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정확히는 1994년에 안젤리크가 있어 일본 여성향 게임의 장을 여니,
바다 건너 미국땅에는 뜻 깊은 여성들이 모여 만든 [퍼플 문]이란 회사가 있었다.
당시 게임들이 지나치게 소년취향으로 여자아이들이 게임, 나아가서는 테크놀로지에 어두워질 것이라는 우려와,
그나마 있는 소녀향 게임이라는 것이 진절머리 나는 바비 옷갈아 입히기 게임 뿐이라는 현실을 개탄하여,
[진정한 소녀취향의 게임]을 발견하기 위해 수백만 달러의 비용과 수년간의 시간을 들인 연구 결과
그 해답은 바로 [우정 어드벤처 게임]임을 도출해내고
그 결과물을 1998년 북미 시장에 내놓으니,
바로 Rockett's New School 이라는 게임이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파렴치할 정도로 팬들 골수...아니 지갑을 빨아먹을 의도를 드러내던 홍옥회와는 정 반대로,
진정 숭고한 교육적, 여성주의적, 이상주의적 정신으로 탄생한 퍼플 문...
한 시대의 여자아이들의 장래를 위해 게임을 만들겠다는 비장하고도 아름다운 각오는 눈물이 나올 정도다.
...결국 퍼플 문이 게임을 5개까지 내고 바비의 마텔사의 공격적 마케팅에 밀려 망하고 말았고
잔존한 팀의 일부는 바비 제작팀에 흡수되어, 바비 게임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진짜로 눈물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렇다. 지금까지 징하게 살아남아 지긋지긋하게 신작을 내고 그 작품들이 수차례 애니화 되고,
다른 회사들에게마저 바람을 넣어서 도키메키 메모리얼 여성향 버전까지 나오게 하고,
일본 여성향 게임의 존재와 절대 법칙과 저주를 동시에 낳아 지금까지 수많은 게임에 그 족적을 남기고 있는
(예를 들면 최신작 별의 왕녀...아무리 생각해도 하루카3 베낀 것 같은데...)
코에이 산하 홍옥회-루비파티와는 달리,
원대한 취지와 체계적인 조사 위에 이루어진 퍼플 문은, 약 2년만에 문을 닫고 만 것이다.
[여성 취향의 게임따위는 안돼]라는 사례를 미국 게임계에 남긴 채...
아아...신은 어찌하여 이리 가혹하단 말인가?
진정 세상의 법칙은 악(惡)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인가?
...어쨌든 그렇게 회사가 망한 나머지 게임 시디를 정식으로 파는 곳도 없어,
그나마 이베이에 우송료보다 더 싼 가격(29센트)으로 팔리고 있는 것을
동생 위부인이 구해서-북미 밖 배송은 안 해주므로-보내주어서 할 수 있었던
마침내 구한 퍼플 문의 전설의 처녀작, Rockett's New School.
게임 시작 화면
그럼 대체 이 게임은 뭐가 문제였을까? 캐릭터가 미형이 아니라서? 재미가 없어서?
그전에 아주 근본적인 문제가 있지만...
일단 게임을 소개하면서 차근차근 진행하고자 한다.
주인공 로켓 무바도. 중학생. 이름은 미국인 기준으로도 충분히 이상한 축에 속하니 애교로 봐주자.
로켓은 새 학교의 신학기 첫날에 전학 온 전학생이다. 플레이어는 이 전학생 소녀의 하루를 플레이하는 것이다.
게임이 초등학생 여자아이들용으로 제작되었으니, 일종의 [중학교 시뮬레이트] 상황이라고 봐도 좋겠다.
게임은 기본적으로 위와 같은 정지화상이 자동으로 넘어가는 어드벤처 게임이다.
말하자면 동화책의 한 장면 한 장면을 일일히 다 그리고, 채색했다고 할까.
생각해보면 상당한 노가다가 아닐 수 없다.
배경과 인물이 편리하게 따로 노는 일본 어드벤처들을 소개해주고 싶을 정도로...
가끔 특정 장면에서는 좌측 상단의 카메라 아이콘이 뜨며, 클릭하면 앨범에 장면을 남길 수 있다.
...확대가 안되고 로드시 사진이 누적되지 않는다는 것이 결함이긴 하지만, 그런대로 서비스니 넘어가자.
