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2007. 10. 28. 01:48

지난 주 동안 캘리포니아와 함께 북미 뉴스 사이트를 불태운 또 다른 불똥이 있었으니, 바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헤리 포터] 시리즈의 작가 조앤 롤링이 덤블도어를 아우팅(동성애자가 자신의 성적 성체성을 스스로 공개하는 '커밍아웃'이란 단어에서 나온 말로, 타인에 의해 동성애자임을 공개 당하는 것을 의미.)한 사건이다.
캐나다 토론토의 국제 소설작가 축제에서 (립 축제도 그렇고 캐나다는 여러모로 바람직한 축제가 많다) 롤링은 소설과 캐릭터들에 대한 질문을 받던 도중 [덤블도어는 원래부터 게이였다]고 밝혔다.

이 발표에 북미, 아니 세계의 해리 포터 팬들이 뒤집혔다고 하고 작가 자칭 왈+언론에서는 이것이 성적 소수자들의 인권 향상에 도움이 될 거라는 둥, 반면 원작에는 전혀 동성애자라는 점이 힌트되지 않으니 이런 뒷북성 발표는 무의미하다는 둥, 원작에서 그런 힌트를 발견하지 못한 것들은 편견에 사로잡힌 수구꼴통이라는 둥 영어권 사이트에서는 여론이 들쑤셔 놓은 벌집처럼 아수라장 상태이다. 개인적으로 이 소식을 듣자마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속된 표현으로 참말로 무책임하다는 감상이었다. 원래 내가 [해리 포터] 시리즈로부터 담을 쌓게 된 계기는 소설 자체의 문제도 있지만 (편집자는 대체 뭘 하는 거냐!!! 자를 건 자르란 말이다!) 인터뷰나 기자회견 등에서 작가 롤링이 보여준 비전문성이랄지, 프로의식이나 작가의식의 결여랄지, 좋게 붙여봤자 아마추어리즘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어떤 철부지 없음을 참을 수 없었던 것도 있다. 물론 여기에는 의도적인 작품 홍보를 위한 것도 섞여 있지만 소설 자체의 잡탕스러움과 허술함, 오리지널리티의 부족함에서 엿볼 수 있는 롤링 본인의 아마추어스러움도 분명히 존재한다. 사실 그 허술함과 어설픔, 그로 인한 독자와 작가 간의 극도의 거리 좁히기야말로 해리 포터 시리즈의 성공 요인이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을 정도로 단점이 아니라 장점으로써 더 크게 작용하였으니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다. 롤링 본인이 신인 작가고, 그녀의 개인적인 인생역전이 해리포터를 둘러싼 드라마의 큰 축이었다는 점을 감안해 시간이 지날 수록 그녀의 소설과 작가의식은 조금씩 성숙해질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4권에서 캐릭터의 죽음을 쓸 때 너무 슬퍼서 펑펑 울었다는 발언에는 정말로 작가의식이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워졌다. 물론 캐릭터를 다룰 때 울든 불든 그건 창작자의 자유다. 단지 문제는 그것을 공개적으로 밝힌 점이다. 사견이지만 프로 작가와 아마추어 작가의 차이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얼마나 '거리 두기'가 가능하냐는 것으로 판가름 된다고 생각한다.


우선 프로와 아마추어의 가장 근본적인 구별 기준은 프로는 자신의 일이 곧 생계와 직결된 본업이라는 것이고 아마추어는 본업은 아니고 언제까지나 애호가라는 것이다. 직업으로써 자신의 작품을 팔아 금전적인 대가를 받는다는 것은 곧 작품이 자신의 것이되 그렇지 않음을-동시에 공공의 것이 됨을-인정하는 행위다. 따라서 공적인 영역에서는 독자의 취향 및 해석의 다양성을 존중해 그것에 작품 외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작가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은 가능한 자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작가 인터뷰의 기본을 숙지하는 기자의 질문은 결코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가 아닌, '가장 다루기 쉬운 캐릭터'나 '가장 자신과 닮은 캐릭터'를 물어보는 이유가 그것이다. 실제로 자기 자신의 취향과 만족도 있지만 독자를 생각하고 써야 하는 작가로써도, 독자의 입장을 생각하며 쓰게 되기 때문에 작품에 깊게 개입하면 할수록 캐릭터와 좋아한다는 말만으로는 묘사하기 어려운 복잡한 관계를 맺게 된다. 그렇기에 캐릭터를 내용상 죽여야 했을 때 펑펑 울었다는 롤링의 고백은 어딘가 프로답지 못하며 무엇보다 그 캐릭터가 사실 내용상 별로 중요하지도 않았고 묘사를 보면 작가의 애정도도 그다지 보이지 않고 단지 [해리포터 최초의 작중 사망 캐릭터] [작품의 '어두움'과 '심오함'과 주인공의 사춘기 혼란을 위한 장치] 정도의 도구적 기능만 하는 것을 감안하면 다소 작위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이런 식의 작가적 프로의식의 부족함과 반면 '누가누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식의 선정주의적 호기심 마케팅 솜씨에는 매우 프로페셔널한 모습이 소설가 조앤 롤링의 공적인 두 개의 얼굴이다. 따라서 소설 시리즈가 다 끝난 마당에 캐릭터들에 대한 원작과 하등 관련 없는, 원작에 명시되지도 않았던 파격 설정을 뱉어내는 이번 사건도 그와 같은 연장선 상에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내가 롤링의 저 발언에 대해서 무책임하다는 생각부터 든 것은, 일단 원작에 하등 관련도 없고, 암시된 적도 없는 설정이라는 점과, 그냥 무책임하게 튀어나오기에는 성적 소수자의 미디어 묘사라는 특히 서구권에서 매우 민감하고 큰 이슈에 대한 발언이라는 점이다. 전자에 대해서는 대체 어디에 그런 암시가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지적해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부뇌증(腐腦症: 머리 속이 남남상열지사로 꽉 차서 점차 뇌가 썩어가는 증상. 동인녀들에게서 발견된다.) 경력이 1, 2년이 아닌데 어디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냐라던가 지금 장난치는 건지 따지고 싶다. 덤블도어가 진정 게이던가 삐리리 성향이 있었다면 간달프옹 사루만옹처럼 동인녀들이 내버려뒀을 리가 없잖은가. 굳이 말하자면 해리와는 수상한 사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건 아동성애의 영역에 더 가깝다. 단순히 롤링이 동성애=아동성애라는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있다면 또 얘기가 다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원작 내에서 최소한의 암시도 되지 않는 뒷설정을 공개하는 의미가 없다. 지나치게 복잡한 뒷설정 때문에 팬과 안티가 극명히 갈리는 알파시스템이지만 재수없는 청하야미가 설정상으로만 존재하지는 않고 실제로 재수 없어지는 하야미로써 게임 내에 반영하는 최소한의 개념이라도 있었지 (게임 [건퍼레이드 마치] 얘기다)이 무슨 뜬금없는 짓거리냔 말이다. 진정 작가라면, 작품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작품을 통해 말하라는 것이다. 즉 덤블도어 외전으로 게이소설 쓸 것도 아니면 괜히 뒤흔들지 말고 입 닥치시라. 오죽하면 독자 갖고 그만 놀라는, 작품은 작가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공공의 것이니 상상의 여지를 침해하는 뒷설정 따위는 집어 치우라는 해리 포터와 입닥칠 줄 모르는 작가라는 처절한 제목의 기사까지 쓰여졌겠는가.

