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의 향기...라고 하니 왠지 [죠죠는 흡혈귀물]이라고 하는 것 같군요;
....그러고보니 단배산을 지금까지 다섯번 봤다는 얘기 했던가요?
첫번째는 혼자서 보고 나머지는 죄다 누군가를 끌고(...?) 갔군요...
(의기투합한 경우도 있지만...)
아무튼 극장에서 그렇게 많이 본 영화는 처음입니다....
소설을 읽고나서 보니 감회도 새롭고 느낌도 신선하고...매번 볼 때마다 다른 것 같아요.
.....그런데 어쩌다보니 관객 중에 성직에 계신 분들과 같이 보게 된 경우가 두번이나 되는군요. 첫번째 혼자 보러 갔을 때는 객석에 스님이 한 분 계셨고 마지막으로 ㅎ모님과 보러 갔을 때 ㅎ님 옆자리에 수녀 두 분이 계셨고......아니 특별히 성직자라고 보면 안되는 영화라는 것은 아니지만 단지 [종교VS동성애]의 공식이 너무나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서구권에서는 성직자가 사복 차림이라면 몰라도 신분을 드러내고 장안의 화제와 논란이 되는 동성애 소재 영화를 관람하는 것은 무척이나 보기 힘든 일이라... (...하긴 딱히 카우보이 신화가 없고 동성애나 성전환에 대한 개념이 어딘가 좀...희한한 우리나라니까 미국만큼 논란이 되지는 않았지만...) 사실은 그 분들의 감상이 제일 궁금했습니다(....)
뭐 잡담은 이 정도로 해두고, 오늘은 [브로크백 마운틴]에 대해 보여지는 한국에서의 거부감에 대해 써볼까 합니다. 언론들이야 지나치게 반응이 좋았으니(뭐...뭐야 이 아줌씨 아저씨들...-_-;;) 넘어가고, 주로 블로그나 댓글 등에 올라온 영화에 대한 감상을 읽고 생각을 정리한 것입니다. 물론 굉장히 반응이 좋았던 감상도 많았지만,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그와 비슷하게, 아니 어쩌면 더 두드러지게 많았던 부정적인 반응과 거부감에 대한 것입니다.
사실 이 영화의 국내 개봉 전에, 우리나라에서 이 영화가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부분은 주인공 커플이 명실상부 "남성적"인, 어떻게 보면 좀더 "게이 코드"에 근접한 모습이, [왕의 남자]의 기생오래비 여성적인 남성 공길로 대표되는 (좀 어설프지만 동성애에 익숙하지 않은 대중에게는 가장 받아들여지기 쉬운 종류의) "야오이 코드"와의 충돌이 아닐까 염려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개봉이 되어 놓고 보니 물론 저러한 취향의 충돌도 문제였던 것 같지만 개인적으로는 예상치 못했던, 그보다 큰 장애물이 바로 [불륜]과 [가정의 파탄] 요소였습니다. 솔직히 구미권의 보수 종교계 언론에서조차 영화의 동성애 소재 자체를 가지고 태클을 건다면 모를까 결혼이나 가정의 파탄을 가지고 뭐라고 하는 것은 본 적이 없어서 상당히 의외였고 (...하긴 반대하는 사람들은 대게 보지도 않고 반대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럴지도...), 동시에 저러한 반응이 우리나라에서는 보수층, 중장년층이 아니라 10대 후반~20대 초반의 스스로 [왕의 남자]등을 봤으니 진보적이라는 경향이라고 밝히는 젊은 층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서, 우리나라만의(어쩌면 사회, 문화, 경제적으로 유사한 타국 사회에서도 드러날 수 있지만 아직 못 찾음) 독특한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것 같아서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물론 좋아하는 사람은 굉장히 좋아한 영화였지만....)
일단 저러한 [한국적 거부감]의 주요 핵심이 [동성애]가 아닌 [불륜, 가정파탄]이었다고 (표면적으로) 드러나고 있었으니, 우선 한국 사회에 있어서 [불륜]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한번 고찰해 보았습니다.
네이버 국어사전에서의 정의는,
불륜(不倫)[명사][하다형 형용사] (남녀 관계가) 윤리에서 벗어남.
¶불륜 행위./불륜을 저지르다.
........라는 문장 자체만 두고 본다면 의외로 모호한 것이었습니다.
일단 주 정의는 [남녀관계가 윤리에서 벗어났다]라는 것인데.....순전히 이성애 중심적 정의인 앞 부분은 우선 [연애/정사관계]로 치환해 놓고 보면....
