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2007. 8. 20. 14:23
출국 전에 모 언니에게서 빌린 DS용 [역전재판-부활하는 역전]을 클리어했습니다. 영어와 일본어 옵션이 있는 大서비스 때문에 번갈아 플레이하는 재미에 시간이 든 것도 있고 무엇보다 1탄과 2탄 사이의 이야기로,왜 2탄의 나루호도는 미츠루기에게 삐졌는가! 대체 마요이가 수행 간 사이에 둘 사이에 뭔 일이!--라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던 팬들의 의문증을 풀어주는 목적---이 아니라, DS의 기능을 살린 4탄의 파워업된 시스템을 좀 귀찮을 정도로 방대한 분량의 시나리오에 담아낸 특별 에피소드가 있지요.  (말로 설명하면 되는데 왜 증거품으로만 갖다 대야 하는거야! 범인도 주요 범행 방식도 초중반부터 뻔히 알겠는데 중간 단계들을 일일히 거쳐가는 게 너무 귀찮다!--라는 시리즈 뒤로 갈수록 느껴지는 양적 증대에 의한 번거로움이랄지...) 사실 원래부터 추리게임에 가까워서 변호사인가 탐정인가...라는 의혹이 들었는데 새 시스템 덕분에 CSI까지 되었죠. 영어화/미국 로컬라이징은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캡콤게임의 평균적인 영어번역 수준이 워낙 악명높은 것도 있고 상당히 열심히 충실하게 번역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간만에 역전재판 시리즈의 시초를 다시 플레이 하다가 늘 느껴왔던 의문점이 다시 한번 고개를 들게 되었습니다. [재판]이 제목에 붙어 있지만 정확히는 변호사 입장의 재판입니다. 사실 현실적으로는 변호사 대 변호사의 재판이 더 많지만 게임에서는 죄다 살인사건이다 보니 변호사 대 검사의 구도가 되며, 따라서 검찰측과 대적하게 되는 셈이니 검사 캐릭터들도 악역, 내지는 라이벌에 가까운 타입입니다. 요는 절대로 검사 입장의 재판으로는 플레이할 수 없는, 변호측 입장의 재판 어드벤처 게임인 것입니다. (물론 3탄에서는 검사 미츠루기 레이지로 잠시 플레이할 수 있었지만 이것도 언제까지나 변호측 입장이었고, 4탄은 안해봐서 어쩐지 모르지만, 이 게임 역시 주인공은 변호사라는 점에서는 시리즈의 큰 축에서는 벗어나지 않음.)

따라서, [역전재판]은 어째서 시리즈가 4탄까지 나오도록 변호사 주인공/변호사 입장으로써의 게임 플레이를 고집하는 것인가? 제목이 무슨 [역전 변호사]도 아니고 원래 역전하는 게 이 시리즈의 컨셉이라면서 검사 주인공으로 역전하는 건 왜 안되는 거냐! 검사에 원수라도 졌냐!--라는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지사. 게다가 현실적으론 변호사가 더 재수없잖아! 검찰이랑 경찰이 겨우 범인 잡아뒀건만 온갖 치사한 수법을 동원해 무죄로 하거나 감형시키거나 거액의 보상금 타내서 그것의 대부분은 자기가 먹는 것이 바로 전형적인 악덕 변호사가 아닌가! Law&Order(성범죄 뭔지 하는 이해할 수 없는 제목으로 번역된 후편이 아닌 오리지널. 뉴욕 검찰청의 수사, 검거, 재판과정을 보여주며 실제 사건을 다수 모델로 한 점, 드라이하고 충실한 진행으로 장수한 TV 시리즈.) 봐도 배심원 상대로 동정심 전략을 쓰고 증거품도 막 창조해(...)내고 피해자 유족을 위해 열나게 뛴 검찰측 노력도 허무하게 범인인 게 뻔한 녀석이 멀쩡히 자유의 몸으로 걸어가는 게 한두번이 아닌데! 검사도 고생한단 말이다!

