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2009. 9. 1. 01:16


어릴 때 왠지 몰라도 집안에는 각종 뮤지컬 사운드트랙 CD가 굴러다니곤 했습니다.
(아울러 퀸이나 시카고나 각종 클래식 음반도 지금까지 남아있는데 원인은 어머니의 취미.)

[오페라의 유령] [레미제라블] [캣츠] [에비타] 등 유명한 작품 중심이었는데

문제는 CD 형태로 처음 접하다 보니 무대극이라는 개념이 없어서 장황한 드라마 CD로 잘못 받아들였고(...)

그리고 원래 아동용 극이 아니다보니 내용에 있어서 이해하기 어렵거나 납득할 수 없었던 점이 많이 있었습니다.

가령 [오페라의 유령]만 해도 여주인공의 가증스러움과 짜증스러움에 치를 떨었는데 뭐 무대극을 그대로 만들었다는, 떡대 팬텀이 얼굴의 4분의 1만 가리고 나오는 영화판을 보니 원래 의도가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응?)

아마 [레미제라블]이 가장 좋았던 것은 원래 원작이 친숙하기도 했고, 선과 악과 구원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절대 주인공과 메인 악역이 아저씨라서가 아니라...뭐 그것도 있겠지만...

하지만 가장 이해가 안 갔던 것은 (그리고 더더욱 분하게도 노래는 좋아서 계속 들을 수밖에 없던!) [마담 버터플라이]의 베트남 전쟁판인 [미스 사이공]이었습니다. 아시겠지만 전쟁고아인 베트남 처녀 킴과 미군 크리스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리고 있습니다. 서양 남성과 타자로 설정된 동양 여성 커플이니 디플트로 오리엔탈리즘을 깔고 있고, 이 둘 사이에 아이(왠지 아들!)가 태어나는 점, 남주인공이 모국에 돌아가 다른 여성과 결혼해 삼각구도가 성립된다는 점, 그리고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에게 아이를 맡기고 자살하는 결말이 동일하죠.

여성(그것도 동양인 여성)이 희생되는 구도라던가 뭐 답답하기 짝이 없으니 당연히 초딩의 뇌구조로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왠지 요즘 뮤지컬이 땡겨서 다시 들어보니 감회가 새롭더랍니다.

그리고 어느덧 초딩에서 극중의 주인공들보다 나이가 먹어버린 저는 진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러니까 애들은 연애를 하면 안돼...........
로미오와 줄리엣과 같은 교훈

보아하니 킴은 17살 정도밖에 안되고 크리스는 아마 20대 초반 언저리일 거고...즉 애들이지요.

이런 뭣도 모르는 꼬꼬마들이 전쟁통에 사랑한다고 설쳐봐......끝이 좋을 리가 없잖아?

마치 순진한 여고생이 오빠만 믿고 맹목적으로 언제 데리러 오겠지 만나겠지 이러고 있는 셈이고, 반면 전쟁으로 인한 정신적 외상으로 흔들리고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한 남자는 새 출발을 원할 수밖에 없지. 그리고 오리엔탈리즘이고 여성차별이고를 넘어 비극의 연인들이라는 영원불멸의 주제를 너무나 잘 관통시켰기에 이 뮤지컬이 지닌 오랜 생명력이 납득이 갑니다.

잘 보니 [마담 버터플라이]와의 차이점은 그쪽에서는 남자와 새 부인이 아이를 데려가려 하고 그런 입장에 처한 나비부인이 자살하는 것은 긍지 때문인데, 좀 현대적 시대의 [미스 사이공]에서는 솔직히 새 부인에게 남편의 다른 전처에게서 난 듣도보도 못한 애를 키우라는 희생은 너무하니 그런 의미에서 거부하고, 그리고 아이를 친모에게서 앗아갈 수는 없다는 사고방식으로 거부해서 어떻게든 아이를 맡게 하기 위해(=미국에서 혜택된 삶을 누리게 하기 위해) 자살하는 식으로 미묘하게 틀립니다. 사실 전후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아무리 크리스 부부의 원래 의도대로 경제적 원조를 해 준다고 해도) 아이가 자라길 원하는 부모는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반면 베트남과 미국을 오가며 혼혈아들의 수색과 입양을 관리하는 일을 해서 현지 상황에 밝은 크리스의 친구 죤은 킴이 그 정도로 타협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던 거죠. 여기서 킴의 절박감에 대한 각자의 이해 차이가 느껴지는 것 같아요.

덧붙여 [마담 버터플라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스 사이공]의 엔딩이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훨씬 잔인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왜냐면 전자 쪽에서는 적어도 아이만은 아버지가 데려다가 키울 것이 확실한데, 후자에서는 확정이고 뭐고 전혀 없거든요. 그래서 연출가에 따라서는 킴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크리스의 미국인 부인이 킴의 아이를 껴안는 연출을 끼워넣기도 한답니다(...)

그리고 몇년 동안 끈질기게 킴을 스토킹해서 결혼하려는 정혼자이자 사촌오빠인 투이는...킴이 왜 싫어하는지 알겠더라는; 호치민 정권의 공산당 장교라고 하니 좀 유능할지도 모르지만 여자 대하는 데에서는 완전히 찌질남이잖아! 사실 지금의 입장이면 아무 여자와도 결혼할 수 있을 텐데도 굳이 킴을 찾아다닌 것을 보면 가부장적 책임감은 강한 것 같지만 그것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어쩌면 당연하게도) 여자에게는, 특히 모성에게는 위협적인 존재.
 
반면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감상이 있다면 바로 여전히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는 엔지니어라는 점. 짝퉁 롤렉스 시계를 팔기도 하는 포주인데 감초 역이자 전체적으로 암울한 극의 중대한 개그캐릭터입니다. 치사하고 다소 야비한 협잡꾼이자 사기꾼 기질의 인물인데, 기가 세지는 못해서 금방 설설 기고, 전적으로 자기 이득을 위해서긴 하지만 킴과 킴의 아이를 도와주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시궁창같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향상심 강한 몽상가 기질도 있습니다. 전체 극 중에서는 그나마 '밝은' 인물이라고 할까요. 역시 결말을 생각하면 좀 암울할 수도 있지만...

동양풍 멜로디를 적절히 섞은 음악이 좋습니다. 리아 살롱가의 순수한 연심과 강렬한 호소력을 동시에 지닌 목소리는 어린 처녀이지만 강인한 어머니이기도 한 비극의 여주인공에 잘 어울립니다. (그래서인지 에포닌도 함...) 뻔뻔스러운 듯 속물스러우면서 탄탄한 베테랑의 매력이 느껴지는 죠나단 프라이스의 연기도 훌륭합니다. 다시 들어도 기분이 행복해지고 가벼워지는 종류의 뮤지컬은 결코 아니지만 역시 음악이 좋아서 몇번이고 듣게 되네요.
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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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바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