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원작이 워낙 방대하고 심오하니까 그걸 한 편에 정리한 노고는 인정할만 합니다. 시리즈물 안된 게 어디에요.
무엇보다 비주얼적으로 원작에 충실하려는 대단한 집착이 보여서, 캐스팅이나 의상, 소품 하나하나까지 살린 것이 눈에 띕니다. 아쉬운 점도 몇 군데 있었지만 (오지만디어스의 황금스러움이 대폭 하락되었다던가 나이트아울의 초큐티한 털망토라던가...그리고 더럽혀진 로어셰크의 옛 복장) 전체적으로는 상당히 만족스러운 수준입니다. 특히 코메디언이나 정신과 의사는 만화책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캐스팅이더군요. 중요한 대사나 장면도 다음에 나오겠지...하면 80% 각도와 구도 거의 그대로 나오는 편입니다. 타이밍이 적절했는지는 다른 문제지만(...)
단점이라면 과잉과 분배의 문제에 있습니다. 액션이나 섹스씬은 불필요할 정도로 과잉이다 보니 (주인공들이 진짜 초능력자-초인으로 보일 정도로 지나칩니다;) 거의 비효율적인 수준이 되고 (사실 보다보면 지겹...;) 반면 정작 중요해야 할 흐름이나 디테일 묘사에는 인색합니다. 광고감독 출신답게 재빨리 지나가는 교차편집에는 괜찮은 테크닉을 발휘하는데(오프닝 크레딧은 영화 전부틀 통틀어 최고의 부분입니다...그런데 이래도 되는 건가;) 아주 조금이라도 드라마적인 연출력이 요구되는 장면에서는 아주 괴롭습니다. 특히 명대사를 구겨넣으려는 대화씬에서 이런 한계가 명백히 드러나는데 A와 B가 대화하고 있다고 A와 B의 대갈치기를 교차편집하며 각자 명대사를 읊게 하는 연출의 반복이니 따분하기 그지없습니다. 게다가 대본도 관객의 이해력을 돕기 위해서인지 단순히 지적 수준을 의심해서인지는 몰라도 지나치게 설명해주고 해설해주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이게 꼭 필요한 설정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기보다는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찬 섬세한 원작의 대사를 그대로 넣은 뒤, 아 그런데 이거 너무 어렵지 않나 하며 주석 해설 느낌으로 갖다 붙인 듯한 필이라는 겁니다.
과잉스러운 반면 부족하다는 측면을 잘 드러내는 것 중 하나가 이상할 정도로 상황의 절박함이 안 느껴진다는 겁니다(...) 아마도 가면히어로가 아닌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가 완전히 빠지면서 생긴 문제점 중 하나가 아닐까 의심되지만 핵전쟁을 앞두고 더욱더 미쳐가는 세상의 모습이 별로 묘사되지가 않으니 (가령 할로윈 밤의 '그 사건'이라던가) 로리가 존을 설득하려고 매달리는 것도 별로 와닿지가 않습니다. 마치 "아 그러고보니 핵전쟁이 임박했던 것 같기도 하지" 이 정도의 느낌입니다. 보여주기에만 치중해서 결핍된 것 중 하나가 캐릭터들간의 관계에 대한 묘사인데, 가령 존의 로리에 대한 배려(로어셰크가 로리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이유로 냅다 내쫓는 장면이라던가, 황폐해진 뉴욕을 보고 충격을 받은 로리를 뒤늦게나마 배려하는 부분이나)로 볼 수 있는 그나마 남아있는 인간다움이라던가, 반복적인 주거침입과 식료품 강탈을 통해 쌓여가는 (사실 로어셰크는 모든 영양보충을 댄네 부엌에서 때우는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 댄과 로어셰크 사이의 우정과 앙금(...)에 대한 묘사가 많이 빠져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로리가 인류와 닥터 맨하탄을 잇는 유일한 연결고리라는 점도 납득이 안 가고(...존이 별로 로리를 사랑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서;) 그 순하디 순한 댄이 결국 한마디 할 수밖에 없는 지경이 되는 거나 위험을 각오하고 감옥에 향한 거나 로어셰크가 데레거리면서 내미는 사과와 화해의 악수의 훈훈한 감동이 와닿지가 않는 거죠. 중요한 묘사를 생략하다보니 몰입도, 이입도 납득도 뭔가 불충분한 결과가 되는 겁니다. 