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 도쿄에서 스트레인저 무황인담 상영회가 있었습니다...안도 마사히로 감독님 초청한 토크도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회사일과 지난 달 교토 효도여행;으로 예산 문제도 있어서 아쉽게도 가지 못했지만, 상영회 가시는 모님께 말씀을 전해듣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그런데 그 모님이 일요일날 아직 귀향도 하시지 않으셨는데 급히 보여줄 게 있다며 메일을 보내주시더군요. 


열어봤더니....아아 이럴 수가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ㅜㅜㅜㅠㅠㅜㅜㅜㅜㅜㅜㅜㅜㅜ


제가 작년 상영회 때 드렸던 티셔츠.......입고 나오셨답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게다가 토크 시작부터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이전 상영회에서 한국인 분이 이런 티셔츠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모처럼의 기회니, 오늘은 이것을 입고 얘기하려고 합니다.

以前の上映会で、韓国の方がこんなTシャツを作ってくださいました。せっかくの機会ですので、今日はこれを着てお話ししたいと思います"



으아ㅏㅏㅏㅏㅏㅏ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제가 만든 굿즈를 입어주시다니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감격하셨다고, 그림도 센스 좋다고 절찬하셧다고....으아ㅏㅏ아아아아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아....원래는 이런 색상인데 셔츠 색이 이상하게 나와서 드릴 때 죄송했는데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좋게 좋게 봐주시다니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저야말로 감격했어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 자리에 있지 못했던 것이 아쉽지만.....그래도 이렇게 전해듣게 되어서 감독님께 고맙고 사진도 찍어주신 모님께도 고맙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너무 기쁩니다 엉엉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가 아니라 더 열심히 살고 열심히 덕질해야겠어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내년엔 꼭 갈께요 감독님!!! 앞으로도 좋은 작품 많이 내주세요!!!!


Posted by 시바우치
영화2013. 7. 23. 12:51

각지에서 수많은 상을 받고 평단의 극찬을 받은 <액트 오브 킬링>은 학살자가 학살을 재연하는 다큐멘터리의 감독 조슈아 오펜하이머 인터뷰를 번역해 보았습니다. 1965~1966년 인도네시아 학살의 가해자 중 한명인 안와르 콩고는 다큐멘터리 제작자 조슈아 오펜하이머의 요청에 따라 친지들을 모아 자신이 저지른 학살을 연극적으로 재연합니다. 학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곳에서 읽어볼 수 있습니다. 현재 부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2회 상영했고 마지막으로 7월 26일 상영한다고 합니다.



[번역] 조슈아 오펜하이머: “학살을 미화하는 이유는 거울 속의 자신을 마주보고 싶지 않기 때문”

원문 링크.


조슈아 오펜하이머: “학살을 미화하는 이유는 거울 속의 자신을 마주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슈아 오펜하이머는 1960년대 학살의 생존자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인도네시아로 향했다. 그런데 결국은 학살자들을 촬영하며 그들과 친해지기까지 했다. 그 결과물은 올해 최고의 영화로 각광받는 <액트 오브 킬링>이다.

안와르 콩고는 자신이 사람을 어떻게 죽였는지 보여준다. 다음에는 차차차 춤을 춘다. 처음에는 구타해서 죽였지만, 피가 너무 많이 나왔다고 한다. (“비린내가 말이 아니었죠.”) 그래서 친구에게 앉아보라고 하고, 전선 한쪽 끝을 기둥에 묶고, 반대편을 친구의 목에 감고 당기는 시늉을 한다. “이렇게 하는 거죠!”

안와르는 아직도 자신이 한 짓에 대한 악몽을 꾼다. 술, 마리화나, 엑스타시를 하며 잊으려고 한다. 그리고 춤을 추고 노래를 한다. 안와르의 친구는 미소 지으며 말한다. “참 유쾌한 분이에요.”

1965년 인도네시아 쿠데타로부터 1년 뒤, 백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공산주의자 (실제로는 군에게 적대적인 인물 전반 및 화교, 지식인, 노동조합원 등)”로써 살해당했다. 안와르는 개구리 부대라는 학살자 집단의 두목이었는데, 몸소 1000여명을 살해했다. 안와르는 그와 그의 친구들에게 과거의 범죄를 극적으로 각색할 무대를, 즉 학살의 주인공 역할을 자랑할 기회를 마련해준 다큐멘터리 <액트 오브 킬링>의 주인공이다.

