이 될 때까지 계속 그런 일 그만두라고 하셨죠.
손: 정말입니까? (웃음) 서른이 되기까지요?
하기오: (웃음) 그나마 그만두신 건 저와 대판 싸웠기 때문이에요.
손: 그렇습니까? 30대에도? 쇼가쿠칸 만화상을 받으셨는데도?
하기오: 아,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었어요.
손: 상관이 없었어요?
하기오: 전혀요. 아, 상을 탔을 때는 딸이 상을 탔다며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니셨죠. 하지만 바로 돌아서서 만화따윈 관두라고 하셨어요. (웃음)
하기오 모토와 쇼가쿠칸 만화상: 1976년 [포의 일족]과 [11인이 있다!]로 제 21회 쇼가쿠칸 만화상 수상함.
손: 만화를 그만두고 어떤 일을 하라는 말씀이셨죠?
하기오: 좀더 지위가 높은 일이요. 이야기 만드는 걸 좋아하니 아동문학을 해보라던가, 텔레비전에 나오는 일은 어떠냐고 말씀하셨어요. 어머니와 아버지 마음 속에는 만화가는 가장 한심하고 저속한 직업이었고, 제가 언젠가는 그만둘 거라고 생각하고 계셨죠.
손: 어머님은 아직 살아 계신가요?
하기오: 건강히 계시죠.
손: 어머님 연세가?
하기오: 예순일곱 되셨어요.
손: 아버님은요?
하기오: 여든셋이요. 아버지는 젊으셨을 때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고 싶어서 수년 동안 지도를 받았고 회사 오케스트라에서도 연주하고, 나중엔 학생을 지도하기도 하셨어요. 그래서 아버님 마음 속엔 클래식이야말로 아름다움의 절정이고 다른 음악은 엔카든 포크송이든 비틀즈든 쓸모 없는 것이었죠. (전원 웃음) 그래서 부모님은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대한 기준이 뚜렷하세요. 만화는 나쁜 것이구요.
손: 그러니까 부모님은 선생님의 직업을 인정하지 않으신 거군요?
하기오: 그렇지요.
손: 그건 정말 힘드시겠군요.
하기오: 예. 하지만 사람마다 좋고 싫은 게 다 다르잖아요? 그건 어쩔 수 없는 거고, 최소한 제 일에 대해서는 입 다물어만 주시면 되는 거죠. (웃음) 그래서 요즘은 그 얘기 안해요.
손: 만화를 그리기 시작하셨을 때는 특히 어려우셨을 것 같은데요.
하기오: 맞아요. 한동안 부모님께는 비밀로 했죠. 학교에서 친구와 그린 만화를 숨기곤 했어요. 아마 눈치는 채셨겠지만 대놓고 뭐라고 하지는 않으셨어요. 그래도 숨겼지만요.
어느 날 아버지가 제 친구와 만났는데 친구가 우리가 만화가가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고 말했어요. 아버지가 집에 오셔서는 놀리면서 친구 말이 사실이냐고 묻더군요. 만약 그렇다고 답하면 설교가 이어질 게 뻔하니까 그건 친구 생각이라고 대꾸했죠. 친구를 배신한 거죠. (웃음) 집에 만화 관련 우편물이 오면 난리가 나니까 전부 친구의 집으로 부치게 해서 받았어요. (웃음)
손: 그때부터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기 시작하셨군요?
하기오: 그래요. 왠지 부모님과 만화책을 생각하면 야단맞던 것밖에 안 떠올라서. (웃음)
손: 그러신가요?