분명히 일본식 미형은 아니지만, 나름대로의 개성과 귀여운(?) 매력이 있다고 할 수 있는,
아동용인 것을 감안하면 적합한 채색 및 캐릭터 디자인이다.
위의 사진 찍기 서비스 외에 이 게임의 또다른 명백한 장점.
왜 캠처에 대사칸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 이 게임은...
자그마치 풀 음성인 것이다.
이 점은 호화 성우진이라며 늘 짠돌이 음성 삽입을 하는 홍옥회보다 낫다고 할 수 있겠다.
아마도 일러스트 식의 정지화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의도적으로 텍스트를 없앰으로써 음성과 함께 일종의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효과를 노린 것으로 여겨진다.
더빙이 퀄리티도 아동용이고 청소년 학원물인 것을 감안하면, 제법 괜찮은 퀄리티로,
우리나라에 영어학습용 소프트로 사용해도 좋을 정도다.
물론 어떤 학교든, 이런 공주병 걸린 성질 괴퍅한 애는 하나씩 있다.
...하지만 주인공 성격도 그에 지지 않게 괴퍅하다.
이 게임의 (사실상 거의 유일한) 행동인 선택지이다.
언제나 세개의 선택지가 뜨고, 이 선택지들은 늘 세가지의 똑같은 패턴으로 이루어져있다. 좌측부터:
1. 공격적인 자신감 과다형.
2. 긍정적인 자신감 보통형.
3. 소심한 자신감 결여형.
예를 들어, 어떤 상황에서 1번을 선택하면...
이런 표정으로 사물함 문을 쾅! 닫고
학교의 날라리와 (말로) 맞짱 뜨는 것을 볼 수 있다. (첫날인데 제법인걸, 전학생...)
그러다가 복도 저쪽에서, 척 봐도 전교의 왕따같은 아이가 걸어오면, 선택지에 따라서
...모두가 피하는 왕따 아이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상냥한 소녀가 되며...
또 소심한 선택지를 하면....
...교실에도 못 들어가고 입구에서 망설이고 있다.
그녀는 3얼굴의 소녀인 것인가...행동에 일관성이 없어 기분파라고 넘기기도 뭐하다.
물론 일단은 남녀공학이니까...
남자애들도 나온다.
맨 오른쪽에 있는 올곧은 애 말고는, 두 놈은 츤데레 캐릭터(...)
특히 금발 녀석은 사물함을 뒤져보면 알지만 사실 주인공에게 반했는데, 주위의 시선 때문에 튕기고 있다.
물론 이 게임에선 그런 사실을 알아봤자 아무 소용이 없지만...
얘는 밴드를 한다. 하지만 게임 내에서는 연주하는 모습이 나오지는 않는다.
성질 고약한 배식대 아저씨랑 맞짱 뜨면 호감도가 올라가는 모양이다. (사실 호감도 시스템따윈 없지만...)
미국 학교 급식에 대한 비판이 나온다. 실제로 패스트푸드 투성이긴 하지만.
선생님들. 왼쪽은 썰렁한 농담이나 던져대는 담임, 오른쪽은 교장 선생님.
날라리, 모범생 불문하고 모든 여학생들의 왕자님인 미술 선생님.
오른팔 장애를 딛고 예술가에 미술 교사가 되다니, 미국은 역시 기회의 나라.
정확히는 일본 게임이나 만화에는 장애인을 묘사하면 안된다고 한다(...)
어쨌든 여학생들을 꽃 이름으로 부른다. 왠지 로리콘 선생이라고 칭하게 됨.
미술시간에 만나는 아이들.
동양애는 모범생인 등 타입들이 지나치게 뻔하긴 하지만 뭐 원래가 그렇지...
주인공이 자기와 비슷한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대놓고 반감을 드러내는 아이.
교복의 장점을 실감할 수 있는 이벤트.
문제라면, 대사를 개별적으로 넘어갈 수 없고 다음 선택지까지 통채로 넘어가는 옵션만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저런 정지화상들이 전혀 조작할 수 없어서 (즉 캐릭터나 도구를 클릭한다던가 할 수 없다.)
게임 내내 화면을 멍하니 보고만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꽤 지루해진다.