어쨌든간에 연애/정사 관계가 [윤리에 어긋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윤리]는 무엇일까요?
윤리(倫理)[율―][명사]
1.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와 규범, 곧 인륜 도덕의 원리.
2.<윤리학>의 준말.
.............................
1번은 너무 어렵군요..............
그렇다는 것은.....예를 들면 육체적으로 약한 상대를 폭력으로 위협, 굴복시키는 것은 명백히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와 규범, 곧 인륜 도덕의 원리]에서 어긋나니까.....남편이 아내 패는 부부도 불륜?? 보니와 클라이드처럼 마구 사람 죽이고 다니고 강도질 한 커플도 불륜? (평화시의 살인, 강도는 아마 대다수의 문화권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와 규범, 곧 인륜 도덕의 원리]에서 어긋난다고 봄.) 그런데 그렇게 안 부르잖아? 너무 개념이 어려워!!!;; 아니, 한자부터 어려워! [불륜(不倫)] 자체만 놓고 보면 윤리에 어긋난다는 것인데 그럼 부쉬가 전쟁 일으키는 것도 불륜질?! 그런데 어째서 저런 광범위한 의미의 단어가 국어사전에서는 [남녀관계가 윤리에 어긋남]으로 좁혀질 수가 있을까?? 게다가 통념상으로는 더더욱 좁혀져서, [결혼한 남녀가 배우자가 아닌 상대와 통정하는 것] 정도의 (상대적으로) 시시한 뜻으로 통하고 있지 않은가! 대체 누구야, 이딴 거 정한 게!!! (본인은 국어학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하므로 그 유래를 아시는 분은 친절히 가르쳐 주시길 바랍니다.)
........아무튼 요는, [불륜]은 뭔가 어마어마해 보이는 임팩트의 단어 자체와는 달리, 실생활에서는 [결혼한 남녀가 배우자가 아닌 상대와 통정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기혼자의 결혼외 정사]라는 것에 대한 터부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텐데요.
[기사] 드라마만 보면....한국은 불륜공화국?
[기사] 왜 '불륜'에 흥분하고 빠져드나
그리고 꽤나 구체적인 통계가 나오는.....
[기사] 애인, 또 하나의 가족?
..............................
터부시되고 있지만 동시에 현실이면서 집착의 대상이었군요..........
(하긴 실제로 건너 건너 '불륜' 소문은 생활에서도 두세번은 듣게 되지만....)
마치 중세 기독교의 [마녀]와도 비슷한.....
(단, 진짜 마녀는 그다지 없었다는 점이 차이점이겠지만)
아무튼 저 결과는 [브로크백 마운틴]의 [불륜]에 대해 국내 관객들이 민감하게 반응한 이유를 어느 정도 설명해 줍니다. 허나 그러면서 동시에, 어차피 드라마 속의 온갖 다양한 패턴의 불륜에 익숙해졌을 터인데, 왜 굳이 [브로크백]의 불륜에 유난히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지에 대한 의문점도 생깁니다. 그래서 주위에서 의견을 수렴하여 한국 드라마의 불륜과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조사해 본 결과, 꽤나 결정적인 차이점과 함께 영화의 '거부감'에 대한 또다른 요인도 알 수 있었습니다.
1. 불륜의 결과로 이혼을 한다.
물론 한국도 서서히 이혼율이 상승세를 이루고는 있습니다만, 아직까지는 사회 전반적으로 이혼가정이 표면화되거나, 이혼가정을 사회의 한 구성원이자 이웃으로 편견없이 받아들이는 사회 분위기가 보편화되었다고는 말하기 힘듭니다. (이 점은 이혼이 아닌 부부 중 한 사람의 사망 등으로 인한 한부모 가정, 부부 중 한 사람이 외국인인 가정, 미혼모 가정, 재혼 가정 등 [초혼 남녀 한쌍 부부가 아닌 모든 가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만....써놓고 보니 [정상적인 가정] 되기 의외로 까다롭군요.) 세번째 기사에서 인용한 “연애는 하더라도 가족은 깨지 않으련다”는 말에서 보이는 [가족(=현 상태) 유지]에 대한 집념이 강한만큼, 이혼이라는 직접적인 [단절], [결별]이나 [가정의 파괴]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혼가정을 받아들이는 사회적 분위기를 감안하면 당연한 것이 아닐까도 여겨집니다만.
