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2007. 10. 4. 20:14
한국은행이 2009년에 발매할 5만원, 10만원 권에 실릴 인물의 최종 후보 중 하나가 신사임당이라는 발표에 여성계에서 크게 반발하여 반대 서명 운동을 펼치고 있다고 합니다. 자세한 기사는 이곳.

솔직히 말해 좀...구시대적이긴 하죠. 조선시대 화폐였다면 몰라도 21세기 대한민국에선 적잖이 시대착오적(...)
왜 우리 사임당 언니를 공격하는 거야!--라고 발끈하는 반응도 많지만 요는 신사임당 본인이 아니라 신사임당이 상징하게 되어버린 것이 문제시되는 겁니다. 예술가로써의 신사임당보다는 남편과 아들의 내조를 잘했다는 현모양처로써의 신사임당이 유교 체제 안에서 여성들을 억압하는 롤 모델로써 활용된 것은 익히 알려진 바. 처녀였지만 훌륭한 어머니라는 대단히 모순적인 성모 마리아처럼 (다 알다시피 성모 마리아님은 평생 처녀였어요 라는 건 성경에는 안 나오는, 가톨릭에서 간지상승을 노리고 구라친 것임.) 지나치게 높으면서 체제순응적이고 극히 활동범위 한정적인 여성상으로 사용되고 만 것이지요. 마치 바그너의 음악처럼 그 자체로는 분명 훌륭하긴 하지만 의도되었건 되지 않았건 부여되고 만 정치적 속성 때문에 그 안 좋은 색깔을 회복하기엔 너무나 멀리 온 것이지요. (내지는 밑바닥부터 아예 갈아 엎던가.....) 그런 이미지의 인물을 일국을 대표하는 화폐의 최초의 여성인물로 내정한다고 하니 반발해도 이상할 것 없습니다.

게다가 의외로 많이들 간과하는데 신사임당의 경우 현모양처라는 구시대적 모델만 문제인 게 아니라...어머니까지 화폐에 실리면 이건 완전 이율곡 일족의 독점체제! 덕산 이씨의 음모(...)인 것인가!! 게다가 이황까지 있는데 유교 아이돌을 대체 몇명까지 내세우는거냐!!!--라는 근본적인 밸런스의 문제가 생겨버린다는 것입니다!! (쿠궁-)

그러나 동시에 제기되는 질문은, [그러면 또 다른 여성위인이 대체 누가 있는데??]--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국사 교육에 있어 여성들의 활동을 기술하는 데에 형편없이 게을렀다는 개탄스러운 현실의 단면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안으로 내놓은 여성 위인들에 대해 좀더 자세히 짚고 넘어가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선덕여왕. 한반도 최초의 (기록된) 여성 군주.
물론 고대 신정정치에서 여성이 차지했던 중요한 위치를 생각하면 단군도 여성이 많았을 가능성은 농후하지만 일단 '기록된 역사'라는 점이 중요.
16년 제위기간 동안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지고 많은 불교 건축물을 세웠다. 기반을 다진 게 뭐 그리 대단하냐고 할 수 있지만 본디 기초공사가 탄탄해야 건물이 똑바로 서는 법. 게다가 인재등용, 활용에 있어서도 파격적이었고 (김춘추는 여왕 외의 유력한 왕위후보자 즉 정적의 아들이었고 김유신은 가야 출신이라 왕따당하는 타지인이었음.) 초강대국가 당나라와의 외교전에도 적절히 대처하여 이런저런 슈퍼파워 국가 틈새에 낀 한반도의 대처능력의 대표라 볼 수 있음. 요는 매우 합리적인 두뇌와 막강 카리쓰마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결국 그녀가 다져놓은 기반과 키워준 인물들의 힘으로 신라는 한반도를 통일하고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천년왕국을 유지했으니 역사적 공헌도 또한 매우 크다.
단점이라면 요즘 여론은 고구려가 대세고 신라는 그 만주땅인가를 내줬다고 사대주의라고 욕하는 분위기라 인기면에서 불리하다는 점. (신라 입장에선 영토가 3배 늘어난 거지만 별로 이런 쪽으론 계산하지 않는 듯.) 고구려빠의 주범이라 복잡한 심정이나 그래도 엠비씨에서 [주몽]에 이어 제작 검토중이라는 [선덕여왕] 드라마에 거는 수밖에 없다. 사실 제대로만 만든다면 요시나가 후미판 [오오쿠] 따위는 저리 가라 레벨의 최고최강전설의 모에 사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선덕여왕의 본처...아니 남편만 해도 무려 세명(!)이었고 유능남에 꽃미남인 연하남 김유신과 김춘추는 여왕카리스마에 휘어잡혀 무슨 일이 있어두 충성스럽게 보좌한다. 게다가 엑스트라 화랑들로 슈퍼쥬니어를 전원 특별출연시키면 10대 시청자까지 확 잡은 것이다!
ㅋㅋㅋ...기대하겠다 엠비씨!