하기오: 유일한 예외는 처음으로 상을 타서 잡지에서 원고의 일부가 실리고 상금을 보내줬을 때였어요. 수표를 어머니께 보여줬더니 놀라시면서 네 만화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거니? 이러시는 거에요. 그 전까지는 내내 그 나이에 그런 헛짓거리 하면 안된다고 설교 들었거든요. 그래도 만화가가 되고 싶다고 대답하면 하고 싶은 것만 해서는 먹고 살 수 없다고, 만화가들은 페이지당 100엔만 받고 그리니까 그러고 못 산다고 하시는 거 있죠. (전원 웃음) 대체 그런 구체적인 수치는 어디서 들으신 건지. 생각해보니 어떤 인터뷰에서 아주 옛날에는 만화 원고료가 장당 100엔이었다고 들은 것 같아요. 아마 어머니도 그 시대에 들었나 보죠. (전원 웃음)
손: 그럼 선생님이 처음 일하셨을 때의 원고료는 어땠습니까?
하기오: 데뷔작은 장당 1200엔이었어요.
손: 장당 1200엔이었군요.
하기오: 그 다음 투고작은 장당 1500엔이었구요. 1974년에 [토마의 심장]을 그릴 때는 장당 3000엔에서 6000엔으로 올라갔어요.
손: 어릴 때 그리셨다는 코이노보리 얘기를 좀 해주세요.
코이노보리(鯉のぼり): 5월 5일 남자아이의 날, 혹은 그 날 장대에 매다는 잉어 모양 깃발.
코이노보리. 이미지 출저: 위키피디아
하기오: (전원 웃음) 예, 그게 실은 저도 잘 기억이 안나요. 그때는 언니와 같이 미술과외를 받고 있었어요. 선생님이 그림 그리는 법을 코이노보리를 예로 들어 설명하셨죠. 아이들은 코이노보리를 그릴 때 장대에서 쭉 뻗어 나온 모양으로 그리지만, 실제로는 바람에 휘날려 조금 꺾어져 있다고, 그러니까 요는 대상을 보이는 그대로 그려야 한다는 거였어요. 숲도 그렇다고, 아이들은 나뭇잎은 녹색, 가지는 갈색 이렇게 칠해버리지만 자세히 보면 더 많은 색깔이 있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아아, 보이는 대로 그리면 되는구나, 라고 생각했죠.
손: 당시 몇 살이셨는데요?
하기오: 1학년이거나 유치원생이었을 거에요.
손: 미술 과외를 하셨군요?
하기오: 예. 언니가 일요일에 수업 들으러 가면 따라갔지요. 서예도 했어요. 당시엔 그런 과외가 흔했거든요. 하지만 서예는 거의 기억이 안나네요.
손: 그래서 학교숙제로 코이노보리를 그려 냈더니, 어른이 그려준 거냐고 했다면서요? (전원 웃음)
하기오: 예, 선생님이 부모님께 그런 얘기를 하셨대요.
소녀문학을 넘어서
손: 어린 시절에 문학을 많이 읽으셨다고 들었습니다만.
하기오: 네, 정말 닥치는 대로 읽었죠. 시작은 학급 문고였어요. 당시에는 아이들에게 책을 읽히려는 운동이 있었거든요.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토마스 에디슨 같은 유명한 사람들의 위인전기도 있었고, 일본 전래동화도 있었어요. 그런 종류는 빨리 읽을 수 있으니까 금방 읽고 다음 책을 읽을 수 있었죠. 그러다가 5학년 때는 드디어 학교에 제대로 된 도서관이 생겼어요. 정말 기뻤죠. 매일 갔어요.
손: 어떤 종류의 책을 읽으셨죠?
하기오: 진 스트래튼-포터, 루이사 메이 올코트, 루시 모드 몽고메리 같은 미국 작가들의 책을 많이 읽었어요. 비밀의 화원, 빨강머리 앤, 서니브룩 농장의 레베카, 작은 아씨들 등등 주인공 여자애가 이런저런 모험을 하는 전형적인 소녀문학이요. 시리즈로 있었고 전부 다 읽었지요. 그리스 로마 신화 책도 있었죠. [세계의 신화들]이라는 시리즈가 있었는데 그 중에 그리스 로마 신화가 제일 좋았어요. 그리고 왠지는 모르겠지만 공상과학 코너도 있었죠.