어쨌든 그래서 불륜이 잔뜩 나오는 한국 드라마에는 그렇게 불륜이 남발하는 것 치고는 의외로(!) 이혼을 해버리는 부부는 (최근에야 좀 늘었다지만) 적습니다. 아무리 배우자 (주로 남편)가 상대 배우자(주로 부인)에게 불성실하고 험하게 대하고 (극단적인 경우지만 실수로 상대 배우자의 부모와 자식을 죽이게 되어도-_-;;) 마지막에는 어떤 종류의 용서가 화해와 화합이 이루어지고 가정은 현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것이 불륜이라는 리얼하면서도 자극적인 소재를 건드리면서 동시에 시청자에게 비록 현실성의 여부는 어떻든지 간에 안도감과 평안함을 줄 수 있는 방법입니다. 설사 현실적으로는 바람을 피운 배우자를 용서할 수 없고 그런 일을 겪은 후의 부부 관계가 정상궤도를 회복할 수 없을지라도, 적어도 드라마에서는 문제의 배우자에 대해 화해/용서를 하고 가정이 화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정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로 주로 거론되는 것은 [아이들 때문에]입니다. 비록 이혼이 흔한 구미권에서라도 이혼은 어떻게든 아이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고 대부분의 경우 큰 상처를 받는다는 점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사실 아이들 입장에서는 늘 같이 있던 엄마나 아빠 중 한 사람을 매일 볼 수 없다는 것이 큰 충격이고, 때로는 두 부모 중 한 사람을 선택하라는 강요를 받기도 합니다. 실제로 [불량주부]에서 옆집의 부인이 남편을 떠나려고 하자 (하필 그 타이밍에...) 방에서 자고 있던 아이가 일어나 엄마에게 메달리는 장면은 그 [아이들 때문에]를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단, 정작 다음 전개에서 부인은 결국 떠나버린다는 점이 이례적임. 그러나 부인이 일본인, 즉 (한국적인 정이 부족한) [이방인]이었다는 점도 감안은 해야 함.) 그래서 아무리 배우자가 탈선을 해도 결혼과 가정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한국적 정서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대부분의 드라마에서 '인내해야 하는' 쪽은 대부분 여성이고, [브로크백]에서도 정작 '인내하지 않고' 이혼을 한 것은 알마이긴 하니 좀 모호하지만...) 그러나 정작 미국이나 구미권에서라면, [브로크백]에서 만약 알마가 남편의 외도를 그냥 참고 견뎠다면 오히려 그것에 논란이 일었을 것입니다. 결혼도, 아이도, 가족도, 전부 부부 두 사람의 관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는 사고방식이 강하므로, (사실 논리적으로도 맞기는 하지만...)그 바탕을 유지하는, 상대 배우자에 대한 신념이 흔들리거나 비틀어지거나 무너지면 그 결혼도, 가정도 유지될 수 없다고 믿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특별히 차가워서라던가, 아이를 생각하지 않아서라고는 여겨지지 않습니다. (제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사실 [아이들을 생각해서] 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이혼을 하지 않겠다는 한국의 부모들만큼이나 그들은 [아이들을 생각해서] 진심이 없는 결혼과 가정이라는 악환경에서는 제대로 된 육아를 할 수는 없으니 이혼을 하겠다고 말합니다. 물론 어느 쪽이나 변화에 대한 불안, 경제적인 문제, 이기주의,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의식 등등의 복합적인 요인을 [아이]를 내세워서 덮어두고 포장하는 [어른의 변명]임에는 변화가 없습니다만, 요는 각 사회마다 나름대로 이혼을 부정하거나 현실로 인정하는 이유와, '불륜'이 그에 관련하는 이유가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의 [브로크백 마운틴]의 '불륜'에 대한 거부감과 분노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감정 이입을 해서 그렇게 되었느냐고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게 저런 식의 비난/비판은 [여자가 불쌍하다]로 일축되던데, 그렇다는 것은 알마에게 감정이입을 했다는 뜻입니다. 알마는 미국 70년대 시골 농촌의, 그렇게 고등교육을 받지는 못한 것 같은 주부이면서 슈퍼마켓에서 일하는 직장여성이기도 합니다. 제한된 세계에서 마을과 가정만이 전부라고 믿고 있던 순진한 여성이, 남편의 외도(그것도 남자랑...-_-;)로 크게 상처받고 그 결과 냉담해지고 굳세어져서, 나중에는 이혼까지 해버릴 정도로 변하게 되는 모습은 배우의 뛰어난 연기와 함께 공감과 동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임은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사실 [브로크백]이 리얼리티를 띄게 된 것도 주인공들의 사랑으로 상처받는 인물이 입체적으로 그려져있기 때문이라고 여겨짐...보통은 그냥 [나쁜 계집애~]류의 평면적 인물로 끝날 수 있거늘...) 또한 게이 정체성을 숨기고 살지만 그래도 남성이라 어느 정도의 행동력과 의사결정력이 보장 되는 에니스에 비해 여성인 알마는 매우 불리한 위치에 놓여있고, 이러한 역학구도는 사회적 약자로써의 여성의 모습을 잘 드러내주어서 여성 관객으로써는 더더욱 공감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저도 공감했으니까요.)
