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2009. 1. 16. 21:53


"정치적 주제에 대한 탈정치적 위장"과 "역사 희석"이라고 감히 말하렵니다.

우리나라 언론 이래도 되는 거여?...라고 생각될 정도로 만화 자체가 존재한지 몇년인데 새삼스럽게 확 들끌어올랐다가 애니판에는 안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쉭 식어버린 고작 한국 비하 어쩌고의 얄팍한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솔직히 국내 웹에서 난리치기 전까진 한국이 나오는 줄도 몰랐음;; 비인기 캐러인 듯...) 좀 더 근본적인 문제.

사실 이것은 비단 [헤타리아] 뿐만 아니라 소위 말하는 국가 모에화, 정확히는 국가 의인화national personization에 모에코드와 네러티브를 가미한 [니혼짱] [아프가니스땅]에서 사용된 "모에 의인화"가 속성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대상을 탈정치화시키려고 할 때 벌어지는 현상에 대한 의문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아울러 국가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특정 집단을 의인화했다는 점에서 국내 웹에서 돌아다니는 대학 의인화같은 종류까지 포괄합니다.

물론 국가 의인화 자체는 새로운 현상이 아닙니다. 인간이 그림을 그리고 국가가 존재하면서부터 있었지요.


           
       로마를 무장한 여성으로 의인화한 방패                   미국 프로파간다의 고전적 상징 엉클 샘


동전, 군인의 방패, 징집 포스터 등 국가가 직접 제작하여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해온 프로파간다로써의 역할이 국가 의인화의 오랜 전통입니다. 근대에 시사만화에 표현되었을 때에도 설사 선동적 역할은 아닐지언정 명백한 정치적 의도로 사용되고 있으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사만화라는 맥락의 특성상 그 표현 행위가 정치적이라는 속성은 당연히 인지되고 받아들여진다는 점입니다. 사실 굳이 인간의 모습이 아니더라도, 국가를 상징하는 형상은 당연히 존재부터 정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국가 자체가 정치적인 존재이니까요. 가령 장미꽃이 짓밟혔다와 무궁화꽃이 짓밟혔다는 문장을 들었을 때 느껴지는 이미지는 각자 매우 다를 겁니다.  

그렇다면 [헤타리아]를 비롯한 모에라는 특정한 맥락 속에 이루어진 국가 의인화는 뭐가 문제인 걸까요? 저는 그것이 바로 탈정치화하는 지향하는 경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모에는 일종의 공유된 코드와 정서, 가벼움, 사랑스러움 그리고 후끈후끈 달아오르는 그 무엇(!)으로 삼라만상 전부를 포용하는 힘인데 따라서 친근하게 다가오고 공감하기 쉽고 "순수(라고 생각하게끔 한다)"하게 즐기는 것이 가능합니다. 문제는 그로 인해 국가 의인화가 태생적으로 지니는 정치성은 망각하거나 내지는 탈색시키거나 "순수한" 오락이라는 차원에서 정당화하기도 향유하기도 판매하기도 매우 편리해진다는 점이죠. 또한 아예 국가 자체를 의인화함으로써(!) 할리우드 영화의 "어떤" 아랍인, "어떤" 흑인, "어떤" 동양인 캐릭터로 대표되는 스테레오타입을 뺨치는 무지막지하게 무식하고 노골적인 스테레오타입화가 당당하게 진행된다는 특징도 있습니다. 물론 설마 정말로 그걸 믿는 철 없는 독자는...있을지도 모르지만...어쨌든 국가라는 지극히 복합적이고 정의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정체성의 집단들로 이루어진 유기체를 한 캐릭터로 형상화한다는 것 자체부터가 좋은 이미지든 나쁜 이미지든 엄연한 편견의 덩어리일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고 (엄청난 다중인격에 양성유구 캐릭터라도 무리라고 생각), 따라서 기존의 국가 의인화는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로 만들어졌고 그것을 숨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반면 모에화의 경우 그러한 거북함과 무거움을 희석시키지 않으면 모에하기 힘들기 때문에 실제로는 정치적인 주제를 다루면서도 탈정치성을 지향하고 표방함으로써 콘텐츠로써의 호소력과 동시에 스트레오타입과 정치성의 중대한 문제를 망각시킬 수 있다는 잠재적 위험 역시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근본적으로 매우 정치적인 소재를 탈정치성이라는 설탕코팅으로 듬뿍 절인 셈이지요.



