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가와 란포 소설 감상문을 질질 끌다가 그만 영화 쪽 리뷰를 먼저 쓰게 되었군요(...퍽!)
하여튼, 이 [란포지옥]은 4명의 각자 다른 영화감독이 란포의 소설들을 영화로 만든 옴니버스 형식으로, 영상화하기 힘들다는 란포의 작품세계에 대한 영화화 도전이라 일본에서도 화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전편에 걸쳐 국내에도 잘 알려진 일본 배우 아사노 타다노부가 등장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사정이 있길래 영화 내내 장발을 고집하는지는 불명. 장발을 할 땐 수염이 기본 옵션으로 따라오거나, 아예 상투로 틀어올리던가 하는 편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저는 란포의 소설은 국내에 번역된 것밖에 못 읽었기 때문에, 많은 말은 할 수 없지만...그래도 영화에 나온 작품 중 두 편의 원작들은 각자 읽어보았고, 전반적으로 어떤 분위기의 어떤 경향을 가졌다...에 대한 개념은 살짝 있었습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올리는 다소 허접한 감상문이니 양해해 주십시오.
화성의 운하
음...
원작을 봐야 알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잘 모르겠습니다.
여자를 죽여서(?) 죄책감을 느끼는 건가? 내지는 자아분열?—정도밖에 추리할 수 없었음.
거울지옥
이것은 원작을 읽어봤습니다.
뭐랄까...원작의 거울에 미친 남자라는 컨셉에, 연쇄살인과 아케치 코고로를 섞은 듯 합니다.
(혹은 제가 미처 접하지 못한 특정 아케치 코고로 단편과 더했을지도 모릅니다.)
사전에 그러한 믹스로 간다는 것을 듣고, 와 재미있겠다!!!-라고 나름 기대했었지만 정작 보고 나니까...의외로 재미없었습니다; 아니, 물론 란포의 세계관과 분위기 자체를 살려내는 것이 목적이고 재미따위(...)가 포인트가 아니었다면, 일단 (좀 과하게 많이 사용한다 싶은 느낌은 있지만) 어안 렌즈 촬영이나 각 곳에 거울을 배치해두고 온갖 각도를 잡아낸 노고는 분명 칭찬할 만하지만, 란포의 대중적인 면도 무시할 수 없으니 이왕이면 재미도 있으면 좋았을텐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할까요. 그리고 왠지 이토 준지 만화가 생각날 정도로 기괴했던 원작의 거울 공방에 비해 여기 나온 공방은 많이 얌전해진 느낌입니다. 그 밖에 아사노 타다노부에게 감정이 있는 건 아니지만...(사실 기본적으로는 좋아하는 축에 속한다)...머리 속 이미지의 아케치와 너무 달라서 가벼운 쇼크를 느꼈습니다. 용모고 자시고 이전에…왜 여기서도 긴 머리를 고집 하는건데!!—에 대한 위화감이랄까; (물론 그 뿐만 아니라 여타 인물들의 머리모양이나, 의복에서도 일부러 시대를 모호하게 하는 듯한 퓨전을 보였는데…왠지 차라리 다이쇼 시대 디자인을 유지하는 편이 더 기이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음.) 영화화하기 힘든 묘사가 많은 것은 알지만, 그래도 그걸 전부 다 대사로 일일이 읊어주니 너무 설명조에 교조적으로 느껴져서, 그 점을 매끄럽게 처리했으면 더 나았을텐데...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살인방법 말입니다만…우리집에 전자레인지 없다고 비웃는거냐! 부엌이 좁아서 못 사는 것 뿐이다! 그나저나 그런 기막힌 발명품이 있다면 고작(;;) 살인 따위에나 쓰지 말고 특허를 내서 나같이 부엌 좁은 자들에게나 공헌하란 말이다!---라는 잡생각만 떠오르더군요(…) 한데 아케치 탐정은...대체 뭘 한 거지?
우충 (배추벌레)
이것도 원작을 읽어봤습니다. 달턴 트럼보(Dalton Trumbo)의 Johnny Got His Gun과 세트로 읽으면 아주아주 침울한 하루를 200% 보장해 드릴 수 있는 소설입니다. (그런데 정작 둘 다 읽지 않으면 아까운 소설임. 특히 전쟁의 후유증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놓질 수 없죠.)
영화에서는 이것을...아케치 코고로의 라이벌, 괴도 20면상의 탄생비화(!!!)로 만들었습니다.
거울지옥보다도 그냥 다이쇼 디자인이 더 효율적이었을 것 같다고 여겨지는 스토리긴 했지만, 특유의 병적이고 일그러진 분위기와 묘사는 잘 연출되었으니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도 너무 대놓고 설명하는 독백이나 대사는 어떻게 안 되나...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다만 참담함과 비극성은 좀 약하군요. 그 밖에 단순히 사견이기도 하고 또한 예술품 콜렉터인 괴도 20면상과 연관시키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기도 했겠지만, 신체적 불구자가 된 것이 국가와 시대 탓이 아니라 개인 탓으로 돌려진 것이 좀 못마땅하다고 할까요. 그만큼 변태성(?)과 사랑을 강조하려는 의도는 있었겠지만, 되려 약해진 느낌입니다.
그 밖에 고하토에서 같이 출연했던 아사노 타다노부와 마츠다 류헤이가, 아케치 탐정과 괴도 20면상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꽤 흥미로운 캐스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벌레
원작을 못 읽어서인지 작품 자체의 재미 때문인지는 몰라도 가장 마음에 들었던 단편입니다.
란포 작품세계의 광기와 편집증과 탐미주의, 또한 그와 평행선을 이루는 추하고 너저분한 현실과 가차없이 시니컬한 블랙 유머 감각이 전부 다 나타나 있습니다.
주인공은 타인은 물론 현실 세계의 물체에 접촉하는 것조차 지극히 기피하고 두려워하고, 그 때문인지 알레르기성 피부염까지 앓고 있는 운전기사입니다. 문제는 이런 대인-아니 세계기피증 남자가 하필 만질 수도 똑바로 볼 수도 없는 세계의 여배우를 짝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극단적이고 비정상적인 ‘사랑법’을 저지르는데, 작품의 진짜 묘미(?)는 그 다음이지요. 무식한 놈은 탐미 범죄 하지 마!—라는 교훈을 절실히 맛볼 수 있습니다^^; 엽기성도 어쩌면 제일 높아서 개그를 느끼기 전에 역겨워하는 분들도 있을 것 같은데, 바로 그 블랙 유머가 포인트입니다. 가장 재미있게 본 단편이라 직접 보시라는 의미로, 더 이상 내용에 대해 자세히 쓰지는 않겠습니다. 덧붙이면 여기서의 아사노 타다노부의 연기가 최고였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