그러나 의외로, 알마에게 공감이 갔다고 하며 영화 속의 '불륜'을 비난하고 때로는 영화 자체에 대한 비난의 근거로 삼는 주장을 하는 층은, 알마와 같은 주부가 아니라 대부분 미혼의 10대 후반에서 20대까지의 미혼남녀 (주로 여성)가 많았습니다. 정작 진짜 주부가 대부분인 중장년 층에서는 동성애라는 소재에도 불구하고 여성 캐릭터 뿐만이 아닌 주인공들에게도 공감해 영화 자체를 굉장히 감동적으로 받아들인 것을 보면 더더욱 놀라워 보입니다. (이 점은 서구권에서도 마찬가지. 관객의 대부분이 중, 장년층이 많았음.) 어떻게 보면 '진짜 주부들'이 이 영화를 '사람의(어쩌면 자신의) 이야기'라고 받아들인 반면, 젊은 층은 어쨌든 부모가 되어버린 주인공들이 나온 이상 '가족의 이야기'라고 자동 치환해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아직 자기 가정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많은 그 나이대라면, 알마에게 공감했다지만 사실상 입장적으로는 [아이들]에게 이입하고, 주인공들이 '부모'가 된 이상 '(욕망이나 허점을 지닌)사람'으로써는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좋게 말하면 孝의 정신이 발달했다지만, 나쁘게 말하면 지나친 부모숭배로 (특히 여성 부모의 경우) 과도한 신성화로 비인간화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조금 극단적인 경우지만 몇년 전에 재혼을 하겠다는 노모를 살해한 50대 남성의 경우, [여자/인간로써의 어머니]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심정이 깔려있습니다. 아무리 어머니라도 여자이기도 하고 사람이기도 한데 말이죠.
물론 모름지기 새 생명의 부모가 된다는 것은 중대한 책임감과 의식을 동반해야 한다는 것은 압니다만, 점점 추레하고 꾀죄죄해져서 나중에는 트레일러에나 살아야 하는 (소설에서는 그 트레일러에서도 더 이상 못 살게 되어서 결혼한 딸 집에 얹혀살아야 할 형편인...) 처지에 놓이면서까지도 무려 그 시대인데 양육비도 꼬박꼬박 내고 (요즘도 이혼해서도 양육비 안 내는 남자들 많은데...), 거리상으로나마 자식들에게 가깝게 있겠다며 같이 살자는 연인의 청도 거부하는 (물론 아우팅에 대한 공포도 있지만...) 에니스에게 부모로써의 의무감이 없다고는 보기 힘듭니다. 게다가 생각해보면 문제의 '불륜'이라는 것도 단지 엄청나게 눈치 없게 바람(?) 피워서 문제지(...그렇군. 바람도 섬세하게 피우라는 교훈...) 부인에게 떽떽거리며 이혼하자고 요구한 것도 아니고, 현 상태 유지에만 머무르려고 했으니, 국내의 불륜 드라마나 실제 불륜과 비교해서 그렇게 다른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 밖에 경제적인 요인도 한 작용을 하기는 한 것 같고...솔직히 시간 덜 잡아먹고 월급 더 많이 받는 일을 해도 되는데 굳이 힘들고 보수도 적은 일을 집안 재정의 대부분을 담당하는 배우자가 고집한다면 가정과 육아를 꾸려나가는 입장에서는 답답할만도 함. 그리고 [브로크백]에서는 돈이 아주 중요함...) 그리고 중요한 것은, 에니스가 아닌 알마가 결국은 스스로의 결정으로 이혼을 결심해서 관계의 행방성을 정했다는 점인데, 영화를 오로지 '부모들의 이야기'로만 보는 것이나, 알마의 여성으로써의 주체성과 의지는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한 피해자로만 취급하는 것도 다소 협소한 시각이 아닌가 싶습니다. 일부 사람들이 자처하는 것처럼 제대로 된 여성주의적 입장도 아니구요.