[헤타리아]보다 훨씬 앞서 2차 대전사에 BL코드를 접목한 시사만화


모에라는 맥락이 정치적인 소재를 다룰 때의 또 하나의 치명적이면서 한층 더 무거운 문제는 역사, 그것도 근현대 전쟁사를 다룰 때 드러납니다. 백보 양보해 작가의 출신국이 2차 세계대전 전범국가 중 하나(그리고 그 중에서도 전후 처리, 보상 문제, 역사 교육이 세기가 넘어가도록 주변국들과 외교분쟁 떡밥이 될 정도로 허술한;)였다는 사실을 떠나서라도 21세기를 사는 현대인에게 있어 지금의 역사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고 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친 전쟁을 다루는 데에 있어 어느 정도의 문제의식과 역사인식/개념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전쟁물이 전부 진지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고-실제로 희극과 비극이 극단적으로 교차하는 곳이기도 하기에-로맨스를 만들어도 코메디를 만들어도 인간의 시간개념을 초월한 외계인이 나와도 다 좋은데 적어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지도가 몇번이나 바뀌고 아직도 그 상흔이 여태껏 아물지 못한 지역/사람들의 고통을 인지하고 만드는 것과 모르고/혹은 모른 척 하고 만드는 것은 크게 차이가 있습니다. 한편 추축국(공식 제목은 [Axis powers 헤타리아])들이 주인공인 [헤타리아]는 전범국가인 그들을 어찌되었든 모에스럽게 빚어내기 위해서 역사 왜곡(너무나 남용되어 이제는 지겨운 표현이지만)을 떠나 아예 역사를 희석시킵니다. 이탈리아가 입고 있는 검은 셔츠 군복이 상징하는 파시스트 세력의 디딤돌이었던 독가스를 사용한 이디오피아 정복이나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살육의 결정체였던 나치 독일에 의한 유태인 대학살과 같은 막중한 전쟁범죄들은 언급되지도 않는 정도를 떠나서 아예 이디오피아와 유태인 자체가 그 세계에 존재하질 않습니다. (단행본판에 추가되었다는 소식도 없으니...;) 모에의 범위에서는 어쨌든 뭘 해도 귀엽고 호감 주어야 하는 캐릭터들이어여 하는데 아무리 얀데레 속성이 부여되도 저런 행각은-특히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에 있어서-가볍게 넘어가기 힘들겠지요. 따라서 2차 대전시 군복을 입고 1, 2차 대전사를 그려나간다고 역사를 표방한다고 해도 사실은 무책임할 정도의 편의대로 중대한 역사적 사건들을 희석시키고 삭제하고 망각시키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만화를 순수하게 즐길 수 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원래 역사는-특히 전쟁사는 불쾌하고 불편한 것입니다. 시대적으로 근접한 전쟁일수록 더욱 그렇지요.
 
[아프가니스땅]이 처음 나왔을 때나 [바람의 화원]의 신윤복 여자설이나 그 픽션스러움을 변호하는 공통적인 면죄부가 있는데 바로 '일반인들이 모르던 역사(혹은 인물)의 존재를 알고 관심을 가지게 한다'는 점입니다. (요즘은 변호를 떠나 생색내기나 아예 학계, 전문가들 찌질대는 소리 입 막기 위해 큰소리까지 치는 수준인 것도 같지만;; 사실 그 전문가들이 쓴 책이나 정보를 바탕으로 픽션 만들면서 왜 선심 쓰는 척 하는지는 원...) 따라서 [헤타리아]에 대해서도 "덕분에 2차 대전에 대해서 알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소위 관심설 및 교육, 교양적 효과(...?)를 근거로 옹호하는 입장이 종종 보이는데...솔직히 그런 의견은 드라마나 웹툰을 보고서야 그런 중요한 걸 알았다니 현대인의 상식과 교양이 의심스러운 수준이라는 증거로 세계사 및 교양문화 교육의 강화가 필요함을 역설함 앞서 순수하게 오락물을 즐긴다는 반응과는 대치될 뿐만 아니라 설사 그런 계기로 역사에 관심을 가졌다 해도 그 한계를 드러냅니다. 원래 역사에 관심이 있어서 보는 사람을 제외하고 픽션을 계기로 역사를 알게 된 사람의 97%는 픽션의 역사와 실제 역사의 간격이 23% 이상 벌어지기 시작하면 그 시점에서 멈추거나 그 중에서 좀 창의적인 타입은 자기 입맛의 새 역사교과서를 만들 것입니다. 애당초 계기가 픽션이었으니 그 픽션이 어떤 것이었는가가 사실 역사에 대한 관심 증가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지 어쨌든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결과주의적이고 피상적인 단계에 머물러서는 안될 것입니다.

너무 설교하듯이 쓴 것 같지만, 뭐 표현의 자유가 있으니 [헤타리아]를 그리는 것도 작가 마음이고 보고 즐기는 것도 독자들 마음이며 저는 그런 의사도 일단은 존중합니다. (사실 한국보다 주일 이스라엘 대사관에서 뭐라고 할 줄 알았는데 아무리 선풍적인 인기라지만 결국은 오덕계에 한정된 탓인지-그래도 여성향 계열은 진짜로 무섭게 정복했지만-내지는 전쟁하느라 바빠서 그런지 아직은 잠잠하군요...) 단지 알고 보면 더 심오하고 흥미로울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더불어 국내의 [헤타리아] 까대는 포스팅이 지나치게 한국 비하에만 치우쳐진 편이라 (그게 문제가 아니것만;;) 답답한 심정도 있었습니다. 한국만 안나왔다면 레이더 밖이었겠군요(...) 아울러 이에 열...아니 삘 받아 한국 주인공 국가 모에화 뭔가를 하시겠다는 분들에게도 참고가 되면 기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귀여움과 전쟁사와 날카로운 역사인식이 공존할 수 있다는 증거로 이 영상을 링크합니다.
한국인이라면 김치상잔의 비극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지요...


Posted by 시바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