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2009. 5. 22. 00:39
주변의 애니 좋아하시는 분들은 크게 [요즘 애니 볼 게 없다] 혹은 [~~가 모에한다]로 나뉘는 느낌인데요.

때로는 [에반게리온 이후로 일본 애니메이션이 재미 없어진 세대]와 [에반게리온을 계기로 일본 애니메이션에 입문한 세대]로 분류되기도 하고 (굳이 에반게리온은 아니라도 대략 그 즈음에 나온 작품일 때도 있음. [슬레이어즈]라던가...) 요는 90년대 말을 기점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정확히는 일본 주류 상업 애니메이션에 어떤 중요한 변화가 있었고, 그 변화에 대한 호오에 따라 '요즘 애니'에 대한 만족도/적응도가 갈리는 것으로 보입니다.

종종 에바 때문에 씹덕 모에코드(..;)가 보편화되어서 에바가 일본 애니 다 망쳐먹었다능 뭐 이런 비판이 나오기도 하는데 확실히 에바의 파급력은 상당한 것이지만 그 또한 일련의 변화의 상징의 하나고 상업적이며 대중적인 일본 TV 애니메이션의 구조적 특성과 OVA 시장의 몰락을 고려하면 자연스럽다고도 여겨집니다.

[만화 산업론]에서 나카노 하루유키는 현재 일본 만화시장의 침체에 비해 시장규모 및 작가의 발굴에 있어서도 활발했던 50-60년대 만화계의 독보적인 특징 중 하나로 "두 개의 시장"을 꼽고 있습니다. 도쿄의 전통 있는 아동잡지를 발행하던 주류 출판업계와 그에 비해 비주류였고 다소 언더적 성향이 있었던 오사카 중심의 대본소 업계가 그것인데요. 데즈카 오사무가 지방/비주류 업계에서 출발해(정확히는 그런 시장이 아니면 그런 혁신적인 작풍으로는 데뷔하기 어려웠던) 주류에 편입된 대표적인 케이스입니다.

즉 주류업계는 막강한 자본에 바탕한 배급망, 사회적 영향력, 월등한 작업환경이 가능한 반면 그렇게 돈이 들어가는 만큼 실험적인 시도에는 조심스러워서 새로운 혁신은 어렵고, 반면 비주류는 문턱이 낮고 적당히 팔릴 것 같으면 찍어내니까 작가 데뷔도 쉽고 개성적인 작품이 탄생할 토양이 될 수는 있지만 자본이 부족해서 오래 유지되기는 어렵다는 얘기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거친 환경에서 방목되며 자기 색깔을 강하게 드러낸 작가들은 대다수 주류 출판사에 스카웃되어 일본 만화계의 판도를 크게 넓히게 되고 한편 작가진을 죄다 빼앗긴 대본소는 몰락의 길을 걷습니다. 사실 작가로써는 고료 더 많이 받고 전통 있는 출판사의 잡지에 실리는 편이 당연히 더 매력적인 환경이고 또한 주류 출판사가 아니면 그들을 그렇게 크게 키워줄 수 있는 자본은 없었을 겁니다. 반면 그런 개성적인 작가들이 데뷔하고 성장할 수 있던 것은 대본소 만화의 토양이 아니면 안되었으니 (데즈카 오사무만 해도 젊을 때 도쿄 갔다가 그림 못 그린다고 얼마나 설움을 받았는데;;) 이 '두 개의 시장' 존재하지 않았다면 현재의 일본 만화도 없었겠지요. 하지만 지금의 만화계는 상업 출판만화 시장 하나밖에 없으니 포화상태에 달한 이후 시장으로써도, 창작력으로써도 침체하는 요인 중 하나다...라는 요지입니다.

