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2010. 4. 19.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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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 재팬에서 흥미 땡기는 신간을 보고 적어봅니다.

[사이바라 리에코의 인생 화력 대결 1권]...인데 아마 국내에는 생소한 작가겠지만 육아, 갬블, 여행 등 일상,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한 생생한 성인향 개그만화로 유명한 여성 만화가입니다. 국내에는 왠지 만화는 안 나오고 신문독자들의 투고모음집에 일러스트만 곁들인 [아! 딸]이라던가 에세이집 [천사같은 돈 악마같은 돈]만 나왔더군요. 아무튼 대표작은 [우리집]이나 [매일 엄마!]같은 육아만화인데 네이버에 연재중인 모 사카린 과도한 육아웹툰같은 계열과는 다르게 매우 생생하고 처절하게 빡센 일상 속에서 웃음과 훈훈함을 끌어내는 비범한 센스와 내공으로 유명한 만화가입니다. 미대 학비를 벌려고 갬블잡지에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던가, 갬블 만화를 그리려고 갬블을 하다가 도박의존증에 빠져 고생하기도 했고...등등 좀 파란만장한 개인사 때문도 있겠지요.

여튼 표지에서 왜 카이지와 멱살을 잡고 있느냐!-부터 궁금한 분들이 계실텐데 갬블만화로 데뷔한 데서 눈치 채셨듯이 후쿠모토 노부유키와 꽤나 오래 알고 지내던 사이입니다. 20년 전부터 훈남이긴 했지만 설마 저런 그림(...)으로 히트작가가 되리라곤 상상도 못 해서, 장래성 없는 남자로 찍힌 탓에 자신을 포함한 주변의 여자들이 아무도 꼬시지 않은 것을 이제 와서야 두고두고 반성했다는군요^^;

책은 쇼가쿠칸에서 진행한 만화가 대담 라이브쇼를 엮은 것입니다. 라이브쇼의 이름도 [사이바라 리에코의 인생 화력 대결]로 이곳에서 간략한 정리판을 볼 수 있는데요, 만화가를 초대해서 술도 마시며 거의 막말식 토크 만담과 함께 유명 캐릭터, 동물, 건물 등 주제를 정하고 그림 대결(?)을 펼치는 식입니다.


후쿠모토 노부유키와 사이바라 리에코

일단 기획부터 기발하고 도전적인 게, "사이바라가 대작 만화가들을 상대로 그림 대결! 만화가는 정말 그림을 잘그리는가? 그림은 형편없는 주제에 쓸데없이 잘 팔리는 만화가들을 규탄하기 위해, 미대출신 만화가 사이바라 리에코가 일어선다!"...그러니까 대박 작가들을 상대로 (일단은 미대 출신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심플한 개그만화 그림을 주로 그리는) 사이바라 리에코가 그림 실력을 가지고 싸움을 건다는 취지입니다. 물론 원래부터 입장료(3천엔)를 받은 쇼였지만 일본 출판사 상술이 그 정도로 끝날 리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책으로 나오는군요...^^

글쟁이의 '문체'만큼이나 그림쟁이의 '그림체'는 인간으로써, 작가로써 축적해온 경험치의 모든 것을 의미할 수 있는 예민한 부분이면서 만화팬이나 그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강렬히 흥미를 느낄 수밖에 없는 대상입니다. 게다가 인기작가인 우라사와 나오키, 에구치 히사시 외에도 후지코 후지오A나 치바 테츠야같은 거장급 작가들과도 맞짱을 뜨고 그림실력을 만천하에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아슬아슬 위태위태한 기획인 셈인데 사이바라 특유의 막말 하면서도 넉살좋은 입담도 그렇지만, 일본만화의 독특한 제작시스템, 다양한 그림체와 만화에 대한 허용범위가 존재하는 문화가 설립되어 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령 프로만화가인데도 배경을 전혀 못 그리는 작가가 많은데, 이는 어시스턴트에게 분업을 시키는 제작구조 혹은 배경을 거의 집어넣지 않고도 칸을 구성해내는 데에 별로 문제가 없는 작가라는 의미입니다. 그 밖에 일반인들의 환상(?)과는 달리 균형을 잡기 위해 종이를 뱅뱅 돌려 각도를 바꿔가며 그리는 건 기본이고, 심지어 오른쪽을 보고 있는 얼굴을 못 그리는 작가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도 나옵니다.