허난설헌. 홍길동의 저자 허균의 누이로도 알려져 있음.
남동생이 소설가였다면 허난설헌은 천재적인 시인이었는데, 불행히도 시대를 잘못 타고난 데다가 남편도 잘 못 만나고, 아이들도 연이어 죽는 등 비극이 계속되다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무척 한많은 인생.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런 슬픔이 있었기에 그녀의 시는 타고난 천재적인 감수성과 함께 깊이와 아픔을 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특히 두번째 아이까지 잃고 난 뒤에 쓰여진 [곡자(哭子)]의 가슴이 에이는 듯한 비통함과 끝없는 절망감은 읽는 이의 마음까지 저민다. 사실 허난설헌은 어떻게 보면 그림자 신사임당-내지는 '실패'한 신사임당이라고 할 수 있다. 둘 다 가부장적 조선사회의 가정의 틀 안에서 일생을 마친, 무척 재능 있는 양반집 여인들로 그 틀을 감히 부수거나 나가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주어진 책임 안에서 최선을 다하며 발버둥치고 살았다. 차이점이라면 운이다. 신사임당의 친정은 안정적이었고 시댁에서도 친정과의 교류에 호의적이었으며 (율곡은 신사임당의 친정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무엇보다 남편 이원수는 이해심 많고 도량이 넓은 사람이었다. 반면 허난설헌의 남편은 속 좁은 한량이었고 친정은 당쟁에 휘말려들어 어지러웠고 형제들은 죽거나 귀양에 보내졌으며, 태어난 아이들은 오래 살지 못하고 연달아 죽고, 이러니 시댁에서의 삶은 매일이 바늘방석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비슷한 상황, 비슷한 신분의 두 사람도 운과 환경에 따라 서로 굉장히 다른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제주도의 김만덕. 무려 18세기 사업가이자 자선가.
인지도는 비록 낮지만 엄청나게 진취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한, 조선시대로써는 남성으로써도 무척 보기 드문 굉장한 케이스.
일단 태생은 양인이었는데, 부모와 사별하고 생계를 위해 기생이 되고 상당히 성공했다. 하지만 천민인 것을 거부해 관가에 자신은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기생이 되었지, 태생은 양인이니 기녀 명단에서 빼달라고 간청한 끝에 드디어 제명을 받고 기생 신분에서 풀려난다. 그 후 기생 시절의 경험을 살려 지역특산품을 잘 파악하고 제주도 특산품인 말총, 전복, 미역, 진주 등을 시기적절하게 파는 태합입지전스러운 판매전략으로 천냥부자가 된다. 정조 14년(1790년) 제주 지방에 대흉년이 들자 김만복은 재산을 전부 털어 곡물을 사들여 주민들을 구제한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녀에게 의녀반수의 직함을 내리고 궁궐로 불러들였고, 허락 없이 본토로 들어갈 수 없었던 제주 주민인 그녀였지만 왕도 알현하고 평생 소원인 금강산 유람도 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라는 아메리칸 드림 뺨치는 엄청난 실화의 주인공.
사업가, 인간으로써도 귀감이다. 인지도가 낮은 게 유일한 흠...


유관순 열사.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독립운동가.
아마도 근성의 애국심과 어린 나이에 요절햇다는 점이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사실상 눈앞에서 양친을 살해당한 입장에서는 죽을 때까지 만세를 외치는 것 외에는 인간으로써의 존엄성을 주장할 수 있는 선택지가 어린 그녀에게는 얼마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높은 인지도에 비해 화폐 인물 선정에는 몇가지 걸림돌이 있는데, 일단 너무 어리다는 점과 분명히 대중적 인지도는 높지만, 실제로 역사에 끼친 영향이나 남긴 구체적인 업적은 현재 선정된 인물들에 비해 부족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녀가 근대 인물이라는 시대적인 배경이 가장 큰 장애물인데, 왜냐하면 근대사의 인물 중 그녀보다 훨씬 더 영향력 있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들이 많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김구가 있을 것이다. 아마 김구가 선정되면 (영향력이나 현대 지나치게 조선시대에만 몰린 화폐 인물들의 균형 맞추기 차원에서도 가능성 높음!) 혐일류 4권에선 빈라덴에 빚대며 뭐라뭐라 욕하겠지 ㅋㅋ...사실 종이 한 장 차이로 민족영웅이 테러리스트 취급되는 그게 포인트.


나혜석.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또한, '신여성'의 대표로 스스로도 여성운동가로써 적극적으로 활동하기도.
초기의 대중적 여성운동가이자 롤 모델로써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 외에도 그녀가 차지하는 '한국 최초' 중에는...최초의 이혼녀라는 것도(...)
사랑 때문에 이혼했으나 그렇다고 애인이 받아주지도 않고, 양육권도 빼앗기고, 해서 병에 찌들어 살다가 죽어 어디서 묻혔는지도 알 수 없는 안습스러운 인생을 산 것은 아마도 그녀가 너무나 이른 시기에, 너무 앞서갔기 때문이리라.
따라서 요즘 여성들에게도 너무 앞서가면 안되고 적당히 몸을 사릴 줄도 알아야 한다는 교훈을....어...이건 아니라고?(...)
사실 화가로써, 초기의 신식 교육받은, 그것도 대중적으로 스스로를 어필하고 여성들의 변화를 촉구한 여성으로써도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이상이 대안으로 제시되는 대표적인 여성 위인들이네요.

소서노나 명성황후 얘기도 나왔는데 전자는 개인적으로 자세히 모르고, 후자는....음...뮤비의 문제인가(...)

음...이왕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런 외딴 블로그보다 아예 역사 스페셜같은 데서

우리나라 역사 속의 여성 인물들을 중점적으로 다뤄주는 특집을 만들어줬으면 더 좋을 것 같네요.

신사임당 화폐 선정 논쟁은, 적어도 한국사 여성에 대한 담론을 활발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라 봅니다.
Posted by 시바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