또한 여전히 민감한 영역인 성적 소수자의 표상을 빌미로 마치 소수자 인권을 대변하는 것처럼 이런 초무책임성뒷북질을 정당화하는 작가와 여론도 부적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덤블도어의 아우팅 직후, [그럼 왜 그걸 원작에는 밝히지 않았습니까]라는 질문에 롤링은 질문한 사람을 째려보며 [당신이 작가라면 그 정돈 아시겠죠]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요는 사회적 터부시 때문에 원작에 미처 밝히지 못하고 뒷북을 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인데...물론 뒤에 가서 어두움이니 심오함이니 어쨌던 해리 포터 시리즈도 시초는 아동소설을 표방했던 만큼 주요 캐릭터를 동성애자로 묘사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그래도 변명은 되지 않는다. 왜냐면 간접적인 장치나 은유법으로 본질 그대로는 다루히 힘든 소재를 표현하는 것이  바로 픽션의 진정한 힘이기 때문이다. 둘리가 공룡인 것은 인간 어린이가 어른에게 대들었다간 검열에 걸렸기 때문이다. 벅스 바니의 여장 취향에서 드러나는 성적 모호함과 톰과 제리의 복합 SM적인 관계는 분명히 작품 내적에 존재하는 '위험한' 소재지만, 동물 캐릭터라는 점, 과격하게 과장된 묘사, 만화영화라는 '가벼움'을 적절한 방패와 전략으로 삼아 사회적 제재를 피했다. 한마디로 작가적 역량이 부족해서 묘사를 못한 건 자랑거리도 변명거리도 못된다. 백번 양보해 정말로 덤블도어가 적어도 작가 머리 속에서는 동성애자 캐릭터였으므로 따라서 독자들도 그걸 인정해 줘야 한다고 쳐도 이것은 결코 동성애자의 미디어 표상에 아무런 도움도, 사회적 이미지의 발전에도 전혀 기여하지 못한다. 오히려 깎아내린다면 모를까. 게이 언론에는 미안하지만 이런 무책임성뒷북아우팅따위는 절대 기뻐할 일이 아니다. 타임지의 죤 클라우드가 지적하듯이, 문제는 원작 중에 그 사실의 암시가 전혀 없다는 것, 즉 게이로써의 덤블도어가 침묵(당)한다는 사실이다. 인종, 성별, 역사문제 등등을 포괄해서 수많은 소수자, 약자, 피해자를 얽메고 압박하며 반복적으로 고통 주는 폭력의 정체는 바로 침묵의 강요이며, 그들이 고통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침묵을 깨고 나오는 것 뿐이다. 덤블도어가 직접적으로 아임 유어 파더...아니 아임 게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작가가 작품 속의 내용과 묘사로 그 사실을 독자들에게 인지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곧 그 캐릭터를 침묵시킨 셈이니,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야 캐릭터를 '아우팅'하는 것은 작가로써 무책임할 뿐만이 아니라 성적 소수자들이 강요당했던 폭력적인 침묵의 역사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굳히는 지극히 부정적인 잠재효과까지 있으니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그러니까 제발, '내용과는 상관 없지만 게이 캐릭터가 늘어서 좋다'는 말은 하지 말아라. 내용에 상관이 없는 단계에서 이미 글러먹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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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바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