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7일(블룸버그)- 멕시코 출신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는 새 영화 [판의 미로]를 통해 스페인 내전의 여파를 재조명한다. 영화는 프랑코 정권의 파시즘만큼이나 위태로운 환상의 세계를 창조하는 어린 소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델 토로의 2001년도 작 [악마의 등뼈]는 스페인 내전의 말기인 1939년이 배경인 유령 이야기였다. 12월 29일 개봉하는(*역주: 북미 개봉일임) [판의 미로]는 [악마의 등뼈]에서 수년이 지난 시점으로, 스페인의 역사에 잠자리 같은 요정과 수수께끼의 판이 나오는 판타지를 절묘하게 뒤섞은 작품이다.
필자는 지난 주에 영화 홍보 차 뉴욕을 방문한, 육중한 체격에 턱수염을 기른 42세의 델 토로 감독을 한 맨하탄 호텔에서 인터뷰했다.
힐퍼티: [판의 미로]는 어린이보다는 어른을 위한, 다소 과격한 측면이 있는 판타지 영화입니다. R등급 (18세 이상 관람가)을 받았는데, 이 등급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델 토로: 저는 요즘 아이들이 고생이나 고통에는 굉장히 민감한 반면, 시각적 폭력에는 중독되며 자라는 현상에는 뭔가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의 폭력은 의미 없이 삽입된 것이 아니니까, 저라면 10대 초반의 아이들에게도 이 영화를 보여줄 겁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저에겐 그런 결정을 내릴 권한이 없지요.
(*역주: 한국에서 15세 이상 등급이란 것을 알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
힐퍼티: 파시스트들의 역사적인 잔혹 행위와 동화를 섞었는데, 어째서죠?
델 토로: 그건 제가 정치적 연설보다 우화를 더 믿기 때문입니다. 우화는 사람의 감정과 믿음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판타지는 도피가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입니다.
힐퍼티: 그럼 오필리아는 도피를 한 게 아니군요?
델 토로: 오필리아는 작은 새들이 지저귀는 디즈니 월드로 간 것이 아니니까요. 제 어릴 적의 상상력은 결코 밝고 건전하지 않았고, 덕분에 세상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최초로 창조된 동화들은 기근이나 돌림병, 고아가 되거나 버려지는 아이들 같은, 현실의 비참함을 형상화한 것이었습니다. [판의 미로]는 그 연장선 상에 있습니다.
감독과 판 역의 더그 존스.
판을 말하다
힐퍼티: 영화의 조명이 참 환상적이던데요.
델 토로: 저는 고야의 작품을 사랑합니다. ‘어둠에서 스며 나오는 빛’이 영화 디자인 컨셉 중 하나였지요.
(*역자 주: 스페인의 저명한 화가 프란시스코 데 고야를 가리킨다. 왕족과 귀족의 초상화를 그려준 궁정 화가였지만 동시에 전쟁의 끔찍함을 고발하는 작품으로도 유명하며, 또한 민간 전승의 마녀, 흑마술, 악마에 대한 소재도 즐겨 그렸다. 아마도 감독은 고야 말년의 [검은 그림] 연작에서 영감을 얻은 듯.)
힐퍼티: 작중의 수다쟁이 판은 꽤 무서운데요. 한편으론 보호자적인 아버지 같으면서, 동시에 으스스하고 위협적인 면도 가지고 있습니다.
델 토로: 판의 속성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트릭스터]의 그것입니다. (*역자 주: 트릭스터란 신화, 동화에서 마술이나 장난, 꾀로 질서를 어지럽히는 존재. 북구신화의 로키, 그리스 신화의 헤르메스, 유럽 동화의 장화 신은 고양이, 우리나라 전래동화의 토끼나 여우가 트릭스터에 해당됨. 선악을 초월한 존재로도 여겨진다.) 그리스 신화 속의 판은 파괴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생명과 양육의 상징입니다. 그에게는 오필리아를 돕는 것도, 해치는 것도 식은 죽 먹기입니다. 언제나 수상하고 불가사의한 존재입니다.
이상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저는 어린 시절 할머니 댁의 옷장에서 판이 나오는 것을 보곤 했습니다. 그 방에서 잠들 때마다 판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비달 대위 역의 세르지 로페즈와 감독. (위......위화감이;;)
뻔한 파시스트
힐퍼티: 판은 복잡한 캐릭터인 반면, 파시스트 비달 대위는 1차원적인 뻔한 악역 캐릭터인데요.
델 토로: 저는 스페인 파시즘 자체가 별로 은유적이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파시즘을 보면 아시겠지만, 지중해 민족 특유의 잔인함이랄까, 그런 것 때문에 꽤 노골적이고 적나라했다고 생각합니다. 50년대 이후의 영화는 모든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해야 된다는 괜한 압박감에 눌리긴 하지만요.
힐퍼티: 델 토로씨는 꿈을 기억하십니까?
델 토로: 네, 하지만 주로 상어나 좀비에게 잡아 먹히는 평범한 꿈이지요.
힐퍼티: 그거 참 의미심장한데요.
...개인적으로 동화의 비참한 성질이나, 판에 대한 설정이 제 생각과 딱 맞아떨어져서 기뻤습니다^^
판의 미로를 가장 근원적인 동화로의 복귀...라고 생각했었는데 역시 염두해 두고 있었군요.
(뭐...웬만한 신화, 동화 강의 들으면 다 나오는 소리니까 줏어 들은 거지만...)
그나저나, 좀비와 상어에게 먹히는 델 토로 감독이라...하긴 그거 참 먹음직스럽겠.....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