손: 정말입니까?
하기오: 소년소녀를 위한 공상과학 책이 열두권 남짓 있었어요.
손: 당시 초등학교 치고는 특이한 경우가 아니었나요?
하기오: 특이했죠. 일본고전문학 코너도 있기는 했는데, 토카이도츄히자쿠리게 말고는 하나도 안 읽었어요. 별로 끌리는 게 없었던 거죠. (웃음)
토카이도츄히자쿠리게 (東海道中膝栗毛): 에도시대 작가 짓펜샤 잇쿠(十返舎 一九)가 쓴 골계본(滑稽本)으로 야지로베와 키타하치라는 에도 여행자들의 이세 신궁 여정을 희학적으로 묘사함. 코미디 뮤지컬 영화 [한밤중의 야지 키타]의 모티브가 되기도 함.
손: 그건 왜죠?
하기오: 일단 여성이 나오는 이야기가 거의 없었고, 이야기의 상황 자체가 별로 재미없었어요. 예를 들면 미나모토 일족과 타이라 일족의 전쟁이야기 같은 거요. 물론 역사적 배경을 알면 재미있지만 모를 경우엔, 느닷없이 웬 키요모리라는 사람이 튀어나와서 갑옷을 옷 밑에 숨기려는 장면이 나오는 셈이죠. (전원 웃음) 사전 지식이 없어도 바로 몰입할 수 있는 이야기를 선호했거든요.
손: 그래서 주로 서구문학에 끌리신 거군요?
손: 예. 가끔 일본 아동문학을 읽기는 했지만 설교조였다는 것 외에는 기억이 없네요. (웃음) 그때는 그런 교훈적인 책이 많았던 것 같아요.
손: 그렇다면 서구문학에 끌린 이유는 뭡니까?
하기오: 상상력을 사용하게 만드는 점이 좋았던 것 같아요. 아, 생각해보니 미야자와 겐지는 정말 좋아했어요.
미야자와 겐지(宮澤 賢治): 1896-1933. [은하철도의 밤], [주문이 많은 요리점], [봄과 아수라] 등의 저서로 유명한 일본의 작가.
손: 그렇군요. 환상적인 이야기를 선호한 편이셨군요.
하기오: 예, 그런 것 같아요.
손: 만화책은 데즈카 작품을 좋아하셨다고 하셨죠?
데즈카 오사무(手塚 治虫): 1928-1989. 일본 만화 및 애니메이션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을 끼친 만화가이자 애니메이션 제작자. 주요 작품은 [철완 아톰], [정글대제 (밀림의 왕자 레오)], [리본의 기사 (사파이어 왕자)], [블랙잭], [불새], [붓다] 외 다수.
이시노모리 쇼타로(石ノ森 章太郎): 1938-1998. 원래는 이시모리 쇼타로(石森 章太郎)로 활동했으나 1986년 이시노모리로 개명. 다양한 장르에 걸쳐 다작을 쏟아냈으며 탁월한 창의력과 기획력으로 만화뿐이 아닌 특촬계에도 중요한 인물. 대표작은 [사이보그 009], [가면라이더], [인조인간 키카이더] [HOTEL] 외 다수.
미즈노 히데코(水野 英子): 1939-. 초기 여성 소녀만화가로 소녀만화계의 개척자 중 하나. 대표작은 [별의 하프], [하얀 트로이카], [파이어!], [하니하니의 멋진 모험] 등.
손: 특히나 인상이 깊었던 작품을 하나 꼽는다면?