감독 조슈아 오펜하이머는 10년 전에 생존자들을 인터뷰하며 이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존자 한 명의 권유로 카메라를 가해자들에게 돌리게 되자, 가해자들은 매우 적극적으로 자신들 입장에서 역사를 말하려는 것을 알았다. 학살자들은 수십년간 서로에게 반복해온 이야기, 즉 자신들이 지배계급이므로 그 행위는 영웅적이라는 버전의 이야기를 채용했다.

안와르같은 폭력배에게 있어서 오펜하이머는 “아름다운 가족영화”를 만들 기회를 제공한 셈이었다. 자신들이 사랑하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영감을 받은, 성공담을 기념하는 영화를 말이다.

“그들은 과거에 저지른 행위의 현실로부터 절박하게 도망치려고 합니다.” 현재 코펜하겐에 거주중인 38세의 하버드 졸업생 오펜하이머는 말한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거울 속의 살인자와 마주보고 싶지 않으니까 학살을 미화합니다. 피해자들이 반론하지 못하도록 계속 억압합니다. 그 정당화 - 기념행위 - 를 자세히 살펴보면, 정작 반성의 부재보다 살인자의 양심이 해체되는 순간을 보게 됩니다. ‘반성의 부재’로 보이는 증상은 역설적으로 그들의 인간성의 상징입니다.”

<액트 오브 킬링>은 오펜하이머의 영화인만큼 안와르의 영화이기도 하다. 그의 영화 취향은 서부극에서 갱스터 스릴러와 엘비스 프레슬리 뮤지컬에까지 이른다. 쿠데타 전의 사회주의 대통령 수카르노 연정 하에서 보이콧 당하던 미국적인 영화들이다. 재연된 학살극에는 끔찍하게 화려하고 기괴한 캠프함이 있다. 한 장면에서는 안와르의 피해자의 딸이 자기 아버지의 간을 안와르에게 강제로 먹인다. 안와르는 자기 자신을, 그의 절친한 친구 헤르만은 피해자의 딸을 연기한다. 헤르만은 통통한 아마추어 배우로, 빨간색과 금색의 반짝이 배꼽티, 짙은 아이라이너, 거대한 머리장식으로 치장했다. (오펜하이머에 의하면 “분장 아티스트 겸 의상 디자이너가 가수 디바인을 참 좋아해서”라고 한다) 헤르만은 키득거리고 비명을 지르며 안와르의 입에 고기를 밀어 넣는다. 오펜하이머는 곁에서 조용히 지켜보며 폭력배들이 필요한 것들을 전부 제공한다. 이 보기 거북한 재연극의 몽타쥬와 고백적이고 정치적인 폭로극은 다큐멘터리의 대부이자 본 작품의 총책임 프로듀서를 담당한 베르너 헤어조크와 에롤 모리스의 관심은 물론, 전세계 평론가들을 압도하며 사로잡았다. 

안와르가 과거의 악몽을 꾸듯이, 오펜하이머도 악몽을 꾸었다. (“온 가족이 모이는 자리가 점차 사랑하는 사람이 고문당하거나 살해당하는 장면으로 변해갔다.”) 오펜하이머는 너무나 오랜 시간을 안와르와 보낸 나머지 안와르의 세계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수 천명의 사람에게 끔찍한 짓을 저지른 괴물은 달달한 차를 내주고, 클리프 리처드 레코드를 틀고, 손주들에게 다친 동물을 보살피는 법을 가르치는 말쑥한 신사이기도 하다. 

이 불협화음은 영화는 불편하게 만든다. 관객으로 하여금 학살자를 이해하도록 몰아붙이기 때문이다.

오펜하이머는 말한다. “이런 일들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아내서 사전에 방지하려면, 어딘가에 괴물이 있으니 경계하고 그것을 가두거나 죽이거나 수용소에 넣으면 해결된다는 식의 판타지를 버려야 합니다.” 

“누군가를 악당이라고 부르면 나는 착한 사람이라고 위안하게 됩니다. 자신을 미화하는 거죠. 나는 이것을 ‘스타워즈 윤리관’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런 윤리관은 많은 이야기의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여전히 안와르와 연락을 한다. 두 사람은 한 달에 한번 정도 스카이프로 대화를 나눈다. 

