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Blame Abe’s bad history on diplomat George Kennan
[외교관 조지 케넌: 아베의 잘못된 역사인식의 원흉]
제임스 깁니
[뉴욕] 일본 총리 아베 신조의 매파 정책, 역사수정주의, 그리고 국내외 언론을 조정하려는 시도는 일본 국내는 물론 이웃 국가들의 비판자들로부터 격렬한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그 분노의 일부는 미국의 슈퍼 외교관 조지 F. 케넌을 위해 남겨두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전후 미국 점령기 초기, 이상주의적인 뉴딜 개혁주의자들과 연합군 최고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 휘하의 우파 지사들이 어지럽게 뒤섞인 연합군 사령부는 일본의 경제와 사회를 자유화하려는 급진적인 시도를 했다. 그런 변화 중에는 전쟁범죄자 기소, 기업집단 해체, 토지개혁과 노동운동 양성도 있었다.
주로 미국 변호사와 공무원들이 초안을 쓴 새로운 헌법은 시민권을 극적으로 확장시켰다. 그 결과 일본 여성들에게는 역사가 존 다우어가 “현대 헌법 중에 가장 강력한 평등권 조항”이라고 칭할만한 시민권이 주어졌다. (다우어의 퓰리처상 수상작 [패배를 껴안고]는 이 시기를 매우 훌륭하게 다루었다.) 또한 헌법 9조는 맥아더 특유의 호언장담대로 일본을 “태평양의 스위스”로 만들고자 하는 희망 아래 일본을 공식적인 평화주의 국가로 규정했다.
하지만 케넌은 맥아더의 개혁을 전략적 재난으로 향하는 길이라고 보았다. 그는 내전으로 갈라진 중국, 황폐해진 채 분열된 유럽, 냉전이 시동하는 시기에 일본이 “태평양 안보 시스템의 주춧돌”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1947~48년을 시작으로 케넌과 워싱턴에 있는 그의 우군들은 미국의 대일정책을 180도 바꿔놓았다. 전범 재판은 갑작스럽게 끝나버렸고, 공무원들은 파업할 권리를 잃었으며, 미국은 일본의 기업과 수출 산업체들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전쟁 전의 보수적인 정치가와 관료들이 복직되었을 뿐만 아니라 소위 “빨갱이 사냥”을 통해 2만명이 넘는 좌파 노조원들과 기타 노동자들이 해고당했다.
케넌의 “역코스”에 가장 큰 혜택을 입은 인물 중 하나는 아베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였다. 기시는 1941년 대미 선전포고문에 공동서명한 인물 중 하나였으며 군수성 차관으로써 수백, 수천명의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의 강제징용을 감독했다. 다우어는 기시를 “우수하면서 부도덕하다”고 평했고, 또 다른 미국 점령기 역사가인 마이클 샬러는 기시에게 “미국이 가장 총애하는 전범”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기시는 도쿄 스가모 교도소에서 A급 전쟁범죄 용의로 조사를 받으며 3년간 복역하다가 1948년에 다른 전범 용의자 18명과 함께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왔다.
1957년, 기시는 미국이 원조한 자금에 힘입어 총리가 되었다. 샬러에 의하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CIA가 기시와 당시 신생당이었던 자민당의 특정 당원들에게 비밀리에 선거 자금을 지원하도록 권한을 부여했다. 그 대가로 기시는 일본 국민들에게 호응이 좋지 않은 조항은 일부 폐기하면서 미국이 일본내 미군기지를 계속 주둔시킬 권한은 확보하게끔 미일안전보장조약의 개정을 유도했다. 동시에 기밀 협약으로 미국이 일본을 “경유해” 핵무기를 이동시킬 수 있는 권한을 확보했다. (이 조약에 항의한 안보투쟁이 결국 기시의 사임을 이끌었다.)
전후 미국의 가장 큰 전략적 성과가 나토와 최근에 기시의 손자 아베가 개정된 지침을 통해 더욱 강화된 미일 안보관계임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초래한 반대 측면에 대해서는 좀처럼 논해지지 않는다. (국가간 무역 긴장 상태를 대할 때 공리를 위해 경제보다 안보를 우선시하는 미국 노동자들과 정책 입안자들이 입는 피해는 물론이고) 미국은 케넌의 행동으로 인해 일본을 지금보다 훨씬 활기 있고 격동적인 사회로 만들 수 있었던 경제적, 정치적 개혁을 저해시키고 말았다.
만약 일본의 노조들이 번창할 기회가 있었다면 높은 임금을 지지하여 디플레이션 문제 타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수 있다. 미국 대일정책 역코스 시행을 위해 의도적으로 강력한 권력이 주어졌던 일본 관료체계는 일본 국민의 생활 전반에 대해 현재만큼 강력한 통제권을 가지지 못했을 수도 있다. 여성을 위한 동등기회 보호는 단순한 지면상의 활자를 넘어 실질적으로 기능하여, 아베가 요란하게 허풍 떠는 “우머노믹스” 추진을 할 필요조차 없앴을지도 모른다. 일반적인 일본인들은 미국적 기질에 대해 지금보다 더 호의적인 관점을 가졌을 수도 있다.
그리고 자민당은 아마도 이 정도로 장기집권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미국은 자민당을 지키기 위해 1990년대 중반까지 CIA의 자금 지원에 관한 문서의 기밀상태 해제를 거부했다. 국무부가 댄 이유는 “다수의 현직 자민당 지도자가 문제의 시기에서부터 활동했다”는 것이었다. 자민당을 지탱하던 견고한 경제적 이해관계는 현재 아베가 절실하다고 주장하는 구조적 개혁을 가로막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자민당, 특히 아베 정권에는 일본의 미래를 위해 역사를 새로 써야한다고 믿는 당원들이 여럿 존재한다는 점이다. 아베의 내각 관료 중 다수는 전몰자뿐만 아니라 전범마저도 기리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옹호하는 집단에 속해 있고, 또한 난징대학살과 일본군에 의해 매춘을 강제당한 여성들의 전시 기술을 부정하려는 일본회의라는 단체와 교류를 하고 있다. 그런 수정주의와 그것을 부정하지 않으려는 아베의 태도는 중국과 대한민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강화된 미일 군사 협동관계의 효과를 약화시킨다.
만약 국가적 동화보다 권력정치를 믿었던 현실주의자 케넌이 이 상태를 안다면 실망할 것이다. 케넌은 일본에서의 활동을 마샬 플랜과 함께 “정부 소속으로 행했던 가장 의미 있는 기여”라고 여겼다. 케넌의 “태평양 안보 시스템”이 더욱 가까워진 이 때, 아베의 역사적 망상이 그 비전의 가장 큰 장애물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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