사실 영화가 산만해지는 걸 감안해 보통 사람들의 묘사를 기피한 것도 결국은 마지막에 그 사람들이 다 죽어버리는데서 느껴지는 충격과 임팩트와 결과적으로 로어셰크에게 동조하게도 되는 효과가 상실되니 (자기 긍지와 자존심은 분명하지만 그런만큼 분명히 미쳤고 작품 내내 감정적으로 이입, 동조하기는 힘든 인물인데, 최후의 결정에 대해서는 동조하게 되면서 도덕이란 것, 정의라는 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는-그런 인물이죠) 무리를 했어야도 넣어야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것은 좀 사적인 거지만 댄이 너무 밝...다고 할까...충분히 궁상맞지 못하고 똥배도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 좀 아쉽습니다. 이건 제가 궁상남을 좀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로 댄의 소시민스러움이 동반하는 독자와의 일치감, 이입 면에서 문제삼는 겁니다. 사실 가장 정상인에 가까운 인물인만큼 최후의 댄/나이트아울의 선택에 대해서 느끼는 혼란과 복잡함이 가중되는 점이 있기에 스토리적으로도 중요한 장치라고 생각했는데 뭐 이건...처음부터 로리에게 흑심 품은 것 같고 로어셰크 탈옥계획도 가볍게 그냥 더 high해지고 싶어서 충동적으로 한 것 같고...그리고 귀여운 똥배가 없고...그래도 캐스팅은 그럭저럭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진짜 문제는 바이트/오지만디어스인데...비리비리하고 카르시마 없는 얼굴과 몸매도 그렇지만(유능한 사업가이면서도 엄청나게 단련된 육체의 소유자라는 게 중요한 포인트였는데 도무지 이건 나이트아울과 로어셰크를 둘 다 두들켜 패는 게 이해가 안됨. 차라리 그냥 강화슈츠를 입었다고 해라...) 배우로써의 발성법에 문제가 있는 것 같은 혀 엉킨 발음으로는 뭔 말을 해도 위엄도 매력도 설득력도 없네요; 게다가 승리의 오지만디어스 명포즈도 안 하고. 반면 로어셰크는 맨얼굴이 너무 멀쩡하게 생겼다+등장이 너무 적다(평상시 모습도 분명히 안 나오는 점이 있지만, 가면을 얻게 된 에피소드도 중요하다고 생각되서)는 점 빼고는 매우 원작대로 기묘하게 귀여웠습니다. 성기노출 파문에도 불구하고(...파란색인데 뭐 그리 신경을 쓰냐는 생각도 들지만...그런데 왠지 남자들이 더 오버하는 느낌이..) 닥터 맨하탄의 의복 변화과정을 충실히 살린 점도 좋았구요. 사적인 거지만 옛 여자친구는 너무 제리 스프링거 쇼처럼 다뤄서 마음에 안 들었음. 그리고 닥터 맨하탄의 화성맨션은 왜...분홍색이 아닌 겁니까(...) 바비의 화성맨션같으니 좋았는데....
마지막으로 문제의 엔딩. 잭 스나이더가 원작의 유일한 옥의 티라면서 확 빼버렸던 문어. 왠지 한국에 끌고와서 생낙지를 강제로 먹이고 싶은 기분이 들지만, 아무튼 이 바뀐 엔딩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대하게 봐줄 수가 없습니다. 뭐 사실 이것 역시 앨런 무어와 잭 스나이더의 차이를 잘 드러낸달까요. 영화는 과잉작전입니다. 뉴욕 뿐만이 아니라 세계 각지의 도시가 대규모적인 인명피해를 입고 기존에 인류에게 잘 알려진 존재였던 닥터 맨하탄의 탓으로 돌립니다. 반면 원작의 바이트는 뉴욕의 한 구역에 직접적인 피해를 집중시키고, 괴생물과 정신파동으로 형용할 수 없는 미지의 대상에 대한 근원적 공포를 심어놓습니다. 더 효율적이면서 영리하고, 상징적으로도 중요합니다. 영화대로 하면 닥터 맨하탄이라는 이미 알려진 존재의 파괴행위에 불과한데 그러면서 더 많은 사람은 죽고(...사실 미국 한 도시, 소련 한 도시면 충분할 것 같지만 잭스나이더류 과잉이라...) 바이트가 노린 공포효과가 얼마나 갈지 좀 의문입니다. 반면 미지의 괴생명체와 각종 악몽의 이미지를 섞은 정신파는 인공적이면서도 미지의 공포라는 점이 인상적이고, 감독 자신은 외계문어를 받아들이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이미 닥터 맨하탄같은 존재가 있는 세계에서라면 외계인을 믿는 것도 자연스러울 것 같고 무엇보다 닥터 맨하탄에 익숙해져 있는 인류인데 외계인 정도가 되지 않으면 공포효과도 없을 것 같고(...) 여기 예술가들이 깊게 관여했다는 점도 (만화 스토리작가도!) 인상적인데 너무 하이클래스했거나 잭스나이더가 어지간히 해산물을 싫어했나 봅니다. 아무튼, 무책임.
결론은 원작팬은 비주얼 때문이라도 한번 볼만하지만, 그래도 엔딩은 봐주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잉이면서(시간도 과잉...무릎이OTL) 정작 필요한 묘사는 없어 수많은 은유가 상실되었다는 점도 아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