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2008. 1. 5. 03:39


1968년 미국. 베트남 전쟁과, 반전 평화운동과, 히피와 마약과 흑인민권운동과 여성해방 운동이 공존하던 시절.
가장 위대한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이 암살당한 그 해에 할렘에서는 또다른 흑인 지도자의 죽음이 한 시대의 종말과 새 시대의 개벽을 알린다. 물론 최후까지 비폭력을 지향하던 평화주의 운동가였던 킹과는 달리 할렘의 사나이 엘즈워스 죤슨-머리 뒤에 난 혹 때문에 통칭 "범피"라고 불리었던 그는 피와 폭력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던 갱스터였다. 마피아에 고용된 행동대원으로써 (이탈리아인도 아니고 더더욱 백인도 아닌 갱스터가 정식 마피아 조직원이 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범피의 입지도 언제까지나 '고용인'에 불과했다), 혹은 할렘의 흑인조직들을 이끌거나 보조하면서, 영화의 시작에서처럼 자신을 거역한 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산채로 불태워 처형하는 살인자요 범죄자에 불과한 그가 동시에 추수감사절에 할렘의 주민들에게 칠면조를 나눠주는 자애로운 영웅이기도 한 것은 그러한 갱스터 외에 존경할만한, 우러러볼만한 가까운 흑인이 할렘에 거의 없었다는 안타까운 사회적, 경제적 현실의 탓이 크다. 이민 초기에 미국 주류사회로부터 극단적인 차별과 멸시를 받던 가난한 이탈리아인들이 세련된 양복차림에 비싼 차를 타고 당당하게 거들먹거리는 마피아 보스 외에는 동경할 대상이 거의 없었던 상황과 다를 바가 없는 셈이다. 이렇게 미국 사회에서 소외된 인종계층의 갱스터 "영웅"이라는 미묘한 위치는 미국의 조직범죄라는 존재와 그들을 그려낸 갱스터물이라는 장르의 특수성과 한국의 조폭물과는 분명히 차별되는 특성을 가지게 한다. 바로 인종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아메리칸 드림이다. 특히 60~70년대에 실존했던 성공적인 흑인 갱스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영화에서 그것들은 중요한 키워드이기도 하다.  


덴젤 워싱턴이 분한 프랭크 루카스는 범피의 심복으로, 그의 옆에서 할렘에서의 생존법과 동시에 이미 거대하고 체계적인 조직범죄 시스템을 유지하던 마피아의 방식-즉 흑인 정체성과 백인의 테크닉 양쪽을 흡수할 수 있던 특수한 위치에 놓인 인물이었다. 범피는 확실히 휘어잡을 수 있는 지역상권 대신 '주인'을 알 수 없는 대형 할인마트와 수입품이 범람하는 새로운 시대의 정체를 찾지 못한 채 죽어가지만 젊은 프랭크는 그곳에서 새로운 기회와 '사업'의 가능성을 본다. 전통적으로 마약은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생산되 프랑스를 경유해 미국으로 밀수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프랭크는 베트남 전쟁이라는 상황을 유리하게 이용, 직접 생산자와 거래해 순도 높은 마약을 얻고 중간거래상을 배제한 채 미군운송기를 이용해 마약을 운반한다. 물론 뇌물과 연줄 등 그만한 대가와 함께 미군의 부패라는 적절한 환경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거기에 프랭크는 마약을 "마치 펩시처럼" 브랜딩한다. 작은 푸른 봉투에 넣은 [블루 매직]이라는, 유사제품에 비해 가격도 저렴하고 마약으로써의 품질까지 우수한 (물론 순도가 높은만큼 인체에는 훨씬 더 해롭지만) 새로운 브랜드로 말이다. 시대를 잘 간파하며 자신의 이익에 적절히 이용하는 통찰력과 번뜩이는 아이디어, 경쟁자나 장해물을 제거하는 능력은 제품이 마약이고 간간히 폭력을 동반할 뿐이지 (사실 그것이 바로 합법적인 사업가와 갱스터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촉망받는 종류의 사업가 마인드와 다름이 없다. 무엇보다 그의 성공은 흑인이지만 '노력'을 통해 훌륭한 자본가가 되어 성공한다는, 바야흐로 인종주의를 극복한 자본주의 성공 스토리, 궁극적인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환영의 실체화를 상징한다. 프랭크를 마약왕으로 지목한 형사의 보고를 듣고 "흑인 갱스터 주제에 (백인) 마피아조차 못해낸 마약 직거래를 해낼 리가 없다"는 FBI 요원의 분노와 불신이 섞인 인종주의적인 발언은 역으로 뛰어난 흑인으로써의 프랭크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며 기묘한 통쾌함마저 느끼게 한다. 비록 그것이 범죄의 영역이지만 말이다. 또한 프랭크는 어떤 종류의 고전적인 아메리칸 가치관 역시 내재하고 있다. 사생활이나 품행에서 드러나는 인간적인 면에서도 프랭크는 성공을 지나치게 뽐내지 않고 매우 신중하고 겸허하게 행동하며, 사업가로써도 브랜드의 퀄리티를 고집하는 '정직'하며 성실한, 거의 청교도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성공한 그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상류층 백인들이나 사는 고급 주택가에 저택을 구입하고 고향에서 고생하는 어머니와 가족 친척들을 불러모아 효도하는 것이다. 어찌 아니 호감갈 수 있겠는가. 비록 백주대낮에 사람 머리통을 날려버리고 그가 파는 순도 높은 고퀄리티 마약이 할렘의 수많은 흑인 동포들을 파멸시키고 있지만 말이다. 현재에도 프랭크만큼 번듯하고 점잖지는 않지만 폭력과 범죄, 일확천금을 주로 음악과 영상을 통해 미화하는 '갱스타 gangsta' 문화가 흑인문화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면, 성공한 범죄자를 영웅시하는 트렌드는 미국사회 속의 인종주의와 흑인의 입지의 현주소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다행히 이 영화는 아슬아슬하게나마 그 단계에 머무르지는 않지만 말이다.