이전에 올린 [나의 피는 잉크로 되어 있어요]의 작가의 꼬꼬마 그림쟁이 시절 회상씬...에 이어
지금은 프로니까 라이트박스에 대고 그린다=즉 여전히 오른쪽 얼굴을 못 그린다는 고백에 더해
아는 만화 편집자가 편집을 하면서 놀랐던 게 의외로 그렇게 그리는 만화가들이 많다는 충격폭로...!


바꿔 말하면, 만화를 그리는 데에는 그림이 크게 중요하지 않다...내지는 그림 외의 복합적 요소들이 작용한다는 증명이기도 한데요. 우리나라에는 여전히 '잘 그린 만화'의 기준이 극화체, 실사체에 가까운 미려한 그림이라는 인식이 아직 강하게 남아있는 반면에 만화의 양과 종류가 다양한 일본은 잘 그린 만화/그림의 기준이 훨씬 다채롭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정석(?)으로 알려진 얼굴 윤곽부터가 아닌 눈썹부터 그리는 후쿠모토의 작화 방식을 '틀렸다'고 욕하지 않고 '독특하다'고 인정하게 되는 거죠. 그 밖에 국내외의 멋지고 아름다운 그림의 일러스트레이터들이, 간혹 만화 단행본을 내면 그림은 예쁘나 왠지 편하게, 부드럽게 읽혀지지가 않은 경험이 있을 때가 있는데, 이것도 역시 그림을 잘 그린다≠만화를 잘 그린다...의 진실을 증명하는 사례입니다. 물론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이 만화를 그리는 데에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꼭 그림을 잘 그릴 필요는 없고, 바꿔 말하면 그림'만' 잘 그려서는 안되는 게 만화라는 뜻이죠. 그리고 일반적인 기준으로는 미형이거나 정확한 조형미를 자랑하는 그림은 아니지만, 그 자체로써 완성/안정된 그림체도 있습니다.    



츠치야마 시게루의 [먹짱!]
 
그림은 그다지 '못' 그리지만 만화는 잘 그리는 작가들이 있습니다. 츠치야마 시게루의 [먹짱!]이나 일련의 작품을 자세히 보면 (사실 굳이 자세히 보지 않아도...) 인체가 허접하고 그렇다고 비례는 무시하는 대신 나름대로의 세련미나 조형미를 추구하는 그림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게다가 인물타입도 엄청나게 정형화되어 있어서, 그 주인공이 그 주인공 같고 그 라이벌이 그 라이벌 같지요. 하지만 특유의 경쾌하고 호탕한 에너지로 그어진 선은 자선 효과, 과장된 연출과 대사, 강렬한 줌인 줌아웃 등 만화 자체의 리듬과 템포, 내용과 기막히게 잘 맞아떨어집니다. (게다가 음식 소재만화에서 음식을 맛있게 그립니다!) 그 결과물은 페이지가 휙휙 넘어가는, 가독성이 굉장히 높은 대중지향적 오락만화입니다. 즉 츠치야마 시게루가 지향하는 만화에는 그 그림이 최적화된 화풍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어떤 만화는 그림은 못 그리지만 스토리가 엄청  재밌다'는 말은 사실 정확하지 않은 것입니다. 스토리가 재밌다고 생각하게 한 것은, 그림이 스토리와 연출과 그 외의 작품적 '오오라'를 담아내는 데에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림만 떨어뜨려 놓고 보면 예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사실 만화 전체로써 보면 훌륭하고 적합한 그림이라고 해야겠죠.

[사이바라 리에코의 인생 화력 대결]은 그림 못 그리는 만화가에게 철퇴를!...이라고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로는 만화에는 수없이 다채로운 화풍과 재미가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전제로 깔고 있기에 온갖 막말이 오가도(...) 존립할 수 있는 기획이라고 생각합니다. 만화가라는 점을 백분 살린 이벤트라 팬들로써도 흥미롭겠구요. 럽툰이 좀 시들해졌다면, 이런 방향의 이벤트를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에게도 만화가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줄 수도?....뒤집어 말하면 그림만으로는 안 되니 더욱더 어려울 수도 있다는 뜻이지만요...^^;


덤으로 후쿠모토 노부유키의 그림 과제 결과물:
 


후쿠모토 노부유키가 그린 욘사마. 도련님을 그릴 줄 알았는데 의외


후쿠모토 노부유키가 그린 키티(...)


후쿠모토 노부유키가 그린 케헤헤 하고 음험하게 웃는 치비 마루코짱.

Posted by 시바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