나는 어떤 불륜남과 불륜녀를 알고 있다.
둘 다 가족을 가지고 있다.
둘 다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한다 한다.
그래서 헤어질 수 없다고 한다.
둘 다 가족을 아끼고 사랑한다 한다.
그래서 맺어질 수 없다고 한다.
그들에게 화를 내며 차라리 헤어져버리라고 하고 싶지만,
그렇다고 차마 헤어지라고 할 수는 없다.
그들에게 거짓되게 살 바에야 차라리 이혼해버리라고 하고 싶지만,
그렇다고 차마 이혼하라고 할 수도 없다...
이렇게 '불륜'은 일방적으로 매도하거나 찬양하기에는 너무나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요소가 산재해 있습니다. 그래서 [브로크백]의 '불륜'에 거부감을 느끼고, 가정의 해체에 공포를 느끼는 관점도 충분히 이해는 가지만, 동시에 주인공들을 '불륜'으로 몰고 갈 수밖에 없는 현실에 착잡함을 느끼고, 그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짤막짤막한 밀회를 통해서나마 잠시라도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주인공들의 사랑이 애절하고 가슴 아프게 다가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다른 '브로크백 마운틴에 대한 한국적 거부감'의 요인은, 원래 쓸 예정은 없었는데 '불륜'에 대해서 쓰면서 오히려 그 거부감이 불륜 뿐만이 아닌, 다른 요소도 깊게 깔려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크게 다가와서 어쩔 수 없이 더하게 되었습니다.
2. 호모포비아 (동성애 혐오)
행여나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우리나라에는 동성애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한데, 무슨 호모포비아가 있다고 그럽니까?]--라구요. 하지만 [한국에는 호모포비아가 없다]는 말은 [한국에는 인종주의가 없다]는 말 만큼이나 허상입니다. 요즘 하인즈 워드 덕분에야 비로소 주목을 받기 시작한 한국의 혼혈인들과 인종주의의 실태가 아니었으면 저런 말을 듣고 수긍하며, L.A에서 백인들에게 차별을 당하는 교포들에 대해서는 거품을 물고 백인 미국인을 비판하면서 뉴욕의 옷 공장에서 히스패닉계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교포들에 대해서는 [성공한 사장님]이라고 치켜세우는 태도에 대해 이상함을 느끼지 않았을 사람이 좀더 많았을지도 모릅니다. 홍석천씨가 커밍아웃을 하고 3년 동안이나 방송에 복귀하지 못했고, 겨우 복귀를 해서도 여전히 TV에서 보기 힘들다던가, 최근에 군대에서 [동성애 증거]까지 제출해야 했던(...솔직히 이런 거 내놓으라는 쪽이 변태 아닌가?-_-;) 한 사병의 경우, 그리고 결혼을 해야 번듯한 '어른'이라는 이성애적 결혼을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 등(이건...독신자 차별이기도 하지만...), 단지 아직까지는 (증가하고는 있지만) 동성애 문화가 대중에 노출이 적을 뿐이지 충분히 동성애자에게 불편하고 부정적인(말그대로 '부정'-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서울에서 만난 한 캐나다인이 밴쿠버의 한국인 친구들이 [한국에 게이따위는 없다]고 말하길래 정말로 그렇냐고 저에게 물어서 기가 막히면서 동시에 [존재를 부정]당한다는 것이 얼마나 섬뜩하고 무서운 것인지 실감했습니다. 침묵과 침묵당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대놓고 증오와 적대감을 표출하는 것보다 더 무섭습니다. 중세 기독교에서 하느님의 권위를 더욱더 높이는 이론 중 하나로 [악한 것=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마녀사냥의 광란 속에서는 마녀, 이단자, 이교도 등등의 [악한 존재]가, 어차피 [존재하지 않는 것]이므로 그들이 당해야하는 고통 따위는 묵살해도 된다는 변명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공포정치의 가장 필수적인 요건 중 하나가 언론과 발언의 통제이고, [개념]과 [정확한 명칭]의 부재와 부정은 배우자나 자식을 때리면서도 이것은 사랑의 매지 가정폭력이 아니라고 정당화시키고, 전쟁을 전쟁이라고 부르지 않으며 타국을 공격하는 행위를 국방을 위한 방어법이라고 정당화시키게 됩니다. 그래서 은연중에 차별주의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어도, 이것이 차별인 줄을 모르거나 내지는 차별임을 부정해 버리면, 계속해서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악순환이 이루어집니다. 사실 '불륜'에 대한 글을 쓰면서 점점 느낀 것은 [그런데 이것이 남녀간의 관계였다면 과연 비슷한 반응이 나타났을까? 만약 그렇다면 가정드라마가 중심이 아닌 스토리에서, 과연 주인공인 '불륜' 당사자들이 아닌, 오로지 부인에게'만' 공감할 수가 있을까?] 였습니다. 결론은 역시 호모포비아를 다룰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기사]동성애도 동성애 나름?