...물론 게임제작사도 아마 고려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닐 겁니다. 내지는 고려를 해도, 4탄 내내 변호사 입장을 고수할 수밖에 없는 어떤 이유가 있었다던가요. 어째서 검사가 아닌가? --하는 의문은 게임이 제작된 일본에서의 검사의 이미지 및 사법절차의 특징을 살펴봄으로써 풀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대략 억울(?)한 용의자를 감옥에 처넣어 OTL시키는 이미지라고 할까...

첫번째로, 검사와 변호사가 각각 목적하는 바의 차이점입니다. 극히 간단히 추리자면 검사의 목적은 용의자에게 법의 심판인 정당한 처벌을 받게 하는 것이고, 변호사의 목적은 법적 처분으로부터 의뢰인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좀더 복잡하지만 게임이라는 점을 감안해 단순화시키면 저런 것입니다. 재판의 역사를 봐도 고발하고 재판하는 쪽이 먼저 있었던 반면 피고에게도 변호할 권리, 변호인이 필요하다는 개념의 정립은 후에 발달하며 서양 인본주의의 각성과 함께 자라난, 근본적으로 아무리 죄인이라도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는 지극히 휴머니즘적이고 훈훈하며 선진적인 정신의 토대 위에 생겨난 것이니 정의로움과 정당성이 부여되기 쉬운 점은 당연합니다. 실제로 중세 유럽의 무려 재판이랍시고 부르던 소위 신성 재판을 보면 피고인이 얼마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으며 정당한 재판을 받기 어려웠는지 알 수 있습니다. 게임에서는 변호사의 진정한 가치가 [외톨이가 된 인간의 최후의 아군]이고 직접적인 목적은 의뢰인을 유죄판결로부터 구하는 것이니, 얼마나 정의로운가! 아름다운가! 훈훈한가!--하며 쉽게 게임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이지요. (물론 게임 내에서도 부정적인 변호사의 모습은 나오지만 구체적으로는 자세히 다뤄지지 않는 편입니다.)


신성 재판: 피고인에게 육체적 고문을 가하고 견뎌내면 신의 뜻으로 여겨 무죄판결을 내린 재판.
승소하려면 요가의 달인이나 빅보스 레벨의 체력은 필수!

하지만, 그렇다고 검사가 주인공이 되지 못하라는 법은 없지요. 변호사가 의뢰인을 위해 일하는 것이라면, 검사는 피해자들과 법과 질서를 위해 일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용의자를 추려내고 피고를 정하는 데 있어 강한 책임감을 가지고 철저하고 엄중한 과정을 거친 뒤에야 재판을 걸게 된다는 뜻입니다. 현실적으로 검사가 중범죄에 대한 재판에서의 승소율이 높은 것은 그만큼 신중한 수사과정을 거쳤다는 것도 의미합니다. 또한 (역전재판의 경우 죄다 살인사건이니) 죽어서 말할 수 없는 피해자나, 고통을 겪는 유족들의 입장을 대면하게 되는 인간적 차원에서의 정당성도 충분히 부여됩니다. 실제로 게임 중에서도 인정하는 바이기는 하지만, 서로 다른 목적에 의한 [정당성] 차원에서는 검사와 변호사 어느 쪽도 지극히 타당합니다. 물론 문제는, 그것만이 아닙니다만.

