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서○문화사에서 나오는 국내판이 하도 인체 단면이나 내장탕같은 교육적인 부분에 과도한 화이트질을 가해서 은연중에 짜증이 난 것도 있습니다만...사실은 다음 내용이 너무너무 궁금해서 번역판이 나올 때까지는 못 기다려서...가 주 이유입니다.
.......웬일로 화이트질 가할만할 장면은 목 단면밖에 없어서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하고 약간은 좌절했습니다. 하지만 내용이 재미있었으니 뭐 됐지요. 게다가 이 작가의 특성상 문장이 무척이나 담백 간결하여, 쉽게 읽힌다는 점이 좋더군요. (모○니 모○루 만화 정도의 난감한 문장을 원판으로 읽으면서까지 자학하는 취미는 저에겐 없습니다. 언제까지나 한때의 실수였지요...덧붙이자면 그 작가의 모 시리즈가 한양문고의 [추리만화] 장르에 올라가 있던데 정녕 그래도 되는지, 김전일이나 코난 찾을 독자들에게 그래도 되는건지 은연중에 걱정이...;;)
국내에도 정식판이 나와서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알렉산더 대왕의 서기관 (나중에는 장군)인 에우메네스의 어린 시절과 성장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플루타크에 의하면 에우메네스는 알렉산더가 건설한 마케도니아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그리스인으로, 총명한 문장가이자 변설가였을 뿐만 아니라 군사로써의 능력도 출중했지만, 출신이 다른 그리스인이라는 이유로 마케도니아 내에서는 내내 왕따를 당하고 특히 알렉산더의 친구(...) 헤파이스톤과 사이가 나빠서 그 때문에 왕과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으며 (그러나 그 역시 알렉산더와 친구라 극단적인 조취는 없었다고 함. 참고로 그런 쪽(...)의 친구는 딱히 아니었던 것 같음.), 왕의 사후에 그 뒤를 잇는 빼어난 실력자 중의 하나로 거듭나지만, 결국은 출신 때문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되는 인물입니다.
아무튼 이 흥미로우면서도 그렇게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편은 아닌 에우메네스, 그의 불투명한 배경과 어린 시절을 [기생수]로 유명한 작가 이와아키 히토시가 상상력과 고대 지중해 국가들의 문화, 지리, 역사에 대한 자세한 고증, 그리고 당시 역사와 정치적 상황을 바탕으로 그려낸 것이 바로 [히스토리에]입니다. ([유레카] 때 혹시나 했지만 작가는 고대 그리스에 모에하나 봅니다. 뭐 좋습니다. 저도 그리스 좋으니까요.)
미리 말해 두지만, 그림체는 (물론 선은 많이 깔끔해졌지만) [기생수] 때와 거의 변함이 없습니다. 주인공도 그 주인공이 그 주인공이구요. (하지만 이 작가의 맹한 듯하면서도 날카로운 주인공 타입을 좋아하니까 개인적으론 불만 없음) 조연들도 그 아저씨가 그 아저씨 같고 그 아가씨가 그 아가씨 같지요. 하지만 만화는 내용이지요 아무렴...그림이 내용에 잘 맞고 스토리를 잘 살려주니까 된 겁니다. 게다가 섬뜩한 박력이 있는 액션도 뛰어납니다. 틈틈이 (긴장감이 최고조인 장면에서도) 개그도 툭툭 던져주어서 귀엽구요.
내용은....혹시나 아직 못 읽으신 분들을 위해 자제하지만, 아무튼 서기관이 된다는 점을 살려서인지, 만화 주인공으로써는 꽤나 드물게 완력이나 타고난 (초)능력보다는 지혜과 순발력, 지식와 재치를 무기로 삼는 주인공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런 두뇌회전이 중시되는 내용임에도 너무 드라이해지거나 살풍경해지지 않고, 캐릭터들이 하나같이 살아있다는 점도 훌륭한 조화입니다. 고대 그리스라는 배경과, 그 사회의 다양한 이면을 보여주는 점도 좋구요. 아무튼 1권은 청년 에우메네스의 등장과, 소년 시절의 회상이 시작되는 부분입니다.
초반부 클라이막스에 해당되는 2권은....신데렐라였습니다. (쿨럭;;) 사악한 계모(...아저씨잖아;)에게 구박을 받고 수난을 당하는 에우메네스! 그래도 꿋꿋이 재기와 의지로 버티는 소년! 너무 바람직해서 보기 좋더군요! 어린이라는 나약한 입장인데다가 처지도 거의 최악이지만, 그래도 궁상에 빠지지 않고 약하고 힘이 없는대로, 그나마 있는 것을 잘 살려서 버틸 수 있을만큼 버티며 열심히 살아가는 주인공이 좋아요. (좀 전형적일수도 있지만 요즘은 보기 힘든 타입...)
3권에서는....왜 주인공만 안 당했는지 의문이 생기더군요. 보니까 그 아저씨 취향 참 광범위(...)하던데? 혹시 용도(...)가 달라서? (←리얼하게 생각하면 역시 이것일 듯; ) 내지는 좀더 성장한(...) 소년이 취향이라서 더 클 때까지 기다린 것??; 아무튼 답은 바닷바람에 날려가 버렸다...;....우여곡절 끝에 청소년으로 성장하는 에우메네스와, 그의 인생의 새로운 전환기를 예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늘 생각하는 거지만 왜 이 작가의 주인공들은 여복이 있는 듯 하면서 결국은 잘 안되는거냐! 내지는 히로인은 엄마로 해결!--이냐!;; 아무튼 주인공의 어린 시절의 기억/꿈에 대한 한가지 의문점도 풀렸고, 결국은 여자친구보단 동성친구가 낫다...라던가(...뭐 그것도 나름대로의 아픔의 표현이겠지만...), 은연중에 주인공 최대의 위기(?)가 잘 지나가서 다행이라던가, 등등의 강한 인상이 남아서 돈이 아깝지 않았지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뛰어난 점 중 하나는 캐릭터의 깊이를 알게 해주는 감정, 심리묘사라고 다시한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정작 [누구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너무나 슬퍼서 밥도 못 먹고 잠도 못자고 밥상에서도 울고 빨래를 하면서도 울고 몸에 열이 나고 어쩌고...]하는 식의 직설적인 독백은 (요즘 저런 식의 독백이 난무하는 모 아동소설 원작 만화의 작업을 돕느라 좀 지쳐있었음-_-;) 없고, 단편적으로 나오는 생각이나 무심결에 실언처럼 튀어나오는, 혹은 말해야 하는데 미처 말하지 못하는 대사들은 오히려 리얼하고 그래서 더욱더 와닿습니다. 사실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그 순간은 감정이 너무나 격앙되서, 혹은 어색해서, 혹은 어쩔 줄 몰라서, 혹은 너무나 괴로워서 100%의 본심이 아닌 그 중의 10%나 30%밖에 내뱉지 못하는 게 말이고, 겉으로 나오는 행동입니다. 대사가 없는 연출에서도 이런 식의 절제미와, 오히려 그 때문에 더 강하게 느껴지는 감정의 깊이와 다면성, 그리고 그런 복잡함을 겹겹으로 간직한 캐릭터들과 그들이 살아 숨쉬는 스토리, 아마도 그것 때문에 저는 [히스토리에]에 끌리는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