당일치기(...)로 베드인 하는 남녀커플이 부지기수인 할리우드 영화가 넘치는데, 왜 몇 달 간 인적 드물고 경치 좋은 산속에서 같이 양 치며 동고동락하던 청년들이 좀 베드...아니 텐트인 했다고 키득거리는 것이며 (같은 장면에서의 웃음소리라도 우히히~나 므흐흐~ 와는 다름--참고로 어떤 분의 경우 그 장면에서 걸어나가는 커플을 보았다고 함.), 왜 각자 가정을 가져도 계속 만나고 싶어하는지 납득하지 못하거나 때로는 납득할 시도조차 거부하고, 왜 같이 있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지 감을 잡지 못하면, (여성화되지 않은)남자간의 사랑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는 호모포비아가 의식 속 깊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러한 종류의 차별의식이 차별당하는 당사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고려해볼 상상력도 부족하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타자(他者)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은 분명 힘들고, 상당한 감수성과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시각적, 청각적 형태로써 쾌락적인 요소도 더해 보는 이의 세계를 좀더 넓힐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술이고, 그런 점에서 보면 [브로크백]은 그렇게 어렵고 난해하게 만들어진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보편적인 사랑이야기라며 좀더 퀴어적인 면을 기대했던 몇몇 게이 관객들에게는 비판을 받기도 했죠) 문제라면 애초부터 쉽게 열어볼 수 있는 창문에 대해 귀찮다고, 두렵다고 팔짱 끼고 보여주는 것만 보고 익숙한 것만 보겠다는, 사실상 영화 감상자로써도 손해보는 것이 많은 태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편하게 볼 수 있고 대놓고 사건과 감정을 풀어버리는 익숙하고 뻔한 영화도 좋긴 좋지만, 늘 그런 것만 보면 심심하지 않습니까? 그 정도의 작은 [모험]조차도 거부하게 만드는 것이 호모포비아인지 미디어의 과다 영상정보의 자극으로 둔화된 감수성/상상력/사고력 작동기능 때문인지는 몰라도, 한 입체적이고 다면적인 영화를, 혹은 사람들의 집단을 지극히 단편적으로만 바라보려는 것은 위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참으로 안타깝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보면 이준기 신드롬에 별로 관여하지도 않고 젊은 층에 비해서 동성애/동성애 코드에 대한 친숙도가 낮은 중, 장년층에게 이 영화가 크게 어필할 수 있었던 점은, 어쩌면 주인공들을 코드화된 대상이라기보다 순수히 [캐릭터-사람으로써] 접근했다는 점, 그리고 당시 용납되기 힘들었던 동성애나 사회적 시선 및 부모로써의 책임감 등의 [어쩔 수 없는 요인]에 대한 체감도와 실감을 좀 더 강하게 느껴서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런 면에서 보면 굳이 70년대 미국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순수하게 현실적 제약을 받는 사람과 사랑의 이야기로써 본다면 남녀노소 누구나 감동과 공감을 느낄 수 있는 보편적 감수성을 지니고, 그러한 보편성으로 익숙치 않은 것마저 모듬을 수 있는 영화입니다. 하긴 원작자가 캐나다인, 감독이 대만인에 주인공 배우가 호주인인걸요. 감동에 국경이란 없습니다.
덤으로 어쩌다보니 과도하게 길어진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신 분께 드리는 서비스.
한 영화기자가 캘리포니아의 한적한 시골마을인 고향에서 동네 주민들로 만석인, [브로크백 마운틴] 상영극장에서 목격한 일이라고 합니다.
기자의 옆에는 한 십대 후반 커플이 앉아있었는데, 텐트에서의 씬이 나오는 장면에서.
남친: 으웨~~저거 저 뒤로 받잖아!
여친: 시끄러! 예술이잖아!
.........전 처음 20초 동안은 [영화가 예술영화란 의미...?]라고 생각하긴 했지만.......-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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