두번째로, 일본에서의 검사/공권력의 이미지가 끼치는 영향입니다. 법학지 Journal of Legal Studies 2001년 1월호에 실린 램지어와 라스문센의 일본의 높은 유죄판결 수치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중범죄에 대한 검사들의 승소율은 99.9%에 달합니다. (미국은 85.5%) 이것은 검찰측의 권력이 그만큼 강하다는 의미와 현실적으로 이미 강자이므로, 게임에까지 주인공을 해먹으면 재미가 떨어진다는 점도 작용할 것입니다. (반면...이미 기술적으로 세계최강인 미군은 온갖 게임에 끊임없이 나오는 걸 보면 현실적 강자가 사실은 주인공 되기 쉬운 거지만...) 그런데 사실 속 사정을 살펴보면 당시 일본 전국의 검사 수는 1200명밖에 되지 않았고, 따라서 피고인이 자백을 거부하거나 결정적인 증거가 충분하지 않은 사건-간단히 말하자면 어지간히 큰 사건이 아니면 검사가 맡지 않는다는-아니, 맡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즉, 승소가 확실한 사건만 재판을 거니까 승소하는 것입니다. 또한 일본의 경우 재판까지는 가지 않고 청문회에서 합의를 보게 되는 경우가 많은 점도 있지요. (미츠루기에게 증거물을 보이면 버럭 화를 내면서 [검사인 나와 변호사인 자네가 한가하게 차나 마시며 증거물 얘기나 하자는 건가!]--라고 하지만 현실은 재판 전에 판사와 함께 셋이서 한가하게 차나 마시며 증거물 이야기하는 것이 당연...) 게다가 많은 변수가 작용하게 되는 배심원 제도가 없고 1~3명의 재판관의 결정에 맡겨지니 안정적인 겁니다.물론 어떤 나라의 경우에도 끔찍한 사건일수록 범인을 잡으려는 조급함에 서두른 경찰, 검찰이 억울한 사람을 용의자로 찍어 감옥으로 보내는 경우나, 독재체제같은 경우 권력의 시녀 소리를 들으며 욕먹을 짓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변호사들의 발자취도 만만찮게 화려하지요. 단지, 일본의 또다른 특성이 또 하나의 걸림돌이 된다는 점입니다.

바로 세번째, 사형 제도입니다. 우리나라와 같이 일본 역시 사형제도를 유지하는 나라이고, 근미래의 일본이라는 설정의 역전재판의 세계관에서도 그 점이 내용에 가끔 (무비판적으로) 반영됩니다. (게다가 1~3년 내에 후딱 처형해버리는 것 같습니다. 감옥에 방이 부족한 건가;;) 주인공이 찾아낸 진짜 범인의 후일담은 감옥에서 만다라를 그리며 죄를 반성하고 뭐 이런 게 아니라 살인죄면 30년형이고, 종신형이고 이런 것도 없이 무조건 교수대로 직행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왜 문제인가, 하면 검사의 목적은 앞서 말했듯이 범인/피고인에게 법적 심판을 받게 하는 것인데 사형제도가 존재하는 경우는 살인죄=극형, 즉 아무리 법과 질서를 위해서라지만 문자 그대로 한 개인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정의를 위해서지만 그 결과 또다른 사람을 죽이는 셈이니 인간적으로 무척 찝찝하며 일말이라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따지고 보면 변호사 측으로 플레이해도 자신의 의뢰인을 지키기 위해 진범인을 색출하고 (사실 현실적으로는 증거불충분만으로 충분히 무죄판결을 받을 수 있고 변호사가 진범인까지 찾아내야 할 필요는 전혀 없지만 게임이니까 진범인이 안 밝혀지면 석연찮으니까 아마도...) 결과적으로 진범인이 체포, 사형당하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검사 주인공의 경우 그것이 좀더 직접적이지요. 이에 대한 해결책은 두가지 있는데, 일단 게임 내에서 눈 가리고 아웅하는-즉 법적인 정당한 처벌, 심판 부분만 강조하고 그것이 사형이라는 형태로 구체화되는 것을 내용적으로 기피하는 방법이나, 세계관 내에서 사형제도를 폐지시키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차피 현재의 리얼 일본도 아니니까요, 뭐. (영매사나 프릴커프의 검사나 법정에서 채찍을 휘둘러도 OK라는 시점에서 이미 어나더 아스트랄 월드....)

결론은, 분명히 검사 주인공을 내세우는 데에 있어 명백히 몇가지 장해는 존재하지만, 극복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전대미문, 시리즈 최초로 검사 주인공!!! 주인공은 3배 강하다는 전설의 붉은 검사를 동경하는 생초짜 검사, 라이벌은 초 거대 돈지랄 로펌의 천재 엘리트 변호사! 전보다 확대된 수사과정으로 용의자들 가운데 진범을 색출하고, 증거품과 증인, 비장의 심리전과 화술 능력으로 새롭게 추가된 [배심원  모드]에서 자웅을 가른다! 정의는 사람들의 동의 하에 성립되는 것! 진실은 반드시 전해진다는 일념으로, 보라색 장미의 사람이 언제나 지켜보고 있음을 믿으며 나아가라! 햇병아리 검사여!..................같은 거 안 내줄려나요?
Posted by 시바우치