하기오: 전부 굉장했어요. 사실 초등학교 때는 데즈카 만화에는 무조건 압도됐어요. 어떤 이야기라도 “굉장해! 어떻게 이런 진행이? 등장인물은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이러며 감탄했지요. 특히 [철완 아톰]같은 근미래 SF가 그랬어요. 너무 상상력이 풍부했지요. 무엇보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만드는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이야기가 워낙 정교하게 이루어진 덕분에 쉽게 이해할 수 있었던 거에요. 반면 이시모리씨는 훨씬 감각적이었죠. 그림이 너무나 아름다웠어요. 하지만 스토리는 탄탄하지 않았죠. 느닷없이 이 에피소드에서 다른 얘기로 훌쩍 넘어가버리고 해서 정신 차리고 보면 “그래서 그 캐릭터는 어떻게 된거지?” 이러거나 “아니? 벌써 끝이야?”하게 되죠. (전원 웃음) 스토리가 대부분 그런 식이었어요. 그래도 임팩트는 굉장했죠.
손: 제 인상은 이시모리는 형태를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하기오: 기교죠, 기교.
손: 그래요, 기교. 주제는 2차적인 것이고.
하기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장면을 멋있게 연출할 줄 알았고 강력한 전투 장면을 그려냈죠. 독자를 놀라게 하는 것에 능숙한 작가였어요.
미즈노 히데코는 [별의 하프 (1960)], [안녕하세요, 선생님 (1964)] 그리고 [하얀 트로이카 (1964)]를 그렸죠. 전설이나 유명한 역사적 인물을 다루고 외국에서 영감을 구했어요. 드레스 선이 정말로 아름다웠죠. 몇 번이나 그 선을 베끼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는 거에요. (전원 웃음) 대체 뭘 어떻게 하면 이렇게 그려지는 거야?
손: 물론 그때도 [사자에상] 작가인 하세가와 마치코나, 우에다 토시코, 미즈노, 와타나베, 마키...등의 여성 작가들은 있었죠?
사자에상(サザエさん): 여성 작가 하세가와 마치코가 1946년부터 신문에 연재 개시한 일본의 초장수 만화. 애니메이션도 초장수. 조금 드센 주부 후구타 사자에와 그녀의 남편 마스오(데릴사위)를 비롯한 가족, 동네 사람들의 일상이 그려진다. 일본에서는 거의 사회적 신드롬으로 사회학, 가족학, 여성학적으로도 진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헉헉헉....이것도 사실 인터뷰의 5분의 1 정돈데 양이 상당하군요...매트씨 힘들었겠다-_-;
동시대 만화가들의 얘기는 앞으로도 종종 나옵니다. 당시 만화계의 면모를 알 수 있어 재미있지요.
덧붙여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는 단연코 이거 안보면 만화인생 헛살았다 레벨의 걸작입니다. 아직까지 안보신 분은 서점으로 고고씽(...) 서울문화사에서 애장판 5권까지 냈습니다. [토마의 심장]은 언제 나오려나.
호응이 좋으면 파트2가 좀 빨리 오를지도 모릅니다?!?
[주식회사 천재 패밀리] [노다메 칸타빌레] 등의 작품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만화가 니노미야 토모코.
국내에 최근 출시된 단행본 [음주가무연구소]는 작가의 진솔한(...) 술주정뱅이 라이프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일본과 맞먹거나 혹은 더 막나가는 음주문화의 우리나라에도 통하는 게 많을듯...)
이 중에 작가가 당시 푹 빠져있던 책이라는 [시마 과장]에 대한 소개가....
과장 시마 코사쿠. 돈이나 출세에는 관심없는 능력 있고 상쾌한 아저씨.
나쁜 상사에게는 대들고 사장의 여자에게 손을 대는 대담무쌍한 과장!
전국 각지의 술집에서 행운의 여신을 만나고
아무리 좌천을 당해도 반드시 본사로 돌아오는 불사조!
세계로 진출하는 슈퍼 재패니즈-그가 바로 과장 시마 코사쿠야!
...제법 정확?!
전 정작 [시마 과장] 중학교 때 보고 그다지 재미를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 보면 재밌으려나...리맨물 보는 느낌으로... 적당한 남캐러 붙여놓고 과장 총수~하며 망상하거나...분명 어딘가 시마과장 여성/게이향 동인 있을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