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서 쓰는 중입니다. 몇달만에 노트북으로 인터넷을 하는 이 신선감...오오 감개무량~
일본에서는 내내 유선이라 그랬는지 노트북이 한동안 한국 무선을 못잡았지만 (...정말 그래서냐?;)
마치 교내 네트워크 연결 문제인 것처럼 말해서 전산원에 들고 갔더니 고쳐주어서 지금은 됩니다.
학교 시설을 사리사욕을 위해 이용하다니...라고 해도 그럴려고 등록금 내는 거니까 괜찮습니다.
겸사겸사 도서관 가서 책도 읽고 왔는데....
[재미난 집-어느 가족의 기묘한 이야기] / 앨리슨 벡델
제목은 들어서 대충 훑어보려고 했는데 어느새 끝까지 독파해버리고 구매를 결정짓게 한 만화.
장의사이자 영어교사였던 저자의 아버지의 사고인지 자살인지 모호한 사망 이후
(겸업한 이유는 작은 시골동네라 장의사 일만으로는 가족들 먹여 살리기 힘들어서)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재조명한 전기적...이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관조적인 작품입니다.
매 챕터마다 한 꺼풀 한 꺼풀 아버지의 수많은 면모가 드러나는 듯 혹은 되려 수수께끼가 깊어지는 듯
그러면서 저자와 아버지와 가족과의 교감, 소통 혹은 불통, 그리고 성장의 기억이 하나하나 그려집니다.
개인적으론 감동강요식 가족담보다 이런 쪽이 담담하면서 진솔하고, 그러기에 더욱 임팩트가 강하다고 생각.
특히 성정체성에 대한 자각이 중요한 테마 중 하나로 조화되면서 절묘한 부녀간 소통의 순간을 제공.
아버지의 직업과 저자의 관심사상 문학작품 역시 핵심적인 장치로 존재해서
[율리시스](신화 말고 제임스 조이스 소설)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끝까지 읽을까 생각중.(무식 폭로OTL)
특히 마지막 장면은 잊을 수 없습니다. 떠올려 볼수록 가슴이 벅차 오르네요.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의 세세한 버릇, 행동거지, 말투가 손에 잡히듯 하는 생생한 묘사도 매력.
아아, 이런 사람이겠구나...하는 느낌이 딱 옵니다.
영어 속담 중에 "모든 집안의 옷장 속에는 해골이 들어있다"라는 말이 있는데
평범해 보이는 집이라도 다 말 못할 사정이 있고, 요는 "사실 정상적인 가정 따위 없지만 그게 정상"이라는
이 만화의 생생함과 의도적으로 거리를 둔 관조감이야말로, 그 속담의 진실성을 보여줍니다.
두 말 할 나위 없이 강력 추천작.
[좀비의 시간] / 이경석
정확히 이건 도서관에서 본 만화가 아니라 몇주 전에 구입한 것.
이경석 작가님의 만화를 좋아합니다.
[팝툰]은 창간호부터 90% 이상 [전원교향곡]을 보려고 샀습니다.
(뭐 [르네상스 탐정 바사리]와 [와일드 와일드 오피스] 연재 이후로는 구매동기가 좀 늘어났지만)
어떤 점을 좋아하냐고 하면 하나 짚어서 말하긴 어렵지만
생동감 넘치는 대사, 투박소박한 시니컬함과 훈훈함의 공존, 황당성과 일상성의 절묘한 조화...
간단히 말하자면 이 정도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좀비의 시간]도 같은 작가 작품이라길래 거리낌 없이 질렀습니다만...
이건 그냥 [괴물] 좀비판이잖아...하고 좌절...OTL
작가분이 단순히 에피소드 쪽이 강한 건지, 감동 쪽에 더 핀트를 맞춰서인지는 몰라도
개인적으로는 적잖이 실망스러웠습니다.
영화화하기엔 괜찮은 내용일지도 모르지만 이 작가분에게 기대하는 종류는 아니라 유감.
[방문자] / 하기오 모토
[좀비의 시간]과 같이 구입. 덕분에 "오늘의 지름은 실패였어"...같은 좌절은 면함.
[토마의 심장]의 쿨하고 어른스러운 소년 오스카 라이저의 입학전 이야기를 그린 표제작 외 단편 수록.
역시 하선생님도 자캐릭터로 다양한 동인질을 하며 세계관을 넓혀오신 겁니다. 좋은 의미로.
사실 [토마의 심장]을 먼저 보면 원안 쪽인 [11월의 김나지움]이 동인지로 보이는 점이 있기도(...)
독자 입장에서만 오스카가 멋져, 오스카를 더 보고싶어라고 생각한 건 아닌 모양인지
[토마의 심장]을 보지 않아도 그 자체로써 독립되고 완성된 오스카의 이야기를 그려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덮어버리려고 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불균형.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자살...혹은 피살.
덧붙여 [토마의 심장] 오스카가 왜 유리스모르를 싸고 도는지도 알겠더군요. 약한 모습을 보여버렸어 그 외 단편들도 매우 수준이 높으니 구매 가치가 충분한 책입니다. 그림도 무척 아름답고요.
[만화의 창작] / 스콧 맥클라우드
솔직히 말해 저는 이 책에 크나큰 불만이 하나 있습니다.
왜 내가 중고딩일 때 안나온 거야!!!
...역설적으로, 그만큼 만화 그리는 사람, 만화를 그리고픈 사람에게 있어서...
