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이런 소리 하긴 좀 그렇지만, 나에게는 가타가나, 혹은 로마자 표기 제목의 시대극은 지뢰라는 편견이 있습니다. 게다가 지어(ヂア)에, 한술 더 떠서 [무황인담]이라니 완전 지뢰스러움이 작렬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각본은 다카야마 후미히코니까 직접 보면 그렇게 나쁘진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ヂア]가 뭐람. 아아~ 어느새 거의 다 내려가고 왠지 안 보기는 좀 그렇네, 보고 올까.......걸작이군요, 이거.
-유우키 마사미-
유우키 마사미의 감상을 공식 홈페이지에 있는 유명인사(...왠지 다들 남자분;) 코멘터리 중에서 발췌한 이유는 일본인 기준으로도 [스트레인저 무황인담]이 얼마나 해괴특이한 제목인지 예시하기 위해서입니다. 2채널 게시판이나 동인 쪽에서도 제목부터 마이너하다고 말이 많았지만 사실 저만 해도 처음 코믹 시티에서 이 제목을 접했을 때 너무 괴이해서 부스들 앞을 몇 번이나 지나다니며 일부러 외워둘 정도로 인상이 강렬했습니다.
한국어판으로야 영어 발음인 "스트레인저"를 그대로 표기하니 뭐가 이상하냐고 갸우뚱할 수 있겠지만, 일본어의 경우 표기법은 ストレンヂア, 그대로 읽으면 "스토렌지아"입니다. 일단 영어 stranger을 일본어로 표기할 때는 일반적으로 ストレンジャー(스토렌쟈)로 쓰는 편인데 마지막의 "쟈"를 굳이 "지아"로 늘린 것도 좀 이상하지만 그것보다 "지"발음에 거의 사용되지 않는 ヂ를 넣은 것이 특이사항입니다. 주로 사용되는 사(サ)행의 지(ジ)는 시(シ)의 탁음이죠. 타(タ)행의 치(チ)의 탁음 역시 지(ヂ)로 같은 발음인데 일반적으로는 ジ만으로 "지" 발음은 충분히 커버할 수 있으므로 지(ヂ)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글자입니다. 즉 상식적인 외래어 표기법에서 꽤나 어긋난 표기 방식을 채택한 것이죠.
부제(?)라기보단 제목의 일부인 무황인담(無皇刃譚) 역시 뭔가 형용할 수 없는 한자의 조합에 의미를 가늠하기조차 모호한데...공식 홈페이지의 감독 코멘터리에 의하면 대략 "황제(절대군주)가 없는 시대의 칼싸움 이야기"라는 의미로 그렇게 지었다는군요. (방한할 때의 질문 자리에서는 “왕을 위한 충성의 검도, 왕이 되기 위한 것도 아닌 검”을 의미한다고 했는데 어느 쪽이든 상통되는 의미인 듯.) 솔직히 말해 굳이 저런 부연설명을 해주지 않으면 정말로 알기 애매한 제목입니다. 뭔가 B급 센스지요. 또한 어쩌면 의도한 것도 같은데 ストレンヂア든 無皇刃譚이든 너무나 이질적인 조합의 단어들이라 검색에서 다른 것이 걸릴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저만 해도 너무 신경 쓰여서 기억해둘 정도였으니 어떻게 보면 모범적인 제목의 조건-1.인상적이다, 2.다른 작품과 혼동되지 않는다-은 확실히 갖추었군요. 센스가 좀 묘하긴 하지만.
이렇게 "이름"에 대한 독특한 센스 혹은 무심함(!)은 등장인물들의 이름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일단 주인공 이름부터가 이름이 없는 나나시(名無し)고 이 사실조차 영화 시작하고 40분이나 지나서야 나옵니다. 이름이 있던 시절이라도 앤도 코딜리어도 아닌 붉은 머리(赤毛), 붉은 귀신(赤鬼)같은 성의 없는 네이밍이니 딱할 정도죠. 감독 말에 의하면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에 대한 오마쥬로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하기 쉬우라고 무명으로 했다는데...당췌 홀라당 벗겨서 구석구석 다 보여주고 엄청나게 험하게 굴리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관음증적으로 훑으며 드러내는 캐릭터가 정녕 100% 이입용인지는 좀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어쨌든 감독이 그렇다니 그렇다 칩시다. 덧붙여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의 일련의 스파게티 웨스턴 시리즈의 주인공도 ‘이름 없는 사나이’였는데 이런 고전적 클리셰에서 가져왔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관직도 버리고 검도 봉인한, 사회적 정체성이 모호한 인물이라는 점도 부각되는 효과가 있고요.
