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2010. 3. 19. 23:34

*이 리뷰에는 다소의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지난주 생일로 (밥 먹을 상태는 아니라서;;) 어머니와 조조로 보러 갔는데 오오 정말 재밌더군요!

배우들도 훌륭하고 주옥같은 명대사가 줄줄이 박혀 있어서 좋았어요. 이거야 각본상 탈만한 작품입니다.

조지 클루니가 전직지원전문가(career transition consultant)...라는 그럴듯한 이름이지만 실상은 해고전문가인 '라이언 빙햄'으로 나오는데 간단히 말해 '스스로 부하를 자를 배짱이 없는 겁쟁이 사장'들을 위해 대신 해고 통보를 하는 직업입니다. 법적 분쟁 및 해고된 당사자들이 저지를만한 '미친 짓'을 방지하기 위해서죠.

특히 경제 한파로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이루어지면서 오히려 성황을 누리는 직업인데, 이 때문에 라이언은 미국 전역으로 출장을 다니며 1년 365일 중 대부분을 비행기에서 보냅니다. 보통 사람들이 불편하고 번거롭게 느끼는 비행기 여행의 요소들이 라이언에게는 친근하고 안정적인 '일상'의 의식이죠. 도입부에 일을 마치고 물 흐르듯이 호텔에서 짐을 챙기고, 공항에서 체크인을 하고 검색대를 통과하는 과정의 연출이 그렇게 의식화된 라이언의 삶을 잘 보여줍니다. 물론 당연히 마일리지는 엄청나게 쌓여서 항공사, 공항 라운지, 호텔에서 VIP 대우를 받고 마일리지 축적에 집착하여 지금까지 6명만 존재했다는 1000만 마일리지 등극의 꿈을 꾸는 마일리지 오덕이기도 합니다. 본직 외에도 '가방을 내려놓으라'는, 인생의 쓸데없는 짐을 훨훨 털어버리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기도 하지요. 이렇게 쿨쉬크하게 사는 듯한 라이언에게도 느닷없이 격변기는 세 여성들을 통해 들이닥칩니다. 첫번째는 자신과 꼭 닮은 커리어우먼 알렉스와의 만남이고, 두번째는 원격화상통신을 통한 해고통보 시스템을 제안하여 라이언의 삶의 방식을 위협하는 당돌한 신입사원 나탈리와의 동반출장, 세번째는 수년동안 얼굴도 마주치지 않았던 여동생의 다가오는 결혼식입니다.

이 영화는 언뜻 보면 하나의 특이한 개인에 대한 이야기 같지만, 사실은 인생에 대한 우화입니다. 구조조정과 불황에 오히려 번창하는 라이언의 직업부터가 그렇지만, 온갖 아이러니적 상황이 벌어지는 것은 곧 인생의 부조리함과 아슬아슬함을 반영한 것입니다. 원격화상 해고시스템을 제안한 나탈리는 무참하게도 문자메세지를 통해 남자친구에게 채입니다. 라이언은 안정된 인간관계를 부정하는 쉬크한 논리를 내놓으면서 여동생 결혼식을 위한 번거로운 사진을 찍고, 알렉스와 지금의 관계 이상의 무언가를 원하지만 자신이 뭘 원하지도 잘 모르고, 쿨하던 그가 어이없게도 사랑에 매달리는 남자, 버림받은 남자가 되고 맙니다. 라이언이 마일리지와 VIP 지위에 느끼는 집착은 역설적으로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암시합니다. 그가 (의뢰주 사장들을 대신하여) 해고하는 직원들이 직장에 갖다바친 세월과 열정이 웬 생면부지의 남자의 한마디에 끝장이 나는 것처럼 말이지요. 

생일날 봐서 그런지 주인공에게 공감하고 (아 물론 멋진 프로페셔널인 죠지 클루니와 저는 한점도 닮은 구석이 없지만, 주인공이 느끼는 고뇌나 고독에 대해서요) 온갖 희비극적 상황에 웃으면서도 자신의 지금까지의 인생을 돌아보게 만드는 영화였습니다. 인생에 목적을 부여하는 것만이 삶의 의미를 가져다 줄까요? 만약 그 목적이 달성된 다음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단 하나 확실한 건,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진실은 변함이 없을 겁니다.


*당황, 혼란, 분노, 절망 등 다양한 반응을 보이는 해고대상자들은 사실 배우가 아닌 실제로 해고를 겪은 일반인들 중에서 뽑았다고 합니다. 해고통보를 받았을 당시의 자신의 반응, 혹은 취했으면 좋았다고 생각하는 반응(저같은 경우 깽판 부리고 싶을 듯...^^)을 수집해서 재현해달라고 요청했더군요. 어쩐지 리얼리티가 있더니만...

*조연의 두 여배우들의 역할과 연기도 무척 훌륭합니다. 나탈리는 첫인상은 건방진 애송이였다가 남친에게 문자로 채여서 호텔 로비에서 엉엉 짜는 여자애가 되니 참 귀여워지더군요. 알렉스는 나쁜 여자라고 욕을 먹을만 하긴 한데(개인적으로는 그 미모와 몸매로 애 둘 있는 엄마라는 점이 가장 심각한 사기였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종류의 여성캐릭터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그려진 경우도 드물고, 또한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라이언의 일방적인 착각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라이언은 그녀를 자신과 똑같은, 문자 그대로 라이언 여성판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그렇지 않았고 타인인 이상 그럴 리도 없으니까요. 역으로 알렉스는 라이언을 자신과 똑같거나 비슷하게 따로 가정이 있으면서 캐주얼한 관계만으로 만족할 남자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 외에 등장시간은 짧지만 라이언을 은근히 강공스럽게 부려먹는 상사도 인상적인 캐릭터였습니다.

*결혼식 당일날 긴장해서 주일학교 교실에 틀어박힌 라이언의 매제가 읽고 있던 동화책이 국내에 [인형의 꿈]으로 번역된 [The Velveteen Rabbit 벨벳 토끼 인형]인데, 1920년대에 출간되어서 지금까지 사랑받는 고전입니다.



인형토끼가 소년에게 사랑받음으로써 진짜 토끼가 될 것을 꿈꾸고 마지막에는 진짜 눈물을 흘려서 요정에 의해 진짜 토끼가 된다는 내용인데, 라이언의 삶은 이 동화가 다소 어둡고 현실적으로 반영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마지막에 알렉스는 라이언에게 말합니다. '이게 (한 가정의 어머니이자 아내로써의) 진짜 나에요. 당신은 도피였어요. 나는 어른이잖아요.' 그녀에게도 자신이 '진짜'일 거라고 믿었던 건 라이언의 일시적인 착각이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자신의 진짜 삶은 남들에게는 비일상인, 허공에 떠도는 자의 인생이라는 것의 무게를 깨닫게 됩니다. 토끼인형과 달리 '진짜'라는 것을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규정할 수 없는 자는 홀로 그렇게 살아갑니다. 동시에 타인과 맺는 관계의 의미와, 자기 나름대로의 관계맺기를 실천해 갑니다. 신혼여행할 자금이 없는 여동생 부부에게 지금까지 금쪽같이 모아온 마일리지를 일부 양도하려고 하거나, 해고전문가라는 일의 무게를 너무나 치명적으로 깨닫고 직장을 그만둔 나탈리를 위해 후한 추천서를 써서 구직을 돕는 식으로 말이지요.

Posted by 시바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