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2010. 10. 29. 23:41
1부-'동인'이라는 용어의 모호함 


2부-대한민국에서의 보이즈러브 매체와 보급

한국의 BL문화는 90년대 초반 즈음에 일본의 만화와 소설을 통해 유입되었습니다. [절애] [브론즈] 등의 만화는 해적판으로 유통되며 국내에 BL문화를 뿌리내리게 할 뿐만이 아니라 순정만화 전반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당연히 일본 소녀만화계에도 중요한 작품이지만.) 또한 [아이노 쿠사비] [불꽃의 미라쥬] 등의 소설은 PC통신에서 번역 파일로 돌며 BL 창작 소설이라는 문학장르의 확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현재 한국에 유통되는 BL매체는 만화, 소설과 같은 도서류, 음반류(드라마 CD), 그리고 게임이 있습니다.

매체를 설명하기에 앞서, 기본적인 장르 분류를 알아봅시다.


i. 창작
별도의 원작이 없는 독립적인 창작작품입니다. 상업출판사의 작품과, 동인작품이 있습니다.
상업출판사가 발매하는 창작BL의 경우 잡지에 따라 성적 묘사 규정의 차이부터 작품의 분위기까지 작가에게 외적인 영향을 행사하여 작품에 반영하기도 합니다. 즉 BL 이전에 여성취향의 상업적 출판물임이 전제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ii. 패러디

만화, 게임, 애니메이션, 소설, 영화, 드라마 등 특정 작품을 BL적인 해석으로 패러디한 것입니다.
패러디라는  태생적 특성상 원작 의존적이고 BL이라는 것 이전에 원작 팬덤으로써의 아이덴티티가 우선 되며 따라서 원작에 대한 인지 위에서야 성립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iii. RPS

RPS(real person slash)는 실존인물(주로 연예인)을 대상으로 삼는 것으로 어떤 의미로는 패러디 BL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대상이 작품이 아닌 인물인만큼 패러디와는 다른 특성을 지니기에 분리합니다. 예를 들어 같은 실사라는 의미에서 영화나 드라마 패러디와 비슷하다고 여겨질 수 있지만, 그 쪽은 배우에게 주여진 캐릭터-배역을 좋아하는 반면 RPS는 배우 자체를 BL 망상 및 창작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차이점입니다.

RPS는 아이돌 팬덤과도 겹치는만큼 국산 BL 팬덤 중에서는 가장 대규모로 추정됩니다.  세간에서 흔히 '팬픽'이라고 칭하는 단어는 원래는 패러디 소설을 의미하나 H.O.T 팬픽처럼 특정 아이돌 팬픽이 많고 일반인이 이해하기 쉬운 범위라 국내에서는 RPS 팬픽으로 인식되고는 합니다.


각 장르는 서로 지향성과 대상 독자, 때로는 감수성마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따라서 “BL 패러디는 그리지만 BL 만화는 보지 않는다” 혹은 그 반대의 경우가 성립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둘 다 향유하는 경우도 있지만.)
물론 매체간에도 이러한 격리점은 존재해서, 소설은 읽지만 만화는 보지 않거나 만화도 보고 게임도 하지만 소설은 거의 읽지 않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다음은 매체에 대해 분석해 보겠습니다.


1. 만화

90년대 초, 중반에는 해적판 BL만화가 점점 더 늘어났는데, 그 중에는 동인지도 있어서 슬램덩크 동인지를 일본에서의 최근 연재분으로 오해하는 도시전설을 낳기도 하였습니다. 90년대 말에는 대여점의 분포로 수많은 정식 라이센스판 일본만화가 쏟아질 때 다수의 BL만화도 있었습니다.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단권으로 끝나는 단편이 메인이라 시리즈물 같은 공간 부담이 없고, 내용도 적당히 야해서 인기가 있으니 대여점에서 선호된 품목이었습니다. 현대지능개발사 같은 출판사는 아예 BL 도서에 전념하여 성공하기도 하였습니다. P2P의 등장으로 예전만큼 팔리지는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구매를 선호하는 팬층의 특성상 만화책 중에서는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팔리는 장르에 속합니다.