오펜하이머는 말한다. “나는 안와르에게 마음을 씁니다. 우리의 관계를 우정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요. 나는 심판받지 않은 정권을 생존자들을 위해 폭로하려고 했습니다. 한편 안와르는 자신의 고통으로부터 도망치면서, 자기 트라우마를 보호할 영상적이고 정신적인 상처조직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나는 그를 좋아할 수는 없지만, 같은 인간을 향한 애정은 느낍니다.”


Posted by 시바우치
영화2013. 6. 28. 22:22

가장 최신 슈퍼맨 영화인 <맨 오브 스틸>은 흥행성적에도 불구하고 평은 적잖이 갈리는 영화입니다. 특히 해외사이트에는 기존 슈퍼맨 작품들의 팬들을 중심으로 영화 마지막의 어떤 문제적 진행에 대한 논란이 끊이질 않습니다. 이들이 어떤 지점에서 불편함을 느꼈는지, 슈퍼맨의 핵심적 가치는 무엇인지에 대해 정확히 짚어낸 코믹스 얼라이언스 기사가 있어서 번역해 보았습니다. 원문은 이곳입니다.


당연하지만 스포일러가 잔뜩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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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설] 선택과 <맨 오브 스틸>의 도덕적 세계관
앤드류 윌러


슈퍼맨은 다른 (슈퍼)히어로들과 다르다. 그는 최초의 슈퍼히어로 중 한 명이고, 장르 자체를 정의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중에서 최고이기도 하다. 여기서 "최고"라는 것은 도덕적 의미의 최고를 말한다. 현재 우리가 이해하는, 우리의 문화적 사전 안에 존재하는 죠 슈스터제리 시겔의 창작물은 영웅적 미덕의 이상을 상징한다. 하지만 그런 관점은 잭 스나이더의 신작 영화 <맨 오브 스틸> 이후 바뀔지도 모른다. 



이하 내용에는 <맨 오브 스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다.


마지막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슈퍼맨과 조드 장군의 마지막 대결은 상당한 논란을 야기했다. 조드가 무고한 사람을 죽이려고 하고, 자신을 막지 않으면 모두를 죽이겠다고 맹세하자 슈퍼맨은 조드의 최후통첩을 받아들여 그의 목을 꺾어버림으로써 싸움을 끝낸다.

어떤 사람들은 이 장면을 보며 "슈퍼맨에게 달리 방법이 있었겠나?"라고 물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은 그 밖의 대안을 내놓을 수도 있다. 유용한 대화는 아니다. 흔해빠진 "누가누가 이길까?"식 논쟁이니까. 답은 언제나 같다: 결과는 작가에 의해 정해지고, 이야기는 그 결과을 위해 바뀐다는 것이다. 슈퍼맨은 다른 선택이 없어서 조드를 죽인 것이 아니라, 스토리를 짜는 사람들이 그것을 바랬기 때문에 죽인 것이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2대 1로-*역주: 크리스토퍼 놀란은 처음에 슈퍼맨이 살인하는 것에 극렬 반대했는데, 스나이더와 고이어가 강력하게 추진했다는 내용.)

이 선택은 많은 것을 드러낸다. 즉, 감독 잭 스나이더와 각본가 데이빗 고이어는 슈퍼맨에게도 살생이 필요한 때가 있다고 설정하고 싶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이런 삭막한 메세지야말로 현대 픽션에서 가장 도덕적인 캐릭터 중 하나를 이용해 전달하기에 적합한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슈퍼맨은 살생할 수 있는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을 생각해볼 수는 있다. 실제로 전에도 있었던 전개니까. 하지만 내 생각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명 보존의 명제에 관해서는 슈퍼맨을 한 극단에 위치시킬 것 같다. 슈퍼맨이 한 생명을 위해 다른 생명을 끝내야 하는 순간은, 이야기 전체가 그 순간을 성립시키기 위해 비틀어져야 할 정도로 막대한 무게감을 지녀야 한다. 나는 고이어와 스나이더는 <맨 오브 스틸>에서 그 순간을 획득해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러분은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이것은 우려스러운 선택이다. 왜냐면 영화는 그 밖의 도덕적 메시지조차 전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진리나, 정의, 영웅적 행위, 희생, 희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희망이 언급되기는 한다. 슈퍼맨의 가슴의 글자가 "희망"을 뜻한다고 하지만, 나는 영화 어디에도 희망이라는 이상을 보여주는 장면을 전혀 떠올릴 수 없었다. 영화 마지막에 폐허 속에 서 있는 캐릭터들은 희망보다는 암담한 인내력을 보여주는 것 같다. 마지막 부분에 목에 망토를 두르고 바깥에서 노는 어린 클라크 켄트의 모습이 잠깐 비춰지긴 한다. 언뜻 희망적으로 보이는 장면이다. 하지만 그것은 모든 것이 망해버리기 전의 과거에 있던 일로, 희망은 나이브한 것임을 제시하기도 한다.