이렇게 50년대 만화업계 얘기를 지리하게 늘어놓는 것은 애니메이션 쪽으로 치면 (세부 사정이 상당히 다르기는 하지만) 일단 주류-비주류 측면의 공통점에서 TV 애니메이션과 80-90년대의 OVA 애니메이션을 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넓게는 아동용이 아닌 극장용 애니도 포함) 비주류적 시장 성립의 배경은 50년대는 한국전쟁 특수로 입은 경제호황, 80년대는 버블경제...라는 점도 비슷합니다. 다양한 실험과 시도, 혁신이 가능하다는 비주류의 장점도 공유하고 있구요. 그만큼 위태로운 시장이기도 합니다. OVA의 몰락이 초래한 것은 (물론 OVD가 아예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전성기 때의 오리지널성, 퀄리티, 파급력은 아님) 주류 외의 '대안'을 찾기 힘들어졌다는 점과 '모에코드/성우만 우려먹는다' 류의 비판을 면치 못하는 혁신의 어려움이 아닐까 합니다. 사실 TV용 애니메이션은 투자되는 자본과 공개 루트에 들어가는 자본상 앞서 나카노가 우려한 출판만화보다도 훨씬 제한적인 입지에 놓이게 됩니다. 기본적으로는 1인 창작자에 [애프터눈] [모닝]같은 계열이 (근근히) 유지되는 만화와 달리 제작과 보급에 훨씬 많은 인력과 돈이 투자되는 애니메이션은 수익의 안정성을 추구하기 위해 트렌드에 민감하면서도 새로운 트렌드를 낳기에는 어려운 위치에 놓입니다.

좋게 말하자면, TV용 애니메이션은 그 시대의 최첨단 트렌드를 반영하는 매체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많은 자본이 투자되고 유행에 민감한 어린/젊은 층을 주 대상으로 삼고 있으니 당연합니다. 그래서 [요즘 애니 볼 게 없다]는 말은 최신 트렌드가 그다지 취향에 맞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일종의 세대차라고도 할 수 있지요. 그리고 그 트렌드 중 하나가 현재는 마침 모에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누구나 다 최신 패션을 입고 다닐 필요는 없듯이 애니의 취향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문제는 그 외의 선택지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랄까요. 굳이 비유를 하자면 샤넬이나 샤넬 짝퉁만 있고 고딕 로리타 패션은 통 보이질 않는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샤넬과 샤넬 짝퉁...아니 모에 코드만으로는 만족이 안 되는 수용자를 위해 몇가지 전략이 사용되는데, 그 중 하나는 오랫동안 사용해왔던 원작 있는 작품으로 화제 모으기고 또 하나는 좀더 새로운 것으로 복고 코드입니다. 이것은 안전성을 추구하는 주류 자본의 특성상 자연스러운 귀결입니다. 할리우드가 리메이크와 속편을 선호하는 이유도 안정성 때문이지요. 나쁜 말로는 게으른 거지만 거칠게 분류하자면 최근 몇년간의 인기 작품은 극단적으로 복고계(리메이크 및 복고 코드의 노골적 채용)와 모에계, 혹은 그 둘의 적절한 조합이 대다수라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는 [그렌라간] 및 에반게리온 극장판들) 이 복고 코드는 현재의 모에 코드에는, 혹은 모에 코드만으로는 만족이 안되는 좀 색다른 것을 원하는-혹은 90년대 중반 이전의 애니를 그리워하는 올드한 성향의 시청자들에게 어필합니다. 어떻게 보면 과거에는 OVA를 봤을 애니메이션 팬을 복고적 향수로 묶어두려고 하는 셈이죠. 사실 복고주의는 그 특성상 모에 코드보다 잠재적인 위험요소가 클 수도 있지만 어쨌든 잘 팔립니다(!)

요는 [볼 애니가 없다]는 말은 세대차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제한된 산업구조의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모에도, 복고도 싫다는 경우는 어떻게 하냐구요? 그야 시대에 맞춰 변하지 못하는 자신의 구닥다리 센스(...)를 원망하며 초야에 묻혀서 영광스러운 과거를 그리는 시를 읊거나 정권이 바뀌...아니 트렌드가 바뀌기를 조용히 기다리며 때(?)를 노리거나, 분하면 자기가 만들거나(!) 그것도 안되면 그래도 자기 취향에 좀 맞는 애니를 발굴하는 네트워크를 찾아보거나 스스로 개척하고 정보를 공유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요는 스트레인저같은 애니를 잘 찾아서 보라는 말임. (결론은 그거;)

사실 애니계 트렌드를 생각해보면 무지 독보적이지 않은가!
극악의 흥행율과 인지도가 애니계의 다른 일면을 말해주기도 하지만

'경박한' 모에도 없으면서 '지루한' 작가주의도 아니고 무려 재미있고(!) 볼거리(액션)도 풍성한! 엄청난 작품!!


......................온천씬은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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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바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