만약 이 영화가 한명의 흑인 갱스터의 성공스토리에 불과했다면 윤리적 문제 뿐만 아니라 [아메리칸 갱스터]라는 거창한 제목을 달기에도 턱없이 부족했을 것이다. 그 평형추로 작용하는 것이 바로 동시적으로 진행되는, 러셀 크로우가 분한 뉴욕시 경찰 리치 로버츠의 이야기다. 앞서 프랭크의 직거래가 가능했던 것은 베트남전쟁과 부패한 미군이라는 존재 덕분이라고 했듯이 사실상 미국의 마피아를 비롯한 거대 범죄조직들이 큰 힘을 행사하게 된 배경에는 정부와 공권력의 무관심과 부패라는 크나큰 환경적 혜택(?)이 있었던 것이다. 범죄조직들을 검거하기는 커녕 뇌물 수수, 증거물 빼돌리기, 압수 마약 되팔기 등의 '비즈니스'가 공공연히 이루어지는 경찰사회 안에서 거의 유일하게 양심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리치는 동료들에게 있어 미운털 박힌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그의 유일한 장점인 청렴함이야말로 마약매매를 제대로 검거할 수 있는 힘이라고 제대로 파악한 연방정부에 의해 리치는 특수 수사팀의 팀장이 되어, 가장 활발히 도는 마약 [블루 매직]의 근원지를 추적해간다. 범죄자라는 것 외에는 모든 점이 호감 가고 존경할만한 프랭크와는 달리 리치는 무책임하고 거친 성격의 지독한 바람둥이에 빵점 아버지요 남편이지만, 오로지 단 하나, 청렴함이라는 가치가 있다는 극단성을 공유한다. 사실 프랭크와 리치가 공유하는 것인 비단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프랭크의 적은 라이벌 흑인 갱단뿐이 아니라 기존의 마약 상권을 빼앗긴 데에 불만을 품은 마피아와 수시로 뇌물을 요구하는, 어떻게 보면 마피아보다 훨씬 더 질이 나쁘고 비신사적으로 행동하는 (물론 그나마 '동종업계'인 마피아와는 입장의 차이가 있으니 당연하겠지만) 부패경찰들이라는 거대한 불법적, 합법적 백인 조직들이다. 리치의 적은 마약을 공급, 유통하는 뉴욕 어딘가의 범죄조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허용하고 거래까지 하는 경찰 동료들이다. 또한 프랭크가 범피로부터 계승한 원리원칙에 충실한 '성실함'은-비록 그것이 범죄일 지언정- 경찰로써의 원리원칙을 지키려는 리치의 '청렴함'과도 기묘하나마 분명히 통하는 데가 있다. 따라서 이 두 남자의 이야기와 공유점이 갱스터가 영웅이 되고 경찰과 참전용사가 타락하며 명분이 불투명한 전쟁 속에 마약에 찌들어가는, 어떻게 보면 여전히 인종주의가 존속하고 여전히 머나먼 남의 나라의 전쟁터에서 죽이고 죽어가는 현재와도 이어지는 미국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해체하며 그것과 투쟁하고 개혁하려는 방향으로 유도되는 것은 이 시대의 갱스터 영화로써 자연스러운 결말인 셈이다. 현대 미국이라는 판도라의 상자에서 빠져나온 온갖 악하고 해로운 것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이 현실에서, 상자에 마지막으로 남아 빛나는 것은 갱스터의 사업원칙이든 경찰의 청렴함이든 어떤 진솔하면서 보편적인 '윤리'라고 이 영화는 역설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 무엇보다 '실적'이나 '실리주의'에 지나치게 가치가 편향된 나머지 모든 것의 바탕을 이루는 기본이나 원칙에 대한 개념조차 망각된 듯한 대한민국의 현실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큰 메세지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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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바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