어린 클라크 켄트가 그 망토를 둘렀을 때 무슨 흉내를 내고 있었냐고 질문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놀이는 슈퍼히어로 흉내를 낼 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최초의 슈퍼히어로는 슈퍼맨이다. 그럼 어린 클라크는 아라곤 흉내를 내는 건가? 아니면 헤라클레스? 오페라의 유령? 아니면 이 세계에는 마블코믹스가 존재해서, 토르 놀이를 하는 건가?

이 질문을 제시한 이유는 말장난이 아니라, 저 장면이 영감을 주는 존재로써의 슈퍼맨에 대한 제작자들의 불완전한 이해력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이 슈퍼맨은 우리가 우러러볼 대상이 아니다. 내가 관람할 때 슈퍼맨이 조드를 죽이는 장면에서, 그곳에 있기에는 너무 어린 여자아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저 아저씨 눈 왜 안 움직여요? 왜 저 아저씨 안 움직여요?”

그것은 즉각적으로 불편한 고통의 순간이었다. 이 소녀는 망토를 걸치고 이 버전의 슈퍼맨 흉내를 내지는 않을 것이다. 나 역시 어떤 아이라도 이 슈퍼맨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스나이더와 고이어는 사람이 망토를 두르고 정원에서 뛰어다닐만한 영감을 어디서 받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 세계에서는 누군가 망토를 줬기 때문에 망토를 두를 뿐이다. 


이 영화 속의 슈퍼맨은 영웅이 아니라 골칫거리다. 이 영화는 슈퍼맨이 우리 별에 오지 않았더라면 모든 인물들의 처지가 더 나았을 것이고, 수 천명의 사람들이 죽지 않았을 내용이다. 이런 것을 희망의 메시지라고 보기는 어렵다. 만약 제작자들이 조드가 전부터 지구를 노리고 있었고, 죠-엘은 그것을 막으려고 아들을 보냈다는 내용으로 썼다면, 이야기의 중심에 절박함과 복수 대신 영웅적 행위가 존재했을 것이다. 슈퍼맨은 문제가 아닌 해법이 되었을 것이다.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들은 비슷하게 진행되지만, 모든 사건에 도덕적인 무게가 주어질 것이다. 그러나 제작자들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슈퍼맨의 도덕관을 지탱하는 큰 기둥 중 하나는 양아버지인 죠나단 켄트다. 이 영화는 죠나단에게서 그 역할을 제거해 버린다. 대부분의 버전에서 클라크 켄트는 정직하고 선한 양부모에게서 자신의 가치관을 배운다. 이 영화의 죠나단은 거짓말을 가르친다. 타인의 생명보다 자기보존을 우선하도록 가르친다. 여기에는 진리도 정의도 없다. 희생은 있지만, 전혀 영웅적이지 않다. 파 켄트(*역주: "파"는 사투리로 "아빠," 클라크가 죠나단을 부를 때의 호칭임)는 자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고집을 부리다 죽는다. 우리는 슈퍼맨의 전제가 그에 의존하기에 파 켄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안다. 파 켄트는 도덕적인 길잡이가 될 수도 있었지만, 제작자들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켄트 부부는 클라크에게 영웅이 되라고 하지 않았기에, 영웅 되기는 클라크의 가치가 되지 못한다. 그 가치는 유령판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페이퍼클립같은 친아버지에 의해 주입된다. 제작자들은 슈퍼맨의 도덕적 뿌리를 지구가 아닌 크립톤에 둠으로써, 슈퍼맨이 인류가 구원받을 가치가 있다고 믿는 근원적 이유를 앗아간다. 이런 오리진 스토리는 인류가 근본적으로는 선하다는 관념을 어디에서도 보여주지 않는다. 제작자들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럼에도 슈퍼맨의 내재적 도덕심을 보여줄 기회는 여러 개 있었다. 도중에 클라크는 바다에서 막 걸어 나와 옷을 찾아 입어야 할 상황에 처한다. 옷을 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었고, 나중에 돌려주겠다는 등의 약속이 적힌 쪽지를 두고 가져갔을 수도 있었다. 그런 장면은 클라크카 도덕적으로 올바른, 무리를 해서라도 바른 행동을 하려는 사람임을 보여줬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클라크는 몰래 옷을 훔쳐서 달아난다. 제작자들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제작자들은 클라크 켄트의 근본적 선량함을 묘사할 수 있는 모든 기회에서 다른 방향으로 갔다. 누가 자신에게 맥주를 끼얹자 음험하고 보복적으로 행동하게 만들었다. 걱정하는 교사의 손에 화상을 입히게 해서 심술궂고 해롭게 만들었다. 말다툼 중에 자신의 가족을 부정하게 만들었고, 한 키스씬에서는 자신의 인간성을 부정하게 했다. “첫키스 이후로는 내리막길이라고 하던데요.” “인간들 경우에나 그렇겠죠.” (물론 농담이긴 하지만, 그을린 폐허 구덩이 위에서 솔직히 남이나 다름없는 사람의 얼굴을 빨면서 하는 농담이라는 점은, 그가 우리 중 하나가 아니라는 개념에 무게를 더한다.)

