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2009. 1. 4. 00:36

도도한 보드리야르 선생

시뮬라시옹이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커뮤니케이션 이론이나 문화이론 계열을 파다보면 반드시 나오는데
쟝 보드리야르라는 일각에서는 신이요 일각에서는 얄미운 기집애인 포스트모던 학자가 세운 개념입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은 TV화면같은 매체를 통해 만들어진 현실 즉 '가상'에 둘러싸인 상태라는 것이죠.

극단적으로 말해서 지금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에 융단폭격을 가하고 있는 현실도 한국에서는 영상과 기호로만 전달되니까 아무리 사람이 많이 죽어나가도 우리에게는 리얼이 아닌 시뮬라시옹된 가상현실인 셈.

[매트릭스]에서 이 관념을 참 (지나치게) 단순화시켜서 영화적으로 표현했는데 물론 보드리야르 본인은 불란서인 학자답게 천박한 할리우드 놈들(...)의 해석을 탐탁치 않아 했지만 대략 이미지적으로 상상하기는 쉬울 겁니다.
 
왜 새해 벽두부터 이런 헛다리 잡는 듯한 소리를 하는 거냐면 굳이 매트릭스나 중동전쟁같은 먼 곳까지 찾지 않아도 너무나 가까운 곳에서 매우 적절한 사례가 제시되었기 때문에(!) 바로 보신각 전야제 KBS 생방송 보도.

일단 썩어도 준치라고 언론학 전공자로써 (가녀린 폐가 짓눌리는 과정에도) 가장 궁금했던 것은 역시, 온갖 야유와 항의 피켓으로 가득찬 보신각 상황이 일반적으로는 밝고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보신각 라이브 중계 TV 상에 어떻게 '보여졌는가'라는 점과 드문드문 보였던 무대의 화면에는 맨 앞까지 빼곡히 들어선 시위대가 기막힐 정도로 전혀 안나왔다는 점이었죠.

물론 만여명의 경찰력의 힘도 있었지만 군중 소리 완전차단(!), 작년 영상 및 소리 재활용 (심지어 오세훈 시장 등장시의 엄청난 우우우우~~~야유마저 꺄악꺄악 박수소리로!), 초정밀 선택적 카메라 앵글, 경이로운 수준의 편집기술로 탄생한 초 건전한 보신각 타종행사!!! 즉 그 때 시위대는 목도 쉬고 납작오징어가 되어가며 그곳에 있었으나 그 방송에 의하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라이브 생방송이었는데 그것을 해내다니! 이것이야말로 궁극의 시뮬라시옹이 아닙니까! 무엇보다 무슨 머나먼 나라의 위성 중계된 전쟁도 아니고 바로 가까이서 지극히 근접한 거리 내의 '리얼'을 생중계로 이렇게까지 차단하고 전혀 다른 의미로 재생산 해내다니 영상기술적 측면으로나 방송윤리 측면으로나 명목은 민주주의 국가라는 맥락 아래서의 표현의 자유 문제 등 여러가지 차원에서 실로 탄복할만한 작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커뮤니케이션, 포스트모던 연구자들에게 굳이 먼 곳 찾을 것 없이 적절한 국내사례를 제공해주는 학문적 기여에 더불어, 이대로 가면 조만간 [의지의 승리]급의 프로파간다 뮤직비디오도 생산해낼 듯...KBS 천잰데?!

'시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학교 가는 길에  (4) 2009.01.21
2D적 리얼  (3) 2009.01.05
이상형 조합해 만든 ‘여친 로봇’ 개발 화제  (9) 2008.12.17
오늘의 개그  (2) 2008.11.28
자...장보고 장군이...  (3) 2008.11.27
Posted by 시바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