BL 만화는 만화라는 시각적 매체의 높은 전달성, 대여점에서 연령확인 없이 미성년자에게 대출했던 경우, 불법적 혹은 합법적 (개인이 자신의 창작물을 사이트에 올려두는 것 등) 온라인 게재로 BL문화의 가장 용이한 유입경로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같은 만화라도 1부에 거론한 패러디 BL만화와 현대지능개발사 등에서 출간하는 창작 BL 만화는 상당히 다른 경향과 팬층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BL만화가 대중적으로 (내지는 적어도 BL을 전혀 보지 않은 독자층에게도 널리) 알려진 것은 2000년대 초반에 인기를 끌었던 [서양골동양과자점]인데, 이런 종류의 작품은 정확히는 BL이나 야오이가 아닌 '니오이'입니다. 니오이(匂い)는 냄새를 뜻하는 일본어 단어로, BL은 아니지만 BL스러운 냄새(남성 캐릭터들 간의 끈끈한 무언가가 암시되어 있거나 게이 캐릭터를 여성향적 의도로 활용한다던가)를 풍기는 작품이란 뜻입니다. [서양골동양과자점]의 경우는 작가가 BL작가 출신이긴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작품 자체는 게이 캐릭터가 몇명 등장할 뿐인 일반 순정만화인 것입니다.


2. 소설

번역 소설의 경우 초기에는 원래 책이거나 작가의 개인사이트에 오른 것을 PC통신,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번역하여 공유하는 방법으로 유통되었습니다. 오프라인 유통의 경우 출판등록을 받은 출판사에서 출판하는 경우와, 동인지와 같은 자비 출판 두 가지가 있습니다.


a. 온라인 소설 유통

BL소설의 온라인 유통은 산별적으로 흩어진 BL커뮤니티나 블로그에서 책으로 출판되었거나 혹은 인터넷에 올랐던 해외 소설을 번역해 올리는 것과, 창작/국내 소설을 돌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P2P에 올라와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본 소설을 번역해서 올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종종 영어권의 게이 포르노 소설을 번역해 BL물로써 향유하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국산 BL 소설은 크게 잡아 창작소설, RPS, 패러디 소설로 나뉠 수 있습니다. 각자 게재되는 매체(커뮤니티, 카페, 블로그 등)가 다르며 위의 BL만화에서도 나온 얘기지만 지향점도, 독자층 성향도 상당히 다릅니다.  

창작 BL 소설은 소설 커뮤니티에서 연재되며 이는 상당히 특수한 한국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검색 정도로는 주소를 알아낼 수 없고 수시로 주소를 옮기고 가입하는 데에도 성인이라는 점 외에도 까다로운 절차가 필요하며 가입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상당한 정성과 관심을 쏟지 않으면 안됩니다. 가령 한 달에 게시물 (소설이 아니더라도 리뷰나 자유게시판 등도 가능하지만 지나치게 짤막하고 성의없어 보이면 안됨) 3개 이상, 댓글 3개 이상(성의 있고 내용을 잘 인지한 듯한 댓글이어야 함) 달아야 하고 몇달에 한번씩 수시로 주소를 옮기며 재가입 신청 기간 동안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서 신청하지 않으면 회원 상태를 유지할 수 없는 식입니다. 커뮤니티 규모나 타입에 따라 정도가 다르기는 하지만, 요는 매우 폐쇄적이고 비밀스러운 커뮤니티라는 것입니다. 여러가지 엄격한 룰이 존재하고, 따라서 눈치가 부족하거나 룰을 위반하는 회원은 퇴출당합니다. (커뮤니티에 따라서는 그 회원을 소개시킨 회원도 제제를 받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물론 장점은 그만큼 커뮤니티 내부의 관계는 매우 친근하고 밀접하며 단결력이 강해집니다. BL소설을 향유할 뿐만 아니라 강한 소속감, 연대감으로 충족감을 느낄 수 있는 커뮤니티인 것이죠. BL만화나 게임 등 비주얼한 (오타쿠적인) 매체는 거의 즐기지 않고 전적으로 소설만을 위주로 향유하는, 어떻게 보면 소위 '일반인'에 가까운 성향이 패러디 팬덤과의 차이점입니다.

RPS는 해당 연예인, 아이돌의 팬덤 커뮤니티 안에서 유통됩니다. 원래 팬덤이라는 특성상 기본적으로 강한 유대감 위에, 역시 팬덤의 특성상 미성년자가 다수 섞여있다는 데에 오는 위기의식, 실존인물을 다루는만큼 법적인 문제에 휩싸일 여지 등으로 폐쇄적이고 긴밀한 연대를 유지합니다. 또한 향유 대상의 특성과 숫자가 많은 특성상 BL소설을 읽는 것 외에는 만화나 애니메이션, 게임같은 소위 '오타쿠적' 취미가 거의 없는 '일반인'에 가까운 경우도 다수입니다. 이렇게 보면 창작소설 커뮤니티와 유사점이 많아 보이지만 교류가 있지는 않습니다.