이런 묘사들을 별로 중요하지 않는, 사소한 것으로 치부할 수는 있다. 하지만 반면 핵심적인 “미덕의 묘사” 부분은 어떤가? 위의 행동은 우리 모두가 저지르는 잘못이고, 누구에게나 처음이 있었다고 반론할 수는 있다. 물론 사실이다. 슈퍼맨은 픽션의 어떤 캐릭터만큼이나 투명한 미덕의 귀감이지만, 클라크에게는 실수와 단점이 어느 정도 허용된다. 특히 망토를 두르기 전에는.

하지만 도중에 우리는 그의 도덕적 가치가 무엇인지 봐야 한다. 우리는 클라크가 믿는 것, 선택하는 것을 드라마적인 묘사로 볼 수 있어야만 한다. 이 영화는 주어진 모든 기회에서 그런 묘사를 피한다. 클라크가 술집에서 싸움을 피하는 것도 폭력이나 보복행위를 피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튀는 것을 피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비를 건 상대의 사유물을 파괴함으로써 폭력과 보복을 달성한다.

이 슈퍼맨은 결코 도덕적이지 않다. 연민이나 양심도 보이지 않는다. 파괴행위가 인구 집중지역을 피해가도록 유도하지도 않으며 인류와 어떤 유대감을 맺지도 않는다. 구해줄 사람들을 찾아 세상을 여행하는 대신, 눈 앞에서 불 타 죽기 직전쯤 되야 사람을 구하는 내성적인 은둔자다. 그만큼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기대되는 수준에서, 문자 그대로 최소한만을 행한다. 그는 영웅이 될 수 없다. 또 다른 하늘 위의 아버지인, 영원히 캔사스와 오즈 사이 어딘가에서 날려다닐 죠나단 켄트가 가르쳐준 보신주의에 얽매여있기 때문이다. 


제작자들은 전체적으로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도덕적인 가치를 주입할 수 있었다. 클라크의 내성적인 면을 유지시키되 도시전설로써의 측면을 강조할 수도 있었다. 망토나 코스츔 없이, 세상을 떠돌며 놀라운 힘과 용기로 생명을 구하는 슈퍼맨으로써 말이다. 이것이 애초에 로이스 레인을 슈퍼맨에게 끌어들인 이유였다. 하지만 로이스의 조사에는 단지 두 가지의 영웅적 행동만이 참고자료였다. 그녀는 어떤 “슈퍼맨”에 대한 도시전설이 아니라, 빅풋을 따라 UFO로 들어가서 슈퍼맨에 대해 알게 된다. 


만약 클라크가 아버지의 조언을 무시하고 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켜왔다면, 같은 진행이라도 다른 도덕적 중심을 지닌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조드가 지구 사람들에게 “슈퍼맨을 내놔라.”고 했을 때 사람들은 “그럴 수 없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왜냐면 세상에는 그런 “슈퍼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희망과 영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작자들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영화의 예수 이미지 집착에 대해 말이 많지만, 사실 팔을 벌리는 것만으로는 구세주가 될 수는 없다. 영화는 기독교와 전혀 관련성이 없고, 나자렛 색깔을 좀 빌려왔을 뿐이다. 예수는 목을 꺾어버리거나 도시를 파괴하지 않았다. 예수는 어디를 봐도 상당히 괜찮은 친구였다. 예수의 이야기는 연민과 희생에 대한, 완전한 도덕적인 슈퍼히어로 이야기다. 그는 남의 트럭을 테러하려고 외딴 마을의 전깃줄을 뜯어내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히어로도 있다. 나는 문제의 목 꺾기 사건 한참 전부터 클라크 켄트의 모든 선택이 울버린같은 히어로가 할만한 선택이라고 느꼈다. 울버린은 사람을 싫어하고 쪼잔하고 음울하면서 그걸 다 간지나게 보이게 하는 캐릭터다. 하지만 울버린은 구세주는 아니다. 울버린은 귀감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 “울버린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라고 쓰여진 팔찌를 차고 다니진 않았을 것이다.

