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만화 대여점에 들렀습니다. 출퇴근 루트에서 미묘하게 어정쩡한 위치라 한동안 못 가고 있던 단골가게였는데, 사실 대부분의 볼만한 신간들은 집 근처의 대여점에서 빌려본 터라 뭔가 다른 것은 없을까 하고 설왕설래하던 중, 마침 [죠로쿠의 기묘한 병]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마도 요즘 빠져 지내는 [죠죠의 기묘한 모험]과 제목이 조금 비슷해서였을 겁니다. (...정작 내용은 아무 상관 없음...) 그리고 마침 공포만화를 봐도 괜찮은 기분이었던 이유도 있습니다. 그래서 빌려와서 어제밤 읽어봤습니다.
[죠로쿠의 기묘한 병]은 히노 히데시의 단편 네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죠로쿠의 기묘한 병], [물 속], [생쥐], 그리고 [백관 도깨비]입니다. 장르적으로 공포만화인만큼 징그럽고 괴기스러운 묘사가 난무하기는 하지만 정작 내용적으로는 [생쥐]를 제외하면 공포물이라기보다는 슬픈 이야기나 때로는 감동적인 이야기에 가까워서 좀 의외였습니다. 다른 말로는 어느 정도의 비위만 극복할 수 있으면 (생각해보니 그것도 [죠로쿠의 기묘한 병] 정도지 나머지는 그다지...) 슬프거나 찡한 이야기를 읽고 싶을 때 봐도 좋은 책입니다.
[죠로쿠의 기묘한 병]은 죠로쿠라는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아둔한 젊은이가 일곱가지 색깔의 고름이 나오는 종기가 온 몸에 번지는 끔찍한 병에 걸려 마을로부터 격리되어 죽어가는 동물들이 간다는 늪 근처에서 고통스럽고 외로운 나날을 보내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런 죠로쿠의 유일한 낙은 일곱가지 색깔의 피고름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저런 병에 걸릴 아무런 당위성도 이유도 없는 주인공이 왜 저런 험한 일을 당해야 하는지 혼돈스러웠지만, 마지막까지 보니 사실 죠로쿠는 고통스럽고 고독한 천재 예술가를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이해하면 모든 것이 설명이 되지요. 그래도 마지막이 슬픈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만.
[물 속]은 교통사고를 당해 얼굴이 일그러지고 팔다리가 절단되고 바깥에 대한 공포와 트라우마에 집안에만 틀어박힌 채, 형형색색의 열대어가 헤엄치는 수조 속의 세계만을 유일한 상상과 모험의 장으로 삼고 있는 한 소년과, 그 소년을 정성껏 돌보는 어머니의 이야기입니다. (이걸 보고 [장애가 있다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안돼!! 블랙잭 선생님 재활 도와주세요!!]--라고 생각한 나도 참....-_-;;) 기울어져가는 살림을 위해 어머니는 아름답게 꾸미고 물장사를 하게 되지만 술과 일에 치여 점점 아들을 학대하게 됩니다. 다양한 종류의 열대어의 생태를 통해 묘사된 인물과 상황도 인상적이었지만 그보다 후반부에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복받쳐 올라오는 연출과 서술이 강렬하게 남는 작품이었습니다. 특히 마지막에서는 어떻게 보면 [죠로쿠]와도 유사한 어떤 의미의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왜 그렇게도 슬픈 것인지요. 생각해보니 이 작가의 작품이나 여타 일본 작품에서도 지극히, 지극히 개인적인 '해탈'이나 '초월'이 나오기는 하지만 이에 대한 감상은 작가가 의도한 바와 엇갈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왠지 히노 히데시가 그린 '초월'이 너무나 슬펐습니다. 일본적 미학을 이해하지 못해서인지, 정말 슬프도록 그려내서인지는 잘 몰라도요. 그러니까 굳이 말로 하자면...[이것도 나름대로의 행복일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나는 너무 슬프다]라고 할까요?
[생쥐]는 가장 전형적인 공포물입니다. 애완동물로 들여온 생쥐가 통제불가로 폭주해서 점점 몸집이 커지고 온 집안이 생쥐에게 휘둘리는 공포의 도가니가 된다는 내용인데 개인적으로는 무서웠다기보다는........[우하하하! 니카이도([닥터 스쿠르]의)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만화다!].....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습니다; (니카이도라면 틀림없이 끝까지 보지 못하고 중도에 기절할 것임...>▽<;) 그런데 저 가족은 왜 이사를 안 가고 있는 건지 원....
[백관 도깨비]는 가장 덩치가 큰 형제를 내세워 도깨비 가면을 쓰고 도둑질을 하며 꿋꿋이 살아가는 고아 남매들의 이야기입니다. (....솔직히 꿋꿋이 살기는 하는데 주위에는 엄청난 민폐겠지만....) 이 이야기의 주제이자 중점은 ([브로크백]의 중점이 "경제성"이었던 것처럼...) "먹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도둑질을 하고 훔친 물건을 되팔기 위해 간 도시의 평민들은 기근으로 죽어가고 있고 아이들 역시 겨울에 굶주림과 직면하게 되지요. 그래서인지 결말이 엽기적일 수 있는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동적이고 숭고하기까지 합니다.
[죠로쿠의 기묘한 병]은 공포만화를 기대하고 본다면 단번에 [속았다!!!] 끝까지 가서도 [또또또 속았다!]라고 치를 떨 수도 있지만 독특한 분위기와 기묘하면서 특이한 그림, 그리고 슬프면서 찡한 스토리 때문에 볼만한 가치는 충분한 만화입니다. 그래도 궁금한 것이 하나 있는데, 아라키 선생님은 [죠로쿠의 기묘한 병]을 참고로 [죠죠의 기묘한 모험]이라는 제목을 지었을까요? 궁금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