물론 플레이어가 지루해 할까봐, [가방 모드]라는 게임 도중 언제나 들락거릴 수 있는 모드가 있다.
(참, 세이브, 로드도 자유롭다.)
위에서 보여준 사진과 게임 내용이 진행됨에 따라 내용이 변하는 다이어리를 볼 수 있지만,
그보다 저 라커 자물쇠를 클릭하면....
......다른 아이들의 사물함을 뒤질 수 있다.
스파이 게임인 것인가....
게다가 주인공이 사물함을 뒤져도, 아무런 패털티도 없다. 발생 조건도 없다. 게임 시작부터 뒤질 수 있다.
심지어 안면을 트지 않는 아이나 게임 본편에 등장조차 안하는 아이의 사물함도 뒤질 수 있다.
.............
남자아이 사물함도 예외는 아니다.
사물함 내용물은 게임의 진행 시점에 따라 조금씩 변한다.
사물함을 열 때마다 사물함 주인인 아이의 자기소개(?) 멘트도 조금씩 바뀐다.
(리얼하게 [너 너 누구야! 니가 뭔데 내 사물함을 열어봐! 선생니임!!!]<--이런 건 아니다...)
스탠포드 대학 교육연구소 사이트에서 한 학자가 이 게임에 대해 쓴 혹평을 보면,
이 [사물함 뒤지기]모드에 대해 특히 가혹하게 평가하며, 여자아이들이 남의 뒤를 캐고 다닌다는
나쁜 고정관념을 강화시킨다는 점, 즉 사물함 뒤지기 행위 자체의 비교육적, 비도덕적 특성에 주목하여
비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교육연구자로써는 합당한 비판이긴 하다.
단, 필자는 게이머라는 입장이니까, 순수히 게임적인 입장에서 비판을 하겠다.
일단 위에서 밝힌대로 아무런 패널티도 없이, 심지어 알지도 못하는 캐릭터의 정보를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자칭 [우정 어드벤처 게임]인 이상 내용의 중점은 캐릭터들과의 교류여야 한다.
그런데 등장도 안하고, 친하지도 않는 캐릭터의 속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도 되는 것인가?
두번째는 이 모드의 기능성 문제이다.
저렇게 캐릭터들의 뒷 정보를 알아봤자 게임 내에는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
정확히는, 플레이어가 반영할 수 있는 행동을 게임이 취하게 해주지 않는다.
안젤리크만 해도 [엘류시온의 주민 수는 000명보다 많다]는 정보를 데이트에서 반영할 수 있게 해준다.
즉, 사물함을 뒤져서 누구누구는 츤데레라던가, 사실 집안사정이 어떻다던가 하고 나와도
게임 내의 대화나 이벤트나 선택지에는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
정말로, 그냥 그런 설정이다, 라고 나와주는 것 뿐이다. 한마디로 의미가 없다.
사실 캐릭터를 잘 살리지 못했다는 점은 이 게임의 또다른 특징이자 단점에 기인하니...
오전수업, 점심, 오후수업이 지나면 바로 게임 오버...아니 게임 끝(...)
즉, 정말로 전학 첫날 하루만에 게임이 끝나버린다. 지나치게 짧다.
캐릭터들과도 어떤 완결에 도다르지 않는다.
물론 현실적 인간관계가 그렇기는 하지만, 적어도 게임이라는 장르 내에서는
누구랑 더 친해졌다던가, 어떤 그룹과 사이가 틀어졌다던가 등
뭔가의 결과물을 보여줘야 게임이 끝났다는 느낌이 드는데 이 게임은 전혀 그런 것이 없다..
다만 선택지로 되돌아가 다른 선택지를 했을 때의 상황을 보는 것 뿐...
선택지 얘기를 조금 더 해보자. 이 게임에서 유일하게 플레이어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이기도 하니까.
일단 장점부터 말하자면, 무려 바로 뒤/혹은 다음 선택지로 스킵하기 기능이 있는 것이다.
달빠들이여, 미안하다. 하지만 츠키히메가 있기 훨씬 전에 이미 이 게임에 선택지로 스킵 기능이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게임 도중의 대화/스토리 시퀀스가 지루하므로 굉장히 편리한 기능이다.
문제는...이렇게 선택지를 해도 의미가 없다는 것인데....