히어로들은 각자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각자 다른 이야기를 전달한다. 대부분의 관객에게 슈퍼맨은 정의로운 영웅이고, 이 점을 탐구하지 않는 이야기는 슈퍼맨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맨 오브 스틸> 제작자들은 슈퍼맨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에는 큰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슈퍼맨의 이름은 제목에도 나오지 않는다. 작중에 처음 그 이름이 언급될 때는 간신히 기어나오는 느낌이다. 이름이 큰 소리로 제대로 읊어질 때, 대사를 말하는 병사는 스나이더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그 이름에 “전혀…좋은 인상을 받지 않는다.” 캐릭터의 가슴에 있는 “S”는 사실 알파벳 “S”가 아니다. 영화는 단 한번도 “슈퍼맨”이라는 단어를 자랑스럽게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에 악당은 슈퍼맨을 파괴해버린다. 악당이 승리한 것이다. 조드 장군은 라라 로-반의 아들을 찾아내겠다는 맹세를 지키고, 비록 크립톤을 자신의 뜻대로 부활시키는 데에는 실패하지만, 슈퍼맨을 이용해 자살하겠다는 목적은 달성한다. 조드는 왜 슈퍼맨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부추겼을까? 그것은 자신의 라이벌인 고결한 죠-엘의 마지막 유산을 타락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조드는 칼-엘의 영혼에 지울 수 없는 흠집을 내고자 했다.

조드 때문에 슈퍼맨은 절대로 위대해질 수 없다. 절대 어떤 귀감이 될 수도, 슈퍼맨이 될 수도 없다. 자신이 쌓아온 시체의 산 위에서는, 그 오랜 기간 동안 인류에 대해 그토록 무심했던 전력으로는, 끔찍하게 부러지는 뼈의 소리로 우리 별에 자신의 존재를 알린 시점에서는 불가능하다.

이것이 스나이더와 고이어가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다. 그들은 나름 타당한 선택을 했고, 이 버전의 스토리와 캐릭터를 즐기는 관객도 있다. 이 버전의 슈퍼맨이 좋다고 말해서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영감을 주는 존재로써의 슈퍼맨을 원한다고 주장하면서 "이것이 나의 슈퍼맨"이라고 한다면 나는 놀랄 것이다.

슈퍼맨에 대한 가장 유명한 문구 중 하나는 죠지 리브스가 주연한 1950년대 TV 시리즈 <슈퍼맨의 모험> 오프닝에서 나온다. 한 남자가 외친다: “저기! 하늘을 봐! 새야!” 이제 와서 식상할 정도로 반복되었으니, 그 뒤의 대사는 다들 알 것이다. 지금 와서는 그 문구에 진부하지 않은 오마쥬를 바치기 어렵다. 하지만 그 안에는 핵심적인 요소가 있다. 많은 팬들에게 있어 슈퍼맨은 경외심을 가지고 우러러보게 되는 존재다. 이 말은 은유가 아니다. 그는 정말로 우리 위에 있다. 그는 모범적이다. 그는 훌륭하다.

그 누구도 경외심을 품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맨 오브 스틸을 바라보지는 않을 것이다. 화면 속에서 드러났듯이, 이 사내는 우리 중의 최선을 대표지도 않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상도 아니다. 고이어와 스나이더의 선택은 그의 도덕적 힘을 벗겨버리고, 우리에게는 적절한 순간이라도 살인하지 않을만큼 순수하고 선한 사람은 없다는 메세지를 남겨준다. 맨 오브 스틸은 미덕의 귀감이 아닌, 죽음과 학살의 상징이다.

만약 당신이 하늘을 나는 사람을 본다면, 놀라며 경외감에 손가락으로 가리키지 말아라. 대신 비명을 지르며 숨을 곳을 찾아라. 이제는 누구도 당신을 구해주지 못한다. 


Posted by 시바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