패러디는 특정 기존 작품에 대한 패러디 소설입니다. 해당 작품 팬 커뮤니티, 게시판 및 개인 블로그에서 발표, 유통되는 편입니다. 일찍이 PC통신 시절의 애니메이션 게시판에서도 존재했습니다.

만화 부분에서도 언급했듯이 소설 향유층도 겹치는 공통분모도 있는 반면 각 공간 사이는 기본적으로 상당히 격리되어 있습니다.


b. 오프라인 소설 유통

한국에 책으로 엮어서 나오는 BL소설은 크게 잡아 등록된 출판사에 의한 합법적 출판물과, 개인의 자비출판에 의한 동인지 출판물이 있습니다.

출판사에 의한 출판물은 일반적으로 BL만화도 출판하는 곳에서 수입 소설을 정식 라이센스하여 출판하는 것이 표면적인 시장에 보이는 대부분의 BL 소설입니다. 대부분 만화 일러스트풍의 표지와 삽화가 들어가 있고 라이트노벨 판형, 분량과 유사합니다. 수는 극히 적으나 국내 작가의 창작 BL 소설이 발매된 적도 있습니다.

창작 소설 동인지는 소설 동인지 판매행사에서 주로 유통되며 겉보기에는 일반 소설의 표지와 판형, 굵기와 크게 다르지 않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가격도 8000~12000원 대로 일반 소설과 비슷합니다. 한정된 부수만 찍기 때문에 재고 거래에 프리미엄이 붙어 고가로 뛰기도 하는데 이 중고시장은 소설 커뮤니티에서 표면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금기시되지만 명백히 존재하는 시장입니다. (*그러한 목적의 커뮤니티가 존재한다는 듯한 뉘앙스라는 지적을 받아서 덧붙이지만 언제까지나 음성적인 거래 수준입니다.) 과거의 일이지만, 한때는 작가에게 책의 사소한 물리적인 흠집이나 재판조차도 허용되지 않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한국의 창작 소설 동인지 시장은 매우 특수하고 흥미로운데, 사실상 출판사를 통한 등록된 출판물이 아닌 음성적인 출판물로써 존재할 수 있고, 극소수의 경우지만 작가가 더 이익을 볼 수 있는 규모입니다. 우선 동성애와 성적 묘사에 관대하지 않은 국내 실정의 특성상 심의나 기타 법적인 문제를 피할 수 있고, 편집자의 간섭을 받지 않으며, 인세도 출판사와 나눠가질 것 없이 오롯이 100% 자신이 가져가게 됩니다. 물론 소설 책값부터가 만화 동인지보다 압도적으로 높으니 권당 판매이득은 더 많다고 해도, 큰 이익을 취할 수 있는 것은 극소수의 인기 작가에 한정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결론적으로는 출판사 입장에서도 작가 입장에서도 표현의 자유에 대한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는 유해간행물의 기준 참고) 법적 제재의 리스크가 잠재적 이윤을 초과하니 양성적으로 나가기 어려운 구조인 것이죠.
 
RPS를 비롯한 여타 패러디 소설은 동인 행사나 해당 팬덤의 온리이벤트에서 유통되고 통신판매를 통해 판매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3. 음반류

음성 드라마극을 CD로 녹음한 드라마CD가 BL음반류에 해당합니다. 일본 여성향 시장에서 매우 중요한 성우 팬덤의 주요 매체입니다. 국내에는 일본 드라마 CD가 온, 오프라인으로 음성적으로 유통된 것과, 극히 수는 적지만 국내 성우들로 제작된 드라마 CD 및 제작업체도 현존하고 있습니다. 화제가 되었던 웹툰 (정글고, 핑크레이디 등) 원작 드라마 CD도 있고 BL 계열로는 디바, 야해라는 회사들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4. 게임

역시 일본의 BL게임을 개인이 구매하든, 불법 다운로드로 퍼트리든 주로 음성적으로 유통된 것이 대다수.
동인게임으로 BL게임이 제작되어 동인행사나 리브로와 같은 온라인 서점에 유통된 적이 있습니다.




음반류와 게임을 다소 간략하게 다루었지만, 요는 우리나라 BL시장의 주된 매체는 소설과 만화라는 것, 그리고 그 중에서도 RPS와 창작 소설 시장이 상당히 크다는 것, 각 공간 및 매체 향유자 사이에는 공통분모도 존재하나 기본적으로는 서로 격리되어있고 파편화된 (취미기반의 세계가 대부분 그렇지만) 특성이 요지입니다.

다음 편에는 이상의 국내 BL 시장의 매체 및 현황을 통해 BL도서관 분쟁이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를 건드리고 이끌어내었는지 다루어 보겠습니다.

Posted by 시바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