아니 어떤 의미로 창작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시원시원하면서도 분명한 메세지를 던져주는 책.
"닥치고 이렇게 해! 이게 정석이야!"...가 아니라 "너에게 잘 맞는 방법이 최고야. 그런데 이런 건 염두하고"
이렇게 대인배스러우면서 지혜롭게 차근차근 이끌어주며 어깨를 살짝 밀어주는, 그런 만화창작지침서.
(그래도 소년만화가 소녀만화보다 그림체가 다양하다는 건 동의 불가...뭐 본인도 잘 모른다고 인정하시지만)
덧붙여 인상적이었던 말 중 하나는... "당신이 그림체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체가 당신을 선택합니다"
라는 말인데...과연과연 하고 끄덕이면서도... 묘하게 저주같아OTL......
특히 최근에 젠장 난 이런 그림이었구나! 하고 피토하며 깨닫는 계기가 있어서 더더욱...
어찌됐든 이것도 강력추천 항목에 들어갑니다.
[도박묵시록 카이지 39권] / 후쿠모토 노부유키
세간에는 소위 말하는 남자의 로망이라는 것이 있지요.
목숨 혹은 그 이상의 것을 거는 대범함, 무모함, 도전정신, 승부욕, 그리고...도박.
[스트레인저 무황인담]의 이타도리 쇼겐에 대한 제 감상이 (나름 애정을 담아) "아자씨ㅋㅎㅎㅎ"인 반면
아무래도 압도적으로 남성인 것 같은 2채널 게시판에선 "이타도리님 꺄악~~>ㅁ<"인 차이가
바로 그...남자의 로망이란 거에 어느 정도 공감하느냐의 차이라고 생각되는데
이 점을(갭을?) 카이지 39권에도 느꼈습니다.
카이지는 멋있게 굴지만 저는 그냥...
"야 이 화상아----!!!! 니가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구나!!!!!!!!"
하고 냅다 소리를 질러버렸습니다. (진짜로 책 읽다가 버럭해서;)
굳이 장점을 말하자면 이걸로 욘사마...아니 도련님 공략 플래그 성립?!
......그래도 카이지 넌 여전히 구제불능이야...
[어서오세요 305호에!] / 와난
거의 연재 초기부터 읽어온 네이버 연재만화입니다. 어서 단행본이 나와줬으면 하는 만화.
조금 어수룩한 대학생 김정현이 선배가 소개해준 심히 별난 룸메이트 김호모(별칭 홈)와 겪는 일상다반사...
...를 빙자한 한국사회 속의 성적소수자 인식 개선 캠페인 만화...라고 하면 불공정한 표현이겠지만
그런 기능이 잠재되 있을지도 모르는, 요즘 보기 드물게 여러 차원에서 진정한 건전만화입니다.
룸메이트 김호모는 이름 그대로(...) 동성애자입니다. 게다가 입맛과 성격도 어딘가 살짝(?) 요상한.
동성애라고는 진짜로 평균적 대한건아 수준의 인식(과 편견)밖에 없는 주인공 정현으로썬 환장할 노릇이죠.
이 만화의 장점은 귀여우면서 정감 가는 그림체와 코믹한 내용과 연출 속에
어디까지나 일상의 영역에서 일반과 이반의 교감과 마찰을 가볍지 않게 그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주인공들의 성이 흔해빠져서 만화, 드라마에서 주역에는 기피되는 김씨라는 점도 그런 "일상성"을 의도한 듯)
즉, 만화적 재미를 놓지지 않으면서 (사실 코믹 시트콤으로 봐도 재밌습니다)
불편하지만 반드시 논해져야 하는 묵직한 주제를 섬세하면서 깊이있게 다루었다는 거죠.
동성애자 및 그 친구들은 긍정적으로 그려지는 반면 동성애 혐오자(호모포비아)는 부정적인 인물상으로
그려져 편향되어 있다는 의견이 있지만, 호모포비아나 호모포비아적 인식도 일상에 어디서나 널려 있을 법한
놀라울 정도로 흔해빠진 (단지 보통 인식은 못하고 넘어가는) 편견의 표상일 뿐이고,
극단적 호모포비아가 지닌 본인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의 혐오감과 거부감도 그들 입장에서 그려집니다.
홈의 친구들도...사실 무작정 긍정적인 인물들은 아니죠; 지나치게 일방적이거나 무책임한 구석도 있고...
호모포비아는 절대 이해할 수 없다는 홈의 친구나, 친우라도 동성애자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람이나
묘하게 겹치며 통하는 데가 있어서, 그런 의미에서 쌍방 상당히 "공정하게" 묘사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섬세함과 균형감각이야말로 [305호]의 중요한 미덕이자, 테마라고 여겨집니다.
비단 성적소수자 뿐이 아니라도 조금이라도 다른 타자, 이질적인 존재를 쉬이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
그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기에, 더더욱 이러한 만화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현재 [305호]는 말하자면 2기에 돌입한 상태입니다.
정현과 홈의 관계(이상한 의미가 아니라)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1기의 조역이던 정현과 같은 과인 까칠한 훈남 캐릭터 (송곳니가 포인트) 오윤성이 중요인물로 부곽.
개인적으로 홈이 너무 안되보여서 오윤성과 러브라인...은 아직 일러서 뭐라할 수 없지만
적어도 친구라도 더 생겼으면 하지만...
아니, 그전에 선글라스를 벗어줘...홈...
이 시대에 이 나라에 진정으로 필요한 건전만화 [어서오세요 305호에], 강력히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