그림으로 설명하자면 Rockett's New School의 게임 진행방식은 위쪽의 공식이다.
즉 A라는 상황에서 세개의 선택지가 뜨지만, 선택지를 해도 그에 해당하는 대화만 나와줄 뿐,
어차피 상황 B로 넘어가는 것은 변함 없다. 또한 상황 A에서의 선택지가 전혀 상황 B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아래의 공식처럼 선택지에 따라 루트나 내용 분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가뜩이나 짧은 게임에, 사실상 분기마저 없으니 당연히 결과물이 달라질 리도 없다(...)
앞서 말한, 기껏 만들어진 캐릭터들의 설정을 잘 살리지도 못한 것에 더해
게임이 허무하다. 올 클리어(...)를 했건만 성취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대체 왜 이렇게 게임을 짧게 만들었단 말인가? 속편들 (파티, 캠프 등 다양한 상황이 나옴) 만들려고?
내지는 하나하나 노가다해 채색한 CG 작업 및 풀 음성이 부담스러워서?
...일본 어드벤처 게임의 배경, 인물 따로 놀기 기법을 가르쳐주고 싶다.
하긴 참고 했으면 진작에 했겠지만...일본어를 몰랐나 보다.
동생이 먼저 이 게임을 구입해 플레이해서, 일본 여성향 게임과 비교해 어떠냐고 물었더니
동생의 답은 [도저히 같은 차원에서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 게임은 여러모로 미완성, 정확히는 게임으로써 미완성이다.
사실 대사만 넘기면 게임 속도는 엄청나게 짧지만, 게임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interactivity-상호작용성이 정말 최소한으로 설정되어 있고-심지어 가장 수동적인 게임의 축에 드는 노벨게임은 그나마 스토리 전개를 크게 바꾸는 선택지라도 나오는데, 이건 그런 것도 아니다-캐릭터의 정보는 게임 내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으며, 사물함 기능은 한마디로 등장하지 않는 (미처 등장시키지 못한) 캐릭터들의 설정만 공개되어 있는 꼴이다.
안젤리크는 비록 엄청나게 지루하고 단순하긴 했지만 게임으로써의 모양새와 완성도는 갖추고 있었다.
그에 비해 Rockett's New School은, 교육용이라는 것을 감안해서라도, 아니 오히려 교육용이기에 더 신경을 써야 하는 법인데, 몇가지 괜찮은 아이디어는 가지고 있었지만 한마디로 가장 근본적인 단계에서 [게임]이라는 매체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햇다고밖에 볼 수 없다. 물론 그들에게는 일본처럼 순정만화라는 기존의 여성향 매체나, 미소녀 게임, 어드벤처 게임이라는 참고할만한 틀이 없어서 더욱 불리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미국에는 순정만화라는 것이 없다. 정확히는 우리나라와 일본에만 존속되어온 지속적인 소녀향 대중매체다. 미국의 소녀들이 그나마 공유하는 것이라면, 아이돌 밴드나 바비 정도인 것이다. 즉 시작부터 홍옥회는 상당히 유리한 입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물론 기존의 매체를 게임에 맞도록 적합하게 응용하는 작업 역시 어렵긴 하고, 이 점은 코에이의 역사 시뮬레이션 경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밖에 캐릭터나 설정이 그럭저럭 교육용으로서는 합격점이라고 할 수 있지만, 공기업이 아닌 상업적 회사인 이상 같은 학원물이라도 좀더 아이들에게 계속 사고 싶은 요인을 넣어줬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즉 상품으로써의 특성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심한 말일 수도 있지만, 마텔이 경쟁자 제거를 위한 공격적 마케팅을 벌이지 않았더라도 시리즈 내내 같은 컨셉이었으면 오래 가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이 게임이 가르쳐주는 교훈은...
미국인들도 외국어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해외의 케이스에 눈을 돌렸다면, 최소한 배경과 인물을 분리시켜두는 경제적인 연출은 채용되었을지도...
사실 우정 어드벤처라는 컨셉 자체는 틀린 것이 아니다. 실제 일본 여성향 게임은 정확히 말해 여성향 연애게임이다. 문제는 미국에서는 현재까지도 게임 캐릭터를 '사귀는' 게임은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 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