코타로(仔太郞)는 사실 적당히 만만하게 생각나는 어린아이스러운 이름을 막 갖다 붙인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만 굳이 특이사항이 있다면 일반적으로 코타로(小太郞)라는 이름에 쓰이는 한자에서 약간 변형을 가해 맨 앞 글자에 小자 대신 仔자를 사용한 점입니다. (“스토렌쟈”를 굳이 잘 안 쓰는 글자까지 더하며 “스토렌지아”로 표기한 것과도 좀 비슷한 센스;) 재미있는 것은 仔자가 코이누(仔犬: 강아지), 코네코(仔描: 새끼고양이) 등 새끼 동물을 지칭할 때 주로 붙이는 글자라는 것이죠. 코타로가 작중에 시전하는 인상적인 공격기술(!)이나 귀여운 인상과는 달리 매서운 구석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고, 토비마루와 매우 닮은 강아지 같은 외모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토비마루는 닌자견이라고 대놓고 나오지는 않지만 영리함이나 전투능력을 보면 그에 버금가는 훈련된 능력자…아니 능력견임을 잘 드러내는 닌자스러운 멋진 이름이라고 할까요.
그럼 명나라 인물들의 이름은 어떨까요. 우선 대장격인 뱌쿠란(白鸞)과 라로우(羅狼)의 이름만 봐도 각자 난새와 늑대라는 동물의 글자가 들어가 있는 공통점이 보입니다. (모 초유명 권왕 캐릭터와 굉장히 비슷한 발음의 이름인데도 전혀 괘념치 않아하는 것 같은 무신경함은 일단 넘어가도록 합시다.) 라로우의 경우 첫 등장시의 BGM 곡명이 [나찰의 연회(羅刹の宴)]인 것을 고려하면 귀신(나찰)과 짐승(늑대)에서 한 글자씩 따온 이름인 것도 같습니다. (한마디로 귀축...) 그래도 여기까지는 비교적 개성이 있는 편이지만 그 외의 자객들의 이름을 보면 너무나 일정한 법칙을 따르고 있어서 본명이 아닌 코드네임이 아닐까라는 의혹이 강해집니다.
후우고(風午), 카츄(火丑), 도시(土巳), 스이신(水辰), 겟신(月申), 그리고 작중에는 아무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고 자매라는 것도 나오지 않는 (암시는 되지만) 여성 자객들 모쿠유(木酉)와 모쿠보(木卯)...그렇습니다, 전부 월화수목금토 등 요일...아니 천체의 글자에, 12지 동물의 글자를 합친 형식입니다. (후우고는 風자가 들어있으니 다소 예외에 들어가지만 그래도 午자는 들어있죠.) 잘 보면 외모도 각자 이름에 들어있는 동물과 은근히 닮아있으니 디자인 포인트도 확실한 편이라 무척 편리하지요. 어느 정도로 편리하냐면 만화 캐릭터 작법 종류의 서적에서 동물의 특성으로 캐릭터를 디자인하라는 기초 중의 왕기초가 생각나서 치가 떨릴 정도입니다. 물론 이들의 우두머리인 뱌쿠란이 도사인 만큼 일종의 미신적 이유로 이런 코드네임 같은 이름이 주어진 것인지, 단순히 작명 귀차니즘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말입니다.
사실 각본가 귀차니즘…아니 편의설에 더욱 기울어지게 되는 것이 아카이케측 사무라이들의 이름 때문인데요. 일단 이타도리 쇼겐(虎杖 将藍)이라는 이름을 보면 역시 성씨에 동물이 들어가 있는 것이 신경 쓰입니다. 물론 이타도리는 호장초(虎杖草)라는 식물의 이름이기도 하니 그냥 넘어갈 수도 있지만, 문제는 그 제자이자 부하인 쥬로타의 이름. 작중에는 성씨가 안 나오지만 공식홈의 정보에 따르면 풀네임은 이누이 쥬로타(戌 重郎太)...12지의 戌자 입니다. 사실 이타도리의 이름에도 寅자를 넣으려다가 12지로 캐릭터 이름 때운 귀차니즘이 들통날까봐 虎자가 들어있는 적당한 것으로 정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 정도로 뻔뻔스러운 네이밍 센스도 좀 드물 것 같습니다.
한 줄로 요약하자면, 제목부터 캐릭터까지 지극히 기능적이기 짝이 없는 네이밍 센스라고 평할 수 있겠습니다. 익숙한 것에 작은 변화를 주어서 척 보기에 그렇게 튀거나 독특해 보이지는 않지만, 특징을 분명히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작품 자체의 담백함과도 통하는 점이 있어서, 흥미롭다고 할까요. 사실 저 레벨의 뻔뻔스러움이면 거의 본받고 싶은 수준이기도 합니다^^;
--원래 1월에 쓰던 건데 이러저러하다 3월에 오른 글(...) 이런